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290화 (290/375)

〈 290화 〉 고양이 소녀 #8

* * *

[290] 고양이 소녀 #8

짙은 어둠 속, 돌풍이 휘몰아치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검은 해일이 요동칠 때마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시뻘건 불똥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태풍의 중심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묵빛 소용돌이와 오싹한 기운을 늘려나가는 소녀가.

손위에서 무게감을 더해가는 기운은 곧 터질 듯 붉은 스파크를 사방으로 뻗어댔고,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소녀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 듯 보였다.

저 기운이 착탄한다면 이 공간은 한낱 돌무더기가 되어버리고 말 터, 시신을 수습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거다.

어디까지나 정상적으로 발현할 수만 있다면.

­스스스슥...

소녀의 등 뒤로 거대한 음영이 드리웠다. 천장으로부터 소리소문없이 등장한 생명체.

볼록한 몸체는 검은색 페인트를 엎지르기라도 한 듯 새까맸고, 등딱지에는 인상적인 붉은색 모래시계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매끈하게 뻗은 네 쌍의 다리는 언뜻 요염함이 느껴진다.

소위, 블랙 위도우라고도 불리는 검은과부거미.

방울뱀보다도 강력한 맹독을 지닌 녀석이 소녀의 목덜미에 독니를 드리웠다.

한계까지 요동치던 기운이 작렬하기 직전, 나는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고­

거미가 망설임 없이 독니를 소녀의 목에 박아넣었다.

“───────!!!!!!!!”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퍼졌다. 날카로운 소음 사이로 선연한 거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거미가 짧게 독을 주입하고는 실을 타고 사라지자 홀을 메웠던 바람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짙게 소용돌이치던 어둠이 걷히고, 수런거리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소녀가 불러냈던 그림자 병사도 하나둘씩 형체를 감추고, 마침내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공동에는...

“크윽... 캬아아악!!!”

온몸이 마비된 채 지면에 쓰러져 발악하는 묘인족 소녀가 보였다.

나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두 손바닥을 내보인 채 다가갔다. 성급하지 않게. 천천히.

소녀가 사람 하나 때려죽일 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며 몸부림쳤기에 별 효용은 없었지만.

‘이걸 이제 어떻게 하지...’

시간이 지나면 촉수가 독을 해독할 터, 그 안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

소녀도 나와 같은 안디라 신의 축복을 받았고, 일부러 치사율이 낮은 마비독으로 투입하도록 거미에게 명령을 내린 덕에 목숨을 잃을 확률은 낮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는 난처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일단 촉수가 돋아난 등허리를 확인해보고자 했으나 소녀가 격렬히 저항하는 탓에 도통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나는 근처로 다가온 사슴뿔 개미에게 명령했다.

“일단... 야, 저 단검 좀 뺏어봐.”

­크, 크샤아앗...?

“왜, 넌 어차피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아니면 내가 가리?”

­....크샥.

개미는 영 내키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마지못해 발길을 옮겼다.

잠시 옥신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고, 더듬이 한쪽이 잘린 채 허겁지겁 되돌아오는 개미의 주둥이에는 익숙한 단도가 물려 있었다.

“잘했다 인마. 별것 아니지?”

­.....

“뭐, 어차피 금방 나으면서 고작 그걸로 삐지기는...”

­.....

“알았어, 나중에 따로 불러내서 맛있는 거라도 먹여줄 테니까 기분 풀어.”

­크샤아아앗!!

그제야 만족스럽게 집게를 끄덕거리는 개미를 지나쳐 소녀의 옆에 서자 그녀가 눈을 굴려 날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그렇게나 격렬하게 저항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비독이 전신으로 퍼진 모양.

‘일단은 촉수를 잘라봐야 하나...’

분명 원상태로 돌려놓을 방법이 존재할 거다.

이미 완치된 경험이 있는 란이와, 감염된 뒤로도 이성을 유지했던 노인을 떠올리며 촉수에 칼날을 가져다 대자 소녀가 괴성을 지르며 저항했다.

미안한 마음을 머금고 수술을 집도하는 심정으로 서서히 칼날을 밀어넣자­

“큭...”

시꺼먼 구정물이 울컥 튀어올랐다.

