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 진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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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진실 #3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자 실비는 원래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만 이전처럼 깨진 유리와 같이 날카로운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뺨에 은은한 혈색이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식탁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실비에게 미소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2층으로 향했다.
한데 복도를 지나며 무심코 열린 방문을 들여다보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니아와 아리엘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뭐야, 둘 다 어디 가? 갑자기 웬 외투를...”
“어디 가긴. 아까 실비 옷 사러 가기로 했잖아. 이대로 계속 메이드복을 입고 지낼 수도 없으니까.”
“아 맞다. 그렇지...”
“...많이 아쉬워하는 눈친데 소년?”
“그럴 리가요.”
솔직히 조금 아쉽긴 하다.
엄청 잘 어울렸는데...
“흐음...”
니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가슴팍으로 끌어안아 의심의 눈길을 차단하고는 물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올 거야? 서너 시간 후? 아니면 밤?”
“글쎄... 일단은 가볍게 다녀오려고 하는데 한 번 쇼핑을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어쩌면 이참에 장까지 한꺼번에 봐올 수도 있고.”
“그래? 그럼 꽤 늦게 돌아오겠네...”
그러면 또 심심할 텐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설탕 있던가? 옥수수도 조금 필요한데.”
“설탕? 설탕은 저번에 쓰고 남은 게 조금 있긴 할 거야. 옥수수는 없고. 갑자기 그건 왜?”
“음... 별건 아닌데...”
그럼 이렇게 된 거 그냥...
“...나도 따라갈까?”
“뭐? 정말?!”
“그래, 어차피 집에 혼자 있어 봐야 할 것도 없으니까. 나도 이김에 장 좀 보게.”
“응응! 잘 생각했어 도란! 분명 재미있을 거야! 니아 님도 기뻐할 테고!”
“.....”
아래를 쳐다보았다.
이에 니아는 천천히 내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더니...
“우... 점점 날 다루는 게 능숙해지고 있어 소년.”
“...그래서 싫어요?”
“싫을 리가.”
니아가 포근하게 웃으며 다시 얼굴을 묻었다.
나는 아리엘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난처하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된 건지...
잠시 두 녀석과 헤어져 얼른 외투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오자 그곳엔 여성진 네 명이 모두 모여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들과 합류하며 말했다.
“미안, 기다렸어?”
“아뇨, 저희도 이제 막 모였어요. 그럼 바로 출발할까요?”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려면... 자, 잠깐...! 너 이리 와봐!”
“.....?”
나는 재빨리 라디의 손목을 붙잡고 잡아끌었다.
일행과 떨어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점까지 도달하자...
“아니... 쟤 저러고 보낼 셈이야?”
“쟤라니... 실비 말이에요?”
“그래.”
힐끗 일행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메이드복을 입은 실비를.
위에 로브를 덮어 가리긴 했지만 옷가게에 들어가면 전부 들통나고 말 터.
불안하게 그녀를 응시하자 라디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저번에 갔던 옷가게 기억하시죠? 거기로 갈 예정이거든요. 점원이랑 손님도 전부 여성일 테니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뭣하면 시착 후에 바로 상품으로 갈아입어도 되고요.”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누가 갈아입기 전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갈 거 아냐. 내가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거나...”
“으흠... 딱히요? 베라스틴에선 아직 드물긴 하지만 요즘 왕도에서는 노예에게도 정장이나 메이드복을 입히는 게 유행이라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슬쩍 실비를 곁눈질한 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애초에 왜 저 옷을 입힌 건데. 다른 옷도 많잖아.”
“그야... 잘 어울리지 않아요?”
“....”
그건 맞지.
봄베이 고양이처럼 새까만 귀와 꼬리, 오랜 길거리 생활로 거칠어지긴 했지만 눈처럼 흰 피부, 도도한 눈매와 그에 어우러져 쿨한 인상을 자아내는 생머리는 그야말로 완연히 흑과 백의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이보다 더 메이드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텐데...
아쉬운 마음으로 응시하고 있자니 라디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 기특하게도 먼저 다가와서 도울 일이 없냐고 묻더라고요. 편하게 지내도 된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나 봐요. 그래서 간단한 집안일을 시키다 보니 저도 분위기를 타버려서...”
