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진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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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진실 #2
쏴아아아...
수증기 차오른 욕실. 수도관을 타고 떨어지는 물줄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가 체온을 식혀주고, 배수구로 흘러들어가는 온수가 요란한 소음을 자아냈다.
라디와 아리엘과 의견을 나눈 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오전 내내 수련에 매진하고 욕실로 들어온 것이 지금.
거울에 맺힌 김을 손바닥으로 닦아내자 익숙한 흑발 사내가 보였다.
나는 도로 흐려지기 시작한 거울로부터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세계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지...”
결론은 단순하다.
이외에도 라디와 아리엘과도 과거에 연이 맞닿아 있었다거나, 던전에서 발견했던 유적이 실은 나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둥 여러 가설이 나왔으나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모든 건 유적에 다시 방문해서 확인한 뒤에 판단해도 될 일이니.
“그럼 일단... 유적으로 가기로 방침을 정한 건가...”
니아는 휴가 기간이 끝나는 대로 던전에 복귀해야 할 터, 우리도 7계층에 볼일이 있으니 겸사겸사 들르면 되는 일이다. 이번엔 어떤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알고, 그때에 비해 배로 강해졌으니 힘들이지 않고 미궁을 통과할 수 있을 테지.
만약 저번처럼 도중에 술독이라도 발견하면 횡재하는 거고.
‘아델 누나랑 비아투스 님한테 드릴 선물로는 딱인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뇌까리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으니 이제 슬슬 나가야 한다.
한데...
“어? 이상하다... 왜 없지?”
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선반을 샅샅이 둘러보고 나서야 나는 어젯밤 욕실에 비치해둔 수건을 다 써버렸다는 게 기억났다.
영주성 건으로 하루 온종일 녹다운되어 빨래가 쌓인 데다 갑자기 사람 수가 불어난 탓.
하는 수 없이 화장실 문을 열고 라디를 부르려는 차, 누군가가 수건을 들고 앞에 서 있었다.
고맙게 받아들려는 찰나ㅡ
“히, 히익...! 왜 네가?!!”
실비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며 문 뒤로 숨었다. 불시에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맞닥뜨린 까닭. 아니, 그게 전부라면 이렇게까지 과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그, 그 옷은 뭐야...?”
실비가 입은 옷이 심상치 않다.
검은색과 흰색의 조합. 자칫 속살이 비칠 듯 아슬아슬한 두께의 원단. 늘씬한 비율이 돋보이도록 짧게 디자인된 치마와 허벅지 중간을 수놓은 레이스.
이 모습은 본 적이 있다.
‘도, 돌킨 특제 메이드복...!!’
이, 이게 왜 여기에...?
검은 귀와 꼬리에 어우러져 미친 듯이 잘 어울리는 모습에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자니 실비가 내게 수건 더미를 떠밀었다.
그녀는 힐끗 냉담한 눈길로 날 올려다보더니
“...이상한 거 안 시킨다더니.”
“....”
“이런 게 취향이에요?”
신랄하게 중얼거리곤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불현듯 휑하니 불어온 바람에 몸서리치고는 서둘러 물기를 닦고 나와 저택을 달리다 보니 책장을 정리하는 아리엘과 마주쳤다.
나는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외쳤다.
“아리엘!! 크, 큰일이야!!”
“도, 도란? 큰일이라니 뭐가?”
“지, 집에 귀신이 있어...!!”
“귀신...? 대낮에 갑자기 웬 귀신...”
“그, 그게 방금 내가 욕실에서 나왔는데... 히익!!”
“....”
찰나, 실비가 쟁반을 들고 눈앞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바짝 얼어붙은 채 눈짓으로 가리키자 아리엘이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 도란.”
“아, 아니 방금 너도 봤잖아...! 쟤, 재가 왜 저런 복장을...!!”
하다못해 일반 메이드복이라면 웃으며 넘길 수 있겠지만, 저건 거시기한 쪽으로 개량된 버전이 아니던가.