찐득한 액체가 뺨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촉수가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듯 거칠게 날뛰어댔다. 최대한 피부가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자 무딘 칼날로 질긴 힘줄을 베는 듯한 감촉과 함께 촉수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아아아악!!!”

­덥석!

“읏...! 이, 이게...!!”

소녀가 이빨로 내 팔뚝을 물어뜯었다. 분명 전신이 마비되었을 텐데.

나는 첨예한 통증에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물러났다.

이런 수단까지 쓰기는 싫었는데...

“...야.”

­크샥?

“아니, 너 말고 쟤.”

­.....

머리 위를 눈짓하며 고개를 들자 그곳엔 몸길이가 족히 3미터는 될 법한 거미가 대롱대롱 거미줄에 매달린 채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소름끼치게 엄니를 꿈틀거리는 녀석에게 명령했다.

“얘 좀 묶어봐. 팔다리만이라도 못 움직이게.”

­....딸칵.

거미가 위턱을 까딱이더니 꽁무니에서 거미줄을 뿜어내 소녀를 칭칭 둘러쌌다.

한데 포박한 뒤로도 구태여 뜸을 들여 소녀의 반응을 즐기고, 매끈한 다리로 살갗을 훑어내리며 탐닉하고, 위협 섞인 노성을 지르는 소녀의 입을 거미줄로 틀어막으며 농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과부거미는 짝짓기가 끝난 후 수컷을 잡아먹는 잔인함으로 유명했지. 독성도 미칠 듯이 강해서 종종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뱀이나 도마뱀을 사냥했다가 거미줄에 붙잡아 두고 천천히 잡아먹기도 하고.

이러고 있으니 모험가 초창기 시절에 겪었던 트라우마가 떠오르는데...

“성격 한번 겁나 더럽네...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너도 빨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 악!”

찰나, 거미가 뾰족한 발끝으로 내 이마를 콕 찍더니 순식간에 거미줄을 타고 사라졌다.

지금까지 내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던 개미와 노래기와는 판이한 소환수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자니 발치에서 몸부림치는 기쳑이 느껴졌다.

나는 정신을 다잡고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미안, 무서웠지? 금방 풀어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아플 수도 있어.”

“읍!! 으윽!!! 으으으읍!!!!”

­서걱!

시간을 끌수록 소녀의 고통도 커질 터, 재빨리 흑도로 촉수를 베자 불쾌한 감촉이 도신을 타고 전해져왔다. 날이 파고들기 무섭게 뿜어나온 구정물에 닿은 피부가 화끈거리고, 고무를 태우는 듯 독한 냄새에 콧속이 아려온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마침내 최대한 피부에 가깝도록 촉수를 도려내자 검게 반들거리는 환부가 보였다.

날개가 찢겨나간 나비처럼 파르르 떠는 소녀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안쓰럽다.

‘이거 잘못하면 흉질 수도 있겠는데...’

라디를 중학생뻘 꼬마로 착각했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이 소녀도 성인일 테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다.

앞날이 창창한 소녀의 등에 이렇게 커다란 흉터가 남아있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으니.

물론 그것도 무사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왜 반응이 없지?’

란이 때는 촉수를 떼어내자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살기로 번뜩거리는 호박색 눈동자와 침까지 줄줄 흘려가며 거미줄을 물어뜯는 소녀를 난처하게 내려다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하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새 수감동 정리가 끝난 걸까...?

“아, 왔어?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너한테 뭐 좀 물어보려던...”

­철컥.

“...이게 무슨 짓이지 하킴.”

나는 눈매를 날카롭게 갈무리하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게 검을 겨누었기에.

나 또한 천천히 흑도를 들어 겨누자 하킴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 녀석은 완성체다. 대의를 위해서, 더 이상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기 전에 죽여야만 한다.”

“내가 찾던 녀석이야. 이 애를 구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왔어. ...절대로 넘겨줄 수 없어.”

“유감이군. 하지만 이번만은 도란 경의 의견을 들어줄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다.”

맞잡은 칼자루에 힘을 실었다.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킴의 지론도 타당하다.

여지껏 감염체를 조우하더라도 거침없이 목숨을 끊어놓았으면서 막상 최종 숙주인 완성체를 눈앞에 두고 망설이다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분명 있을 거다. 반드시 이 소녀를 살릴 방법이.