“.....”
그래서 실비가 욕실 앞에 수건을 들고 서 있었구먼?
“...알았어, 그럼 오늘은 일단 저렇게 가자. 다들 기다리니까.”
나는 라디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행과 합류했다.
의아하게 쳐다봐오는 아리엘과 니아에게 손을 내저은 뒤, 정문을 나서서 오솔길로 접어들자 상쾌한 공기가 머리칼을 간질였다.
파릇파릇한 덤불 너머에서는 다람쥐 일가족이 견과류를 까먹었으며, 머리 위의 둥지에선 솜털 뭉치 소쩍새 새끼가 꼬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며칠 전, 안디라 님이 도시에 방문했을 때의 오싹한 광경과 비교하면 딴판인 모습.
하지만 변화는 이걸로 그치지 않았으니...
오솔길 밖으로 나오자 가도를 거닐던 행인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하자 한 행인으로부터 억눌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영웅...”
‘영웅...?’
무심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우와아!!!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이다!! 베라스틴의 영웅!!!”
“영주가 시민을 괴물로 만들려던 걸 멋지게 저지해냈다며!!”
“쓰러뜨린 괴물의 수가 수천이 넘는데...!”
“사실 저번에 소리소문없이 언데드 사건을 해결한 것도 저 청년이었다면서... 여러모로 대단하네...”
“듣기로는 무슨 거대한 소환수를 부린다는 말도 있대...!”
“진짜 잘생겼어요!!”
웅성거리는 군중. 반짝이는 선망의 시선. 하나둘씩 몰려드는 이목.
사방에서 연이은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노점에서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다 말고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새 영주성에서 있었던 일이 퍼진 모양.
더군다나 지금까진 니아의 연인이란 수식언이 붙거나 니아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더라면, 이젠 부르는 호칭마저 달라졌다.
과거에는 종종 머리색이나 니아에 대한 질투심으로 질시하는 사람도 섞여 있었지만 이젠 그런 부의 시선 또한 말끔히 사라졌고.
최근 들어 사람들의 주목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이런 상황에 당면하니...
“...감회가 새롭네요.”
“그러게... 이제야 제대로 도란이 인정받았다는 느낌이야.”
“응!!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소년이 언젠가 큰일을 해낼 거라고!!”
“.....”
다소 낯부끄러운 심정으로 가도에 발을 들였다. 주변에서 들러붙는 인파에 적당히 대응하며 나아가다 보니 걷는 것조차 쉽지 않다.
정말로 무슨 유명 배우가 된 것처럼 내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가도를 거닐다 보니, 결국 우리는 한참이 더 걸려서야 목표했던 의류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우리의 대우가 한층 각별해져 있었다.
“도, 도란 님하고 일행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 매장의 총지배인을 불러오겠습니다...!”
“총지배인은 왜...”
“나머지 분들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점원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라디 일행을 가게 안쪽으로 데려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니아가 붉은 매 길드 패를 보여주고 나서야 입장했는데 이젠 그런 절차도 필요 없나 보다.
수군거리는 종업원, 흥분한 기색의 귀부인 무리, 곳곳에서 몰려드는 눈길을 해치며 어리둥절하게 매장 내부의 별실로 안내받아 기다리고 있자니 점원이 홍차와 수제 케이크를 내왔다.
“도란 님이 언젠가 저희 매장에 다시 방문하시는 순간을 위해 준비한 디저트입니다.”
“아, 네...”
성의를 무시하기도 곤란한 바, 조심스레 한 입 떠서 먹어보니
‘자, 잠깐... 이건...’
품질이 심상치 않다.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시원하게 녹아드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값비싸고 신선한 우유가 잔뜩 함유되어 풍미가 몹시 진할 뿐만 아니라 위에는 초콜릿 시럽까지 뿌려져 있다.
지구에서 먹었던 초콜릿이랑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얼추 비슷한 제품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구름처럼 폭신폭신한 생지, 천장의 조명을 반사해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금박, 깊이 있는 쓴맛이 일품인 홍차를 음미하며 감탄하자 점원이 고개를 숙였다.
“...입에는 맞으십니까?”