아리엘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기억 안 나? 저거 네가 라디한테 입히려고 노예상한테 주문했던 거잖아. 실비가 당장 입을 옷이 없으니까 이따가 옷을 사러 갈 때까지 라디가 잠시 빌려준 거고. 내 옷은 사이즈가 안 맞으니까.”
“그, 그렇지만...!”
왜 다른 옷도 많을 텐데 굳이 저 옷을...
뭔가 했더니 라디한테서 빌려 입은 모양. 그러고 보니 돌킨한테서 입욕제를 받아올 때 저 옷도 주문해두었지. 그 뒤로 소식이 없어서 잊고 살았지만.
그나저나 이전에 성수를 발라줄 때 깨닫긴 했지만 가슴 쪽 천이 헐렁한 걸 보니 실비는...
“.....”
“히이이이이익!!!”
순간, 싸늘한 호박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화들짝 물러나며 고개를 내리깔자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응, 고마워 실비야. 나랑 도란도 바로 갈게.”
“.....”
실비는 조용히 아리엘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부엌 쪽으로 향했다.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아리엘이 내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야. 니아 님 때도 멀쩡했으면서.”
“하지만... 쟤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단 말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니아 때와는 다르다.
오랜 길거리 생활로 몸에 밴 경계심,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무표정한 입매, 이에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는 차가운 분위기 탓에 쉬이 다가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자칫 서운하게 대했다간 안디라 님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게다가...
‘치료한답시고 그렇게 떡 주무르듯 만져댔으니까...’
의료 행위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더군다나 입맞춤도 진하게 하지 않았던가.
기억은 안 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안 나는 거 맞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발길을 돌렸다. 창문이 활짝 열린 복도를 가로지르자 이른 오후의 햇살이 머리에 드리웠다.
난간을 짚으며 층계를 내려와 식탁에 접어들자 분주히 부엌을 오가는 라디와 물놀이 후 노곤하게 늘어져 있는 란이, 어느새 호텔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니아가 보였다.
니아가 오도도 달려와 품에 안겼다.
“소년! 보고 싶었어!!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지 뭐야!”
“고작 몇 시간 못 본 거 가지고... 일은 잘 마치고 오신 거예요?”
“응! 수수료 빼고 남은 금액만큼 다 돌려받았어! 그리고 나한테도 도시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대! 누군가한테 감사 인사를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게 다 소년 덕이야!”
“잘됐네요... 일이 잘 풀려서. 길드에 폐가 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잖아요.”
“그렇지... 게다가 난 제국 쪽 사람이니까... 근데 소년 좋은 냄새 난다!”
니아가 내 품에 살며시 뺨을 비비더니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행복하게 골골거리는 니아를 끌어안아주고 있자니 오늘 점심을 담당했던 라디가 식탁에 냄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식사 준비 다 됐으니 다들 앉으세요. 손 안 씻은 사람 있으면 부엌에서 씻고 오시고요.”
“우와... 엄청 푸짐하게 차렸네? 이걸 혼자서 다 한 거야?”
“아뇨, 혼자서는 아니고 아까 도란님이 씻고 계실 때 아리엘 언니가 도와줬어요. 오늘 같은 날은 성대하게 축하해야죠. 어제는 다들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했으니까요.”
“그치... 그럼 빨리 식기 전에 먹자. 마침 안 그래도 단련하고 온 뒤라 엄청 배고팠는데.”
의자를 빼내고 자리에 앉았다. 손바닥을 비비며 고개를 들자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음식들이 보였다.
사슴 오븐 구이, 송아지 고기 스튜, 따끈따끈한 식빵, 오일드레싱 샐러드와, 옅은 도수의 과실주, 훈제 햄과 치즈 등.
얇은 난에 각종 고기와 채소를 얹어서 한입 맛보려는 차
“.....”
“....거기서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와서 같이 앉아.”
식탁 구석에서 멀뚱멀뚱 바라보던 실비와 눈이 마주쳤다.
라디가 재빨리 의자를 빼내 주었지만 여전히 실비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할 뿐.