나는 천천히 두 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흑도를 중단으로 겨누며 돌진의 전조를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발치에 아지랑이를 피어올리며 도약하려던 순간­

“윽...?!”

시야가 기울어지며 속에서 메스꺼움이 치밀었다.

필사적으로 흑도를 땅에 박아넣어 몸을 지탱하자 신속하게 곁으로 다가온 하킴이 내 얼굴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도란 경 설마 자네...!! 제길... 좋지 않아..”

“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데..”

“자네가 변이하고 있다는 말이다!! 염병할...!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일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내가 감염체가 된다고...?”

그동안 쌓여왔던 게 지금에서야 터진 건가.

“우욱...!”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 안쪽에서 치솟았다. 오싹한 무력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손바닥을 확인해보니 그곳엔 검붉은 토사물이 잔뜩 묻어있었다.

란이 때와는 비교조차도 안 되는 변이 속도, 전파력, 증상.

다시는 라디와 아리엘, 니아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치밀었다.

나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하킴을 올려다봤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까지 죽일 셈이야?”

“젠장...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도란 경은 이미 내 벗이니.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동료를 저버릴 순 없다.”

“방법이 있는 거야...?”

“...아예 없지는 않다. 촉수에 닿은 즉시 치유를 받거나 환부를 도려내면 간혹 감염이 확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도란 경은 이미 전신으로 독이 퍼져나간 상태다. 그것도 아니면 몇몇 교단의 성수가...”

“성수... 잠깐...! 성수?!!”

“그, 그렇다! 일부 교단의 성수가 감염 치료에 효능이 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성수는 무척이나 값비싼 물건일뿐더러 지금 구하는 건 불가능...”

“아아... 고마워... 고맙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나는 속으로 실비, 그림자 여왕에게 절절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녀가 인도해주었던 연금술 가게에서 얻은 성수가 남아있었으니.

허리춤에서 수통을 떼어내자 하킴의 눈동자가 커졌다.

“도란 경, 그건...?”

“잠자코 지켜보고 있어. 기적을 보여줄 테니까.”

수통 뚜껑을 비틀었다. 천천히 마개가 탈락하고 좁은 입구 너머로 수면이 찰랑거리자 향기로운 향이 피어올랐다.

거룩한 신의 힘이 담긴 성수를 조심스럽게 덜어내 피부에 문지르자 촛불을 끈 심지처럼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고통 또한 내게는 기나긴 밤 뒤에 찾아온 햇살처럼 감미롭게 느껴졌다.

“이, 이건 대체...! 도란 경 당신은...”

“으윽...! 흐... 네가 전에 그랬지. 만반의 채비에서 무결 뭐시기가 나온다고.. 큭...! 어떠냐?”

“....수통에 성수를 담아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자네가 유일할 거다. 도란 경은 몇 번이나 날 놀라게 하는군.”

“흐흐... 윽...! 그럼 이제 이쪽이 문제인데...!”

나는 성수를 손바닥에 부은 뒤 소녀의 옷 속으로 팔을 넣어 정성스럽게 도포했다. 아기를 마사지하듯 신중하고, 지극하게.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행위를 지속하자 어느덧 소녀의 피부에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킴이 반색하는 날 힐끗 쳐다보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린 소녀를 결박해두고 구석구석 매만지며 웃는 꼴이라니. 전후 사정을 몰랐더라면 지금 당장 자네를 감옥에 가두어도...”

“닥쳐. ...그리고 이건 내 애인한테 말하지 마.”

“....알겠다. 괜히 잿불을 들쑤셔서 불길을 키울 필요는 없지.”

하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남자의 공감대가 피어오르는 기분.

하지만 점차 상태가 호전되어가나 싶던 소녀가 돌연 토혈하며 발작했다.

“뭐, 뭐야?! 이거 갑자기 왜 그래!? 성수를 부으면 낫는 거 아니었어?!”

“젠장...! 폭주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촉수가 숙주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소녀가 위험해!!”

“제, 제길...! 그렇다면...!!”

나는 수통에 든 성수를 통째로 소녀의 입에 들이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수를 입에 머금는 족족 토해내었고, 도무지 발작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킴이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들며 외쳤다.

