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진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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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진실 #1
“...다들 모였지?”
“네, 도란님.”
“응, 준비 됐어.”
“.....”
영주성 사건 이후 하루가 지난 시점, 저택 2층, 창고 방.
두꺼운 커튼 틈새로 새어들어온 빛줄기가 어두컴컴한 실내에 희미한 무늬를 그리고, 뿌옇게 흩날리는 먼지를 비추었다.
나는 원탁에 가까이 의자를 붙여 앉고는, 어렴풋한 촛대의 불빛이 드리운 라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니아는 어떻게 됐어?”
“잠깐 호텔에 가서 남은 숙박료를 돌려받고 오기로 했어요. 나머지 기간은 저택에서 저희와 함께 지내기로 했으니까요.”
“그래... 니아 님한테도 언젠가 밝히긴 해야 할 테지만...”
“지금 털어놓았다간 너무 설명할 게 많아서 이야기에 진전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 그럼 그 묘인족 소녀.. 아니, 실비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지금쯤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거야. 란이랑 같이 갔으니 아마 꽤 걸릴 것 같아.”
“그래,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어둠 속에서도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두 녀석의 눈동자를 번갈아 보며 서론을 열었다.
“....우연일까?”
“.....”
라디와 아리엘이 나란히 대답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응, 나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해 도란.”
“아무래도 그렇지...”
소녀의 이름이 여왕과 일치한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겹쳤겠거니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해. 당장 나열할 수 있는 공통점만 봐도...”
“둘 다 안디라 님의 축복을 받았죠. 역사적으로 정말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안디라 님의 권능을...”
“게다가 신장도 비슷해. 라디보다 주먹 한 개 정도 작잖아.”
“수인이라는 점도 같아. 그 왜, 여왕의 머리 위에 뭔가 가물거렸잖아. 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 보니 영락없이 고양이 귀네.”
“검은색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는 점도 공통점이라면 나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머리색이라던가... 귀나 꼬리라던가... 도란님 뭐 더 떠오르는 거 있어요?”
“응, 이건 좀 긴가민가한데... 던전 1계층에서 2계층으로 넘어가는 동굴에서 여왕을 처음 만났을 때도 토끼 인형 비슷한 걸 들고 있지 않았어?”
“...그런 일이 있었어요?”
라디가 살짝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나는 턱을 짚고 전전긍긍하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 좀 오래돼서 기억이 흐릿한데... 분명히 있었어. 여왕이 인간 모습으로 변하기 전, 괴물 형태로 우리를 공격했을 때 내가 놈을 뒤에서 기습해서 촉수를 베려고 했었거든. 근데 그때 토끼 모양의 무언가가 앉아 있어서 들통났던 기억이 나.”
“토끼 인형이라... 근데 그때도 촉수가 있었나 보네?”
“어... 젠장,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러네.”
“.....”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이 정도.
이쯤 되면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야속할 정도다.
나는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되돌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인데...”
소녀와 여왕이 동일 인물이라면, 그것이 뭘 의미하는 거지?
말을 끝마치자 잠시간 원탁에 적막이 찾아오고, 왠지 모를 오싹함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라디가 불안하게 깜빡거리는 촛대를 힐끗 흘겨보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환생... 이려나요? 그것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아니, 환생이라는 게 가능한 거였어? 아리엘, 혹시 짚이는 게...”
“....”
아리엘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나도 이쪽은 잘 몰라. 사후 개념은 신마다 이야기하는 게 전부 다르거든. 어떤 신은 사후 세계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신은 생사가 되풀이된다고도 하고...”
“신마다 하는 소리가 다르다고...?”
“응,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펼치는 주장이 전부 상이하셔... 일부러 그러는 걸 수도 있고, 어쩌면 그분들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건...”
“죽음의 신한테 묻는 거겠네요. 도란님, 혹시 안디라 님하고 만났을 때 뭔가 들은 건 없죠?”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들은 건 딱 두 마디뿐이었어. ‘약하구나’랑 ‘이번엔 실패하지 마라’ 이렇게.”
“이번엔 실패하지 마라? 이번엔..? 이번...?”
뭔가 걸리기라도 한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 라디를 잠시 뒤로하고 아리엘을 쳐다보자 그녀가 난처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죽음의 신이시니까 신도를 환생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밝혀지지 않은 권능일 수도 있고. 애초에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미 오래전에 죽은 여왕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잖아.”
“그러네... 어제까지만 해도 나랑 직접 대화를 나눴으니까. ...성수를 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었고.”
결국 그 성수 덕에 실비를 구할 수 있었다. 나도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고.
하지만...
“지금 저택에 있는 저 여자애가 여왕의 환생이라고 치면 두 가지 의문점이 있어.”
“...말해 도란.”
“우선 환생이라고는 해도 한 시대에 동일한 인물이 둘이나 존재할 수 있는지. 말마따나 저 애랑 안디라 님을 따라간 여왕하고 같은 인물이라는 거잖아.”
“....두 번째는?”
“....여왕이 날 처음에 보자마자 알아봤잖아. 예전부터 엄청 잘 알던 사이처럼. 그때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도 알고 있었고.”
내가 지구 출신이라던가.
머릿속에 한 가지 강렬한 가능성이 떠오르는 가운데, 라디가 정확히 같은 의견을 입에 담았다.
“소녀, 그러니까 실비뿐만이 아니라 도란님도 환생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
“......”
“.....”