혹시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운 걸까...?
“...괜찮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까 맘 편히 먹어.”
“....”
실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같이 먹어도 괜찮나요? 저는 남은 음식을 먹는 게...”
“남은 음식이라니...”
하긴, 원래 중세의 노예는 주인이 먹고 남은 잔반을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었지.
물론 실비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지만...
“말했잖아. 이곳에 있을 때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이런 건 원래 함께 먹어야 맛있는 거야.”
“.....”
웃으며 종용하자 실비가 마지못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간신히 의자에 앉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후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
나는 녀석의 앞접시에 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요거 한번 먹어봐. 이 소스에 찍어서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어. 저 스튜도 꼭 먹어보고. 라디가 국물 요리 하나는 진짜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요.”
“응? 뭐라고?”
“...진짜 먹어도 돼요?”
“.....”
나는 웃으며 고했다.
“물론이지,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실비야.”
“.....”
실비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식탁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허겁지겁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소스가 손에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입에 넣은 음식을 전부 삼키기도 전에 어떻게든 집어넣고, 가끔씩 캑캑거리며.
앞에 식기가 놓여있는데도 맨손으로 집어먹는 걸 보니 식탁 예절이 익숙치 않은 모양.
우리는 오랜 항해를 마치고 온 뱃사람처럼 전투적으로 음식을 욱여넣는 실비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실비야 이것도 한 번 먹어봐. 민물 송어에 향신료를 곁들인 건데 엄청 부드러워.”
“이거도 맛있다?! 조금 매워도 먹을 만해!”
됴란! 됴란됴란!
“...잠깐만요, 전 앞치마를 좀 가져올게요.”
주변에서 음식을 권하는 손길이 이어졌다.
이에 실비는 힐끔 주변을 곁눈질하더니...
“크, 크흠...”
살짝 부끄러웠는지 작게 헛기침하고는 도도한 몸짓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래봤자 소스가 얼굴에 묻어서 귀여울 뿐이었지마는.
정숙하면서도 빠른 손놀림으로 맛을 음미하는 데 열중하다가도, 이따금씩 뜨거운 음식을 맛볼 때면 먼저 조심조심 혀를 데어보는 모습은 영락없이...
‘...꼭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라도 보는 것 같네.’
나는 위아래로 탁탁거리는 꼬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실비는 아직 술을 마셔본 적이 별로 없지? 그럼 란이처럼 우유라도 마실래?”
“우...유..?”
“그래, 전번에 목장에서 받아온 게 아직 남아있을 텐데...”
“아 잠깐만, 이번엔 내가 다녀올게.”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엌 안쪽에서 컵에 우유를 따라왔다.
실비는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들고 살짝 맛을 보더니...
“....!!”
마, 맛있어!! 하는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며 잔을 쳐다보았다.
나는 눈웃음지으며 말했다.
“어때, 고소하지? 아주 특별한 곳에서 얻어온 거거든. 아직 꽤 남아있으니까 마음껏 먹어도 돼.”
“마, 마음껏...?”
“응, 모자라면 언제든 새로 사다 놓을 테니까. 찾아보면 어딘가 우유 파는 곳 하나쯤은 있겠지.”
“.....”
이에 실비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더니...
“욱... 흐윽...!”
“어, 어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독였다.
“괘, 괜찮아?! 미안...! 설마 우유가 맘에 안 든 건...”
도리도리!
“그, 그럼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아뇨 도란님, 그런 것보다는 그냥..”
“감정이 북받친 것 같아. 그동안 힘들었을 테니까..”
“....아.”
하기야...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이 세계에서 검은 머리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이렇게 어린 소녀의 몸으로 부모도 없이 홀로 길거리를 떠돌며 감내했을 경멸과 멸시의 시선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심지어 최근까지는 영주성에 팔려 가 추위와 배고픔, 언제든 실험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을 테니...
“.....”
나는 소녀를 다독이며 미소지었다.
사람으로 가득 차 시끌벅적해진 식탁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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