“한시가 급하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이 소녀는...! 도란 경!!”

“...그래!”

절대로 괴물로 변하도록 놔두지 않겠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구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나는 성수를 입에 머금었다. 입에 성수를 머금고 소녀의 입으로 향했다.

그녀가 삼킬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혀를 구겨넣어 통로를 확보하고, 성수를 넣어주었다. 목구멍 너머로 액체가 흘러들어갈 때마다 소녀의 몸이 크게 움찔한다. 헐떡거리는 가쁜 호흡 너머로부터는 날 갈구하는 절박한 마음이 느껴진다.

옅은 옷감을 뚫고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 온기, 존재감.

소녀와의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오랜 연인과의 재회처럼

정말 오래도록.

*

“...그럼 이제 이곳을 뜨도록 하지. 이 시설은 붕괴 위험이 있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그래.”

“부축이 필요한가.”

“아니, 괜찮아. 대신 업는 것 좀 도와줄래?”

“알았다.”

하킴의 도움을 받아 소녀를 들쳐업고 일어났다.

전신을 담금질했던 전투의 흥분이 가라앉자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환부가 첨예하게 지끈거리고, 촉수에 닿은 부위가 달군 장작으로 지지는 듯 화끈거렸지만 이를 악물어 버텨냈다.

비틀거리며 발을 내딛자 하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나.”

“그래, 그보다 오면서 내 애인 못 봤어? 그 두 명 있잖아.”

“그러고 보니 그녀들이 안 보이는군. 무슨 일 있었나?”

“...이따가 설명할게.”

약속 장소에 도달했는데도 없으면 뒤쫓아가기로 약속했던 바, 노심초사하며 발길을 옮기다 보니 라디와 아리엘과 헤어졌던 장소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엔 두 녀석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피떡이 된 영주와 함께.

하킴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여, 영주...? 도란 경!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왜 영주가 이곳에...!”

“아까 비밀통로로 빠져나가려던 걸 발견했거든. 다행히 잘 풀린 모양이네. ...그리고 어깨 붙잡지 마. 아파.”

“이럴 수가...!”

하킴이 서둘러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라디와 아리엘도 이쪽을 돌아보더니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 오셨어요 도란님? 마침 저희도 방금 도착... 도, 도란님!! 괜찮아요?!!”

“세상에...! 피투성이잖아!! 괜찮아 도란?!!”

“....”

헐레벌떡 그녀들이 달려오자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다행히 치명상은 면한 모양이라... 다른 쪽도 잘 풀렸고.”

““아...””

라디와 아리엘은 그제야 내 등에 업힌 소녀를 보고 입을 벌렸다.

라디가 가까이 다가와 소녀를 살펴보았다.

“이 애가 바로 그...”

“그래 내가 말했던 그 애야. 얘 하나 구하자고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지금은 곤히 잠들었어.”

“정말로 도란님처럼 검은 머리네요... 그런데 엄청 예쁘다... 이런 애가 지금까지 슬럼가에서 지냈다고요?”

“그래, 제대로 된 연고도 없는 모양이더라고. 가끔씩 안디라 님이 사정을 봐주긴 한 것 같지만.”

“얘도 몸 상태가 엉망이네... 이리 와, 고생했어 도란. 일단 큰 상처만이라도 지혈해줄게.”

“고마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서 따스한 치유의 권능을 발동시키는 아리엘과 나 대신 소녀를 업고자 팔을 뻗는 라디를 웃으며 제지하고 걷자 영주에게 문책하던 하킴이 다가왔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도란 경, 그리고 두 사람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미안하지만 조사를 위해 영주의 신변은 내게 맡겨줄 수 있겠나? 내 절대로 유면하지 않고, 공공하고 투명하게 끝까지 책무를 다하도록 약속하겠다.”

“뭐...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긴 한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일단은 왕실 측에 연락해 조사단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할 예정이다. 영주의 만행을 낱낱이 밝힌 이후로는 교회로 넘어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겠지. 그 뒤로는 죄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도란 경 덕이다. 이교도 사건을 비롯해 베라스틴은 그대에게 큰 은혜를 입었군.”

“뭐... 그렇지. 이번 사건은 시민들에게도 공표되는 건가?”