“아, 네... 엄청 맛있네요. 이런 건 디저트 전문점에 가도 보기 어려울 텐데... 요 위에 달달하고 까만 건 이름이 뭔가요?”
“카코오 말씀이시군요. 열대성 기후인 타쿤 반도에서 특별히 공수해 온 콩을 곱게 갈아 설탕과 배합한 것입니다. 피로 회복과 약간의 각성 효과가 있어 최근 왕도의 귀족들 사이에서 큰 유행을 끌고 있는 디저트입니다.”
“카코오라... 신기하네요. 나중에 따로 사서 제 애인들하고도 나눠 먹어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카카오 비슷한 작물인 모양.
초콜릿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보는 것도 처음이다. 이전에 저택에서 아리엘이 얼음을 쓰는 걸 본 적이 있으니 어쩌면 집에서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그전에 란이의 능력을 잘만 이용하면...
때아닌 영감에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곱상한 민머리 남성이 별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내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베라스틴의 영웅!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님을 뵙습니다!! 저는 이곳 헤르모사 의류점의 지배인 홍 킹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여기나 저기나 영웅이라니...
심히 낯간지러운 칭호에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남자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아~! 정말 너무 영광입니다! 베라스틴을 구해주신 소문의 남성이 이렇게나 멋진 분이셨다니이~!”
“.....”
오싹!
순간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이 간드러진 억양과 목소리, 이 익숙한 느낌은 분명 크누트 길드에서나 볼 법한...
나는 다급하게 손을 빼내며 말했다.
“그, 그래서 절 이곳으로 부른 용건이 뭐죠? 만약 시답잖은 소리를 늘여놓을 거면...”
“그럴 리가요! 우선 베라스틴을 두 번이나 구원해주신 영웅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도란 님을 이곳에 모신 이유는...”
그가 자세를 낮추며 속삭였다.
“도란 님께 비즈니스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비즈니스?”
“네엣~! 며칠 전, 도란 님 일행이 저희 매장에 들른 이후로 매출이 껑충 뛰었습니다앗!! 도란 님 일행이 사가신 의류가 귀족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화제입니다! 특히나 니아 님에게 선물할 용도로 구매하셨던 장신구는 이제 없어서 못 팔 정도입니다!”
“아아 그거...”
안타깝게도 지금은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비즈니스 제안이라... 그렇다면 저희는 뭘 하면 되는 거죠?”
“아, 그렇다고 해도 도란 님에게 번거로운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아~! 그저 저희 매장의 옷을 입고 도시를 돌아다녀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외에 추가 조건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협찬이라도 해 주시겠다는 거예요?”
“넷! 바로 그겁니다!!”
남자가 눈을 빛내며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란 님 일행에게는 특별히 저희 매장의 옷을 인당 여덟 벌까지 공짜로 드리겠습니다아~! 그 밖에도 격월마다 세 벌씩 무료 제공은 물론, 신상품 최우선 구입 권리, 전 상품 반값 할인까지 해드립니다!!”
“자, 잠깐! 그거 괜찮은 거예요...? 얼핏 듣기로는 너무 파격적인데... 혹시 숨겨진 조항이 있다거나 다른 의도가 있는 건...”
“그럴 리가요! 그만큼 지금 베라스틴에서 도란 님의 입지가 특출하다는 뜻이지요! 무려 베라스틴을 두 번이나 위기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낸 영웅이잖습니까아~! 게다가...”
남자가 뜨거운 눈길로 내 위아래를 훑고는 입맛을 다셨다.
“모델이 아주... 좋으니 홍보 효과도 톡톡할 테지요! 여러모로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아~!”
“.....”
다음번부터 이 매장엔 얼씬도 말아야겠다.
나는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조건에 두 가지만 더 덧붙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두 가지...? 네! 말씀하시죠 도란 님!”
“우선 요기 케이크에 들어간 카코오 열매를 어디서 구했는지를 좀 알고 싶은데...”
“카코오 열매 말씀이신가요? 네! 바로 저희 매장의 종업원을 시켜 약도를 그려드리겠습니다! 이곳 북쪽 거리의 고급 수입품을 취급하는 매장에서 팔고 있습니다!”
“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ㅡ
“오늘 하루만, 잠시 이 매장을 빌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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