다시 한번, 정적이 내리깔렸다.
나는 힘겹게 이마를 짚으며 침묵을 깼다.
“아니 뭐... 그런 결론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안 믿어져요?”
“아니, 솔직히 당장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 그렇게 가정하면 풀리는 그간의 의문이 한둘이 아니니까.”
여왕이 날 알아봤던 요인, 실비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기시감, 이 세계에서 활동할 때면 이따금씩 찾아오는 데자뷰 등.
생각해 보면 이곳의 언어를 굉장히 빨리 깨우친 편이기도 하고, 칼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스스로 관록이 묻어나오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애초에 난 어떤 경위로 이 세계에 오게 됐는지도 불분명하지 않던가.
“제길... 처음부터 시간 개념이 같을 거라 생각한 것부터가 어리석었지..”
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시점부터 이미 지구에서는 수백 년이 흘러 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이미 오래전에 이 세계에 활동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기억을 잃은 뒤 다시 돌아왔을 수도 있고.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확장되는 가능성에 머릿속이 지근거리는 와중, 라디가 입을 열었다.
“근데... 꼭 도란님만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건 또 무슨 의미야?”
“예전에 제가 그랬잖아요. 겨울 호숫가에서 도란님이 언니에게 마음을 고백하던 날, 언젠가 도란님이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게 될 줄 알았다고. 그중에서도 아리엘 언니를 만나게 될 거란 것도.”
“...그 난봉꾼 머시기 했던 거 말이야?”
“네, 맞아요! 실비, 그러니까 여왕이 귀띔해줬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 애가 언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건...”
““.....””
나와 라디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아리엘이 흠칫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뭐...? 나, 나도...?”
“....”
젠장,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지하수로에 들어갔을 때 여왕이 나한테 나타나 경고했잖아. 이 아래에 있는 존재를 조심하라고. 그때 아리엘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도 덧붙였고. 그리고 그 말은...”
“.....”
아리엘이 허둥지둥 손바닥을 내저으며 뒷말을 막아세웠다.
“자, 잠깐...! 잠깐 도란! 이, 일단 상황을 좀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나도 옛날에 살다가 죽었던 사람이고, 그때도 도란하고 알던 사이였다고...?”
“일단 지금까지 나온 단서를 토대로 종합해 보면... 그렇죠. 그리고 여왕의 ‘다수의 연인’ 발언으로 봤을 때 이전에도 평범한 관계를 넘어서 연인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실비나.. 아리엘 언니나... 어쩌면 저까지도.”
“...그, 그럴 수가..”
아리엘이 뺨을 붉히며 힐끔힐끔 쳐다봐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면서도 내심 기쁜 모양.
뭐... 생전의 연인과 다시 한번 맺어졌다는 건 소설에서나 나올 것처럼 로맨틱한 이야기니까.
...그나저나 나는 전에도 애인을 몇 명이나 거느리던 놈이었다는 건가.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그럼... 이건 아까 말한 첫 번째 의문의 연장선상인데... 이전 생의 너희가 반드시 죽었으리라는 보장도 없겠네?”
“네...? 그건 무슨 뜻...”
“아니, 그 왜 있잖아. 지금 실비가 여왕이랑 두 존재로 갈라져서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이전 세대에 존재했던 너희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확률도 있지 않겠어?”
“.....”
라디가 의표를 찔린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녀석은 곧 턱을 짚으며 숙고하더니 침착하게 내뱉었다.
“아뇨... 그건 아마 아닐 거예요. 여왕의 경우는 안디라 신의 권능으로 되살아난 워낙 특별한 사례잖아요. 반면 저희는 그분께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여왕이 살아있을 적에 지어진 유적의 연대로 보아 최소 몇백 년 전 이야기일 텐데... 정말 수명이 긴 마물이라도 아닌 한 그렇게 오랫동안 연명하는 건...”
잠깐, 마물...?
마물이라고 하니까 뭔가 걸리는 게...
커다랗고 북슬북슬한, 두루뭉술한 위화감에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자니 아리엘이 나와 라디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나도 그 유적이란 거에 관심이 있는데... 여왕의 생전 시신이 안치된 곳이라고 했었지...? 그러니까 실비의 옛날... 몸이..”
“...그러네, 유적에 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어. 유적 끝자락에 있는 여왕의 묘실에 안치된 시신이 실비와 일치하면... 잠깐, 여왕의 묘실...?”
“여왕의 묘실 앞에 그려져 있던 부조!! 그때 분명히 뭔가 있었어요!! 뭔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 아...!”
“잠깐 그러고 보니...”
또 한 번, 섬뜩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여왕의 안식처 옆에 있던 초라한 왕의 묘실. 내가 갔을 땐 분명히 텅텅 비어있었다.
따로 정인이라도 두지 않는 한 여왕의 애인은 왕일 테고.
왕이 죽지 않았더라면 부장품을 넣어두거나, 크게 만들 필요도 없었을 테고.
왕의 묘실의 석관이 비어있었던 것도, 분명 비어있었을 석관에서 단도가 나타난 것도.
놀라우리만치 지구의 문명과 닮아있었던 이 세계 유적, 그리고 그런 유적을 제작한 정체불명의 인물.
이상할 정도로 우리 일행을 반기던 히드라와 키메라.
한때 그토록 궁금하던 단도의 이전 사용자가...
그게
그것이...
“모두... 나였어...?”
세계가 일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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