“안건이 안건이다 보니 그리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엔 시민 중에서도 희생자가 다수 나왔으니 말이다. 갑자기 하루아침만에 이 모든 걸 밝히면 시민들이 혼란스러워할 테니 약간의 유예를 두고 발표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하킴이 얼굴에 신발 자국이 선명한 영주와 태연하게 걷고 있는 라디, 아리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짐짓 헛기침하며 읊조렸다.

“이건... 체포 과정에서 도주 중 제풀에 걸려 넘어졌다고 해두지.”

“고마워. 은근 융통성도 있는 점이 맘에 든다니까.”

나는 미소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협소한 통로를 부지런히 걸어 널찍한 수감동으로 나오자 그곳엔 감염체와 융합체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세 기사가 다가와 경례했다.

“백부장님!! 명하신 대로 이곳을 수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희생자 파악은 끝났나?”

“옛! 해치운 변이체의 수는 얼추 이백에서 삼백 남짓, 융합체는 총 아홉 구. 이외에 감옥 내부에 수감되어 있던 인원 중에서도 약간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참혹하군... 피해가 더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이동한다.”

““넷!!””

“자, 잠깐만...! 한 명이 안 보이는데...”

나는 서둘러 하킴을 불러세웠다. 우리와 함께 이동했던 상급 기사는 총 다섯 명. 한 명은 융합체와의 전투 도중 전사한 걸 감안하더라도 숫자가 빈다.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하킴이 대답했다.

“나이트 배너렛 중 한 명은 감시 목적으로 죄수들을 쫓아갔다. 그들은 여러모로 폭탄과도 같은 존재니. 노예 신세에서 해방해주겠다고도 제안했는데 도통 말을 듣지 않더군. 도란 경은 그런 무지막지한 작자들을 대체 어디서 섭외한 겐가?”

“뭐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러고 보니 죄수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백발 노인은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아있었는데...

나는 마저 발길을 옮겼다.

죄수들이 빠져나가며 파괴한 흔적으로 가득한 복도를 전전하다 보니 지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다소 조급한 심정으로 층계를 올라 연무장으로 발을 디디자 내 눈에 들어온 건...

“니, 니아 님...!”

폐허가 된 공터 중심에서 서럽게 앉아 울고 있는 니아였다.

나는 황급히 등에 업은 소녀를 라디와 아리엘에게 맡기고 달려나갔다.

“니, 니아 님 괜찮아요?!! 혹시 어디 다친 덴...!!”

재빨리 그녀를 더듬으며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팔다리도 멀쩡히 붙어있고 외관상으로 크게 다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자잘한 상처를 조금 입긴 했으나 이 정도면 아리엘의 능력으로 금세 치유할 수 있다.

피와 먼지,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지언정 여전히 매혹적인 금발 소녀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리.”

“네...?”

“소년이 사준 열쇠고리... 훌쩍! 망가졌어...! 꼭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크흥...”

“.....”

자세히 살펴보니 연무장 바닥에 조각 난 무지갯빛 장신구가 놓여있었다.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아 입을 열었다.

“...그러게 누가 싸우는 데 장신구를 가지고 오랬어요. 이런 건 집에 보관해놨어야죠.”

“미, 미안... 훌쩍.. 그... 소년이 선물로 준 거라 한시도 떨어뜨려 놓고 싶지 않아서... 우읏...! 미, 미안해요... 혹시 화났어...?”

“네, 화났어요.”

“으, 으윽...”

니아가 더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바닥을 짚은 팔이 후들후들 떨리고, 치렁치렁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를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좀 더 미안해하세요. 미안해하는 만큼 제 곁에 있어 주세요. 같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도 치고, 함께 수련도 하고. 무엇보다... 자주 웃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하, 하지만 그건... 사죄가 아니라...”

“네, 당연하죠. 제가 니아 님한테 왜 화를 내요.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장신구가 깨진 것도 절 위해서 나서주다가 그런 거잖아요.”

오히려 액운을 막아준다는 부적처럼 이 열쇠고리가 대신해서 불행한 일을 막아준 게 아닐까 싶다.

그 왜 지금까지 나와 니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전쟁 영화에 등장하는 클리셰처럼 언제 누가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으니.

하지만 니아는 여전히 불안에 젖은 눈동자로 날 올려다봤다.

“하지만... 이런 칠칠맞은 내가 계속 소년의 옆에 있어도 될까...? 난 그냥 민폐만 끼치는 게...”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니아 님이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셨는데. 이번에도 니아 님이 없었으면 저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에요.”

“그, 그래도...”

니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모양.

선물 받은 물건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한 지 하루밖에 안 되어 처참하게 부숴 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이럴 땐 백 번 말로 하는 것보다...

­...쪽.

그녀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키스해주자 황금빛 눈동자가 토끼처럼 똥그래졌다.

니아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소, 소년 방금... 방금...”

“...이러면 믿겠어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고작 그런 일 가지고... 읍?!”

니아가 날 덮쳤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피와 땀 냄새를 뚫고 들어오는 그녀의 아찔한 체취, 정말로 소중한 보물을 끌어안은 듯 힘을 싣는 팔뚝에 저항도 못 하고 안겨 있자니...

“읍?! 으읍!?!”

지, 지금 혀 넣으려고 했어?!

나는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떼어놓으며 외쳤다.

“까, 깜짝이야...! 가, 갑자기 그렇게 덮치면 어떡해요!! 그것도 다 보는 앞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한데 니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소년이 너무 좋은걸...?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어.”

“그, 그래도 아직 연인으로 받아들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요! 그건 좀 더 마음의 각오를...!”

“응 너무 좋아 소년... 헤헤..”

“....”

품에 안겨든 니아를 다독여주고 있자니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라디가 우리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나아 님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그 남자는 어디에...?”

“아... 그 사람은 도망쳤어.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는데 마지막에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그래도 크게 혼쭐내줬으니 당분간은 잠자코 지낼 거야.”

“그런가요... 붙잡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니아 님이 크게 안 다치셔서 다행이에요.”

“응! 고마워 라디!! 아리엘도!!”

“.....”

서로를 마주보며 온화한 미소를 피어올리는 세 여인을 보고 있노라니 하킴이 헛기침하며 다가왔다.

“크흠...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만... 이제 슬슬 서둘러야 한다. 동이 트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그래 알았어.”

천천히 일어나 발길을 옮겼다.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소녀를 둘러업고 나아가다 보니 감염체를 잔뜩 쓰러뜨렸던 연회장과 기사들이 잔뜩 모여있는 내성 초입이 나왔다.

사로잡힌 영주를 보며 수군거리는 이들, 그새 태세를 전환해 하킴에게 각 잡힌 경례를 보내오는 기사들을 지나쳐 계속 나아가자 우리는 도개교가 있는 성문 앞까지 도달했다.

하킴이 병사들에게 명령해 도르레를 작동하도록 명령하며 말했다.

“원래 이 시간에 정문을 여는 일은 흔치 않다만... 특별히 허용하도록 하지. 원래는 백부장의 권한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우리는 그냥 성벽을 타고 나가도 괜찮은데.”

“베라스틴의 영웅을 그렇게 홀대할 순 없다. 나름의 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해다오.”

하킴이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날 마주보았다.

기사는 꽉 틀어막힌 무뢰배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 편견에 일침을 가한 사내.

마침 부단장도 도주했겠다, 전대에 비하면 실력은 조금 모자랄지언정 이 녀석이 기사단장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나는 웃으며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데 도개교가 내려가고 눈에 들어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나으리!! 무사하셨습니까?! 도우러 왔습니다!!! 베라스틴 소속 노예상과 제 산하의 노예 중에서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란 인원은 죄다 끌고 왔습니다!!”

“도란 군! 약속대로 믿을 수 있는 모험가들을 모아왔네!! 언제든 영주성으로 진입할 준비가 되었으니 말만 하게나!!”

“현 베라스틴 동쪽 지구와 서쪽 지구 대피 준비 완료했습니다!!!”

“으핫하하!! 전투다!! 진탕 싸우다가 술집이나 가자고! 앗...! 도, 도란 님...!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아카이아 길드의 엄베르크입니다!!”

“원조하러 왔소이다!!!”

““전투다 전투!! 와아아아아!!!””

노예상 돌킨, 아카이아 길드 부 지부장, 언뜻 지나치며 얼굴을 익혔던 모험가와 이름 모를 용병, 노예 구속구를 찬 건장한 사내 등등...

언뜻 봐도 삼백을 웃도는 인파가 그곳에 몰려있었다.

당장에라도 영주성에 쳐들어올 것처럼 횃불을 높게 치켜드는 군중을 보며 하킴은...

“이, 이게 다 뭔가... 설마 도란 경이...”

“.....”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사람들을 모아 후일에 대비한다고.

설마 그게 이렇게 큰 나비효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지만.

우리가 도개교를 지나 성 앞 부지로 나오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다들 내가 뭐라도 말하기를 기대하는 눈치.

슬쩍 고개를 돌려 하킴을 쳐다보자 그는 폭포수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영주성 수습은커녕 당장 그간의 일을 해명하는 것부터 시작해 고행길이 펼쳐질 게 눈에 훤하니까.

나는 그런 하킴에게서 천천히 눈을 떼고는...

“다들 주목!!!”

““.....?””

“영주성 사건은 알아서 잘 처리했다! 그러니 이번 일의 전말은 여기 있는 자랑스러운 하킴 백부장에게 전해 듣도록. 그럼 이만!!”

골칫덩어리 업무를 뒤로하고 퇴사하는 회사원처럼 밝게 손을 흔들며 재빨리 군중을 빠져나오자 등 뒤에서 하킴의 끔찍한 절규가 들려왔다.

아마 아침까지 사람들에게 붙들려 있지 않을까?

‘뭐... 차기 기사단장 후보라면 이 정도 고난은 감내해야지.’

조용히 뒤따라 나온 라디 일행과 함께 북쪽 거리를 걷고 있자니 아리엘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복잡한 심경이네... 앞으로는 많은 게 달라지겠어. 이번 일로 도란이 안디라 님의 권능을 받은 존재라는 게 알려질 수도 있고...”

“뭐... 그 정도는 감내해야지. 성가신 일만 안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니아 님하고 연애한다는 소문이 퍼진 시점부터 이전처럼 조용히 사는 건 무리기도 하고.”

무성한 소문에 이야깃거리가 한 가지 더 추가될 뿐이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애초에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으니까.

“.....”

힐끗 등 뒤에 짊어진 무게감을 의식하자 고요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녀는 대체 누구길래 안디라 님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걸까.

소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기시감, 나와 판박이인 전투 스타일, 그 외에도 검은 머리칼을 비롯해 자잘한 공통점까지.

복잡한 머릿속을 끌어안고 어스름하게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 가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저택에 도착했다.

고즈넉한 정원을 지나 문을 열고 현관에 도달하자 라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욕실에서 씻고 올게요. 땀 때문에 찝찝해서...”

“그래, 느긋하게 씻고 와. 이제 진짜로 다 끝났으니까. 뭣하면 저번에 남은 입욕제도 쓰던가.”

“네... 그것도 좋지만...”

라디가 날 힐끔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란님도 같이 씻으실래요?”

“뭐...?”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아까 니아 님도 같이 들어간다며.”

“네.”

“....?”

대화가 안 맞물리는 느낌이다.

...분명 저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라디가 뺨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이런 말도 조금 새삼스러운데... 이제 괜찮지 않겠어요? 니아 님이랑 같이 들어가도.”

“아, 아니 절대 안 되지. 난 아직 니아 님하고는 교제하는 게 아니...”

“...뽀뽀까지 다 해 놓고선.”

“.....”

그렇게 나오면 제가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등 뒤의 소녀를 눈짓했다.

“일단 오늘은 안 돼. 적어도 이 애가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지.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그래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조금 아쉽지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네 소년.”

“.....”

어쩐지 계속 자리에 있기가 무서워 나는 서둘러 2층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오는 동안 열심히 상처의 지혈을 막아준 아리엘에게 뽀뽀한 뒤, 지금은 란이가 종종 뛰놀곤 하는 손님용 빈방으로 들어서자 안락한 앤티크 풍 가구들이 보였다.

일단 소녀를 부드러운 소파에 앉히고 촉수에 감염되었던 부위를 확인하려던 찰나­

“.....”

“흐익?!!”

소녀가 주홍빛 눈동자로 날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나, 난 환부를 확인하려던 것뿐이고 이상한 생각은 단 요만큼도...!!”

“.....”

“호, 혹시 내가 누군지 알겠어...?”

“.....”

긴장 탓에 목소리가 굳어졌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감염의 증세는 사라졌지만 아직 완전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확증은 없는 노릇.

기억상실증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고 최악의 경우 재발할 가능성도...

­...끄덕.

“다, 다행이다... 그럼 혹시 좀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기억해? 촉수에 감염된 너를 우리가 구해왔는데...”

“.....”

소녀는 잠시 내 얼굴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왠지 방금 뺨이 살짝 붉어진 것 같은데..

“그렇구나... 뭐, 그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그보다 너한테 궁금한 게 조금 있는데... 혹시 지금 괜찮겠어? 피곤하면 나중에라도...”

­끄덕.

“...그래, 그럼 혹시 날 이전에 본 적 있니? 노예 거래소에서 만났던 때보다 더 이전에.”

대답 여하에 따라 기시감의 정체를 해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녀는 명백한 부정의 뜻을 담아 살짝 눈을 감았다.

나는 다소 아쉬운 속내를 감추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전투는, 혹시 누군가에게 싸우는 법을 지도받은 적은 있어?”

­...도리도리.

“그렇구나... 그렇다면 부모나 지인은? 혹시 안디라 님.. 아니, 종종 널 도와줬다던 아저씨한테 무언가 귀띔을 들은 적이 있어? 나와 관련된 내용이라던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해서 미안해.”

­....도리도리.

“그래? 그렇구나...”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나며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이 소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자신을 도와주던 존재가 안디라 님이라는 것조차 모르던 눈치니. 그분은 워낙 비밀이 많은 신이니까.

아직 내게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한몫하겠지만.

숱한 길거리 생활 때문일까, 경계심 섞인 차가운 눈매를 마주하고 있자니 문뜩 좋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이 방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찾았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 한구석으로 다가갔다. 침대 옆 선반, 토끼 인형이 놓인 곳으로.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연금술 가게에서 성수와 함께 공짜로 얻어 온 상품. 처음엔 란이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취향에 안 맞는 탓인지 방치해두었던 물건이다.

지금까지 계속 슬럼가에서 노숙해왔다면 인형 같은 건 꿈도 못 꿨을 터, 이거라면 분명 녀석도...

“자, 이거 가질래?”

“....이건.”

“토끼 인형이야. 네가 받아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마침 주인이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

“괜찮아,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나도 너처럼 검은 머리다 보니 그동안 여러 일을 겪었거든. 이 저택엔 너를 질시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없으니 편하게 있었으면 해.”

“.....”

소녀는 여전히 경계심을 거두지 않은 눈치였지만, 조심스럽게 인형을 받아들었다.

이윽고 한참 동안 인형을 응시하다가 날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은 한결 누그러들어 있었다.

작전이 성공한 걸까?

나는 시원스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맘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네. 아, 그리고 일단은 당분간 너를 우리 저택에 받아주려고 하는데... 몇 주만이라도 우리랑 같이 지내보는 건 어때? 그렇다고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특별히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니까.”

“....정말로?”

“그래, 네가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네가 도움을 받았다던 분이 내가 아는 분이거든. ...만약에 도중에 네가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저택에서 나가도 괜찮아.”

“.....”

소녀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였으나 이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니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잘 생각했어. 그럼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될 테니 잘 부탁할게. 화장실은 여길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데 지금은 내 애인들이 쓰고 있고, 배고프면 이곳 지하 식료품 창고에서 아무거나 꺼내서 먹어도 돼. 부엌도 마음대로 써도 되고.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어?”

“.....”

­도리도리.

“그래, 그럼 난 이제 가볼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저택에 있는 사람 중 아무나 붙잡고 말하면 돼. ...아, 맞다.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혹시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어?”

“....이름?”

“그래, 앞으로 같이 지내려면 서로 이름을 알아두는 편이 편리하니까. 내 이름은 저번에 들었지?”

내 기억으론 돌킨의 노예 거래소에서도 소녀의 이름을 물었지만, 그때 그녀는 대답을 피했었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기다리자 소녀는 인형에서 눈을 떼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ㅡ

“.....실비.

그게 제 이름이에요.”

나는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걸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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