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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94화 (294/375)

〈 294화 〉 진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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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진실 #4

총지배인의 대처는 빨랐다.

순식간에 내객이 종적을 감추어 한적해진 의류점.

폐점한 뒤의 백화점처럼 싸늘한 공기만이 잔류한 매장을 거닐다 보니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는 라디 일행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이 내게 달려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도, 도란님...! 뭔가 이상해요...! 방금까지만 해도 가게 안이 엄청 붐볐는데 점원들이 손님에게 뭔가 귀띔하더니 갑자기 다 나가버려서...”

“아, 그거 내가 했어.”

“네...? 도란님이 어떻게...”

“방금 이곳 총지배인하고 얘기하고 왔거든. 그거 말고도 조금 더 있긴 한데...”

나는 슬쩍 실비를 곁눈질하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앞으로 우리가 매장을 떠날 때까지는 쭉 전세 냈으니까 느긋하게 둘러봐도 돼. 인당 여덟 벌씩 공짜로 협찬받기로 했으니까 돈 걱정도 하지 말고.”

“.....”

실비가 후드 안쪽 등색 눈동자로 말없이 날 올려다보았다.

예상외로 담담한 반응에 내심 동요하자 아리엘이 눈동자를 빛내며 반색했다.

“정말?! 그럼 마음대로 골라도 되는 거야!?”

“...그래, 여덟 벌을 넘겨도 반값에 넘겨준다고 하니까 부담 없이 골라. 며칠 전에 이미 한번 들르긴 했지만 그때 아쉽게도 못 산 옷이 있을 거 아냐. 니아 님도 이참에 여유분을 장만해 두시고요. 곧 던전에 돌아가면 쇼핑할 여유도 없을 거 아녜요.”

“응응! 사랑해 소년!! 자, 그럼 빨리 가자!”

니아가 날 세차게 끌어안더니 아리엘과 실비의 등을 떠밀며 매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뒷모습을 바라보자 라디가 내 손을 붙잡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웬일이에요. 제법 머리도 굴릴 줄 알고. 이번엔 좀 선방했는데요?”

“그런가... 근데 괜한 짓을 한 것 같기도...”

반응이 영 시원찮다.

실비는 그간 검은 머리 탓에 사람들로부터 온갖 고생을 해 왔으니 주변 시선을 꺼릴 거라 생각해 배려한 건데...

실비의 몸 위로 옷을 대보며 품평하는 아리엘, 밝게 웃으며 호응하는 니아와 무심하면서도 난처한 듯 꼬리를 까딱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 실비.

셋을 응시하며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린 건가 고민하고 있자니 라디가 내 손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실비도 분명 속으로는 고마워하고 있을 거예요. 단지 오랫동안 혼자서 지내오다 보니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색할 뿐이고요. 그 왜, 저도 처음엔 꽤 까탈스러웠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네, 언젠가 실비도 풍부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날이 올 거예요.”

“.....”

그랬으면 좋겠다.

앞으로 당분간 같이 살게 될 텐데 서로 웃으면서 지내는 편이 나으니까.

이런 자리가 낯선 건지 조금 어수선한 기색의 실비를 쳐다보고 있자니 라디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보다 도란님, 제 옷도 좀 같이 봐주시겠어요? 저번에는 기능성에 치중된 걸로만 고르느라 예쁜 옷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기왕 공짜라고 하니 좀 다양하게 사 보고 싶고요.”

“그래, 이번엔 외출복 말고 평상복도 좀 사자. 침실에서 입을 것도 좀 더 사고.”

“어휴 정말...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라디가 피식 웃으며 내 볼을 살짝 꼬집더니 매장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함께 손을 맞잡고 거닐다가도 흥미로운 옷을 발견하면 귀를 쫑긋거리며 멈춰서고, 원단을 꼼꼼히 비교해가며 행복한 고민을 하는 라디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불과 며칠 전 둘러봤는데도 질리지 않는 모양. 금전에 자유롭게 원하는 상품을 고를 수 있다니 그야 누구나 꿈꿔봤을 만한 상황이지만.

더군다나 우리가 왔다 간 뒤로 새 상품도 들여놓은 듯하고.

한데...

“소년!! 나도 옷 좀 봐줘! 어때 이거 괜찮지?!”

“네, 니아 님... 잠깐, 이거 속옷이잖아요.”

“응, 안 돼? 저번에 소년이 속옷은 안 골라줬잖아.”

“....”

그야 그렇죠.

“...알았어요. 대신 착용한 모습은 안 되고 상품을 가져와 주시면 뭐가 더 나은지 말씀해 드릴게요.”

“왜, 나중에 소년이 벗길 건데 직접 보고 고르는 게 낫지 않아?”

“안 돼요. 그리고 제가 왜 벗겨요.”

“피... 그럼 그건 나중을 위해 아껴두는 걸로!”

“아니, 나중에도 안 한다니까요.”

“그, 그럼 지금 당장...? 설마 사람들을 물린 이유가...!!”

“그러니까 왜 제가 니아 님 옷을 벗기는 게 기본 전재가 되어있는 건데요!! 아니, 사실 당신 다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니아와 아옹거리고 있자니 이번엔 아리엘과 실비가 다가왔다.

아리엘이 밝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잖아. 실비 옷을 좀 보고 있는데 도란이 좀 도와줄래? 실비는 이런 곳에서 옷을 사 본 경험이 없어서 어려워하는 모양이더라고.”

“나? 나도 남자라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그러지 말고, 잠깐이면 되니까.”

“....”

잠자코 그녀를 뒤따랐다.

아리엘은 외투가 모여있는 곳 앞에서 멈춰서더니 미리 꺼내놓은 나들이옷을 들치며 말했다.

“일단 우리끼리 대충 골라놓기는 했는데... 도란은 이 셋 중에 어떤 게 나아? 이따가 내의하고 실내복도 사야 하니까 여기선 두 벌 정도만 고르려고 하는데.”

“응? 그냥 고민되는 게 있으면 전부 사면 되지 않아? 어차피 다 합쳐도 얼마 안 하잖아. 지배인이 솔선해서 공짜로 준다고도 하고.”

“사실은 그게...”

아리엘이 실비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괜찮다고 했는데 한사코 거부하더라고.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다고. 이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다나 봐.”

“이 정도면 딱히 비싼 것도 아닌데...”

뭐 본인이 괜찮다는데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다.

괜히 억지로 권유해서 부담을 주기도 곤란한 바, 고개를 끄덕이고 아리엘 곁에 서자 다양한 나들이옷이 보였다.

수인용 꼬리 구멍이 나 있는 것도 있고, 거친 중세의 노동 환경에 맞추어 원단을 여러 겹으로 겹쳐 보강한 것도 있으며,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튜닉과 가르드코드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의류가 모여있었다.

굳이 이 중에서 고른다면...

“...난 여기 있는 것보다 저기 있는 모험가용 코너에서 고르는 게 실비한테 더 잘 맞을 것 같은데. 활동하기 편하게 바지에다가 폭은 좁은 걸로. 아, 그리고 후드도 달려 있으면 좋겠고.”

더군다나 며칠 후면 실비도 우리를 따라 던전에 방문해야 할 테니 일상복보단 좀 더 튼튼한 옷가지로 사 두는 편이 더욱 유용할 거다.

아리엘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사실 나도 긴가민가했거든. 뭔가 조금 아쉬운데... 하고. 오히려 실비한테는 그쪽이 훨씬 어울리겠어.”

“그래, 그리고 기왕이면...”

나는 성큼성큼 발길을 옮겨 모험가 전용 의류가 진열된 매장 구석으로 향했다.

한눈에 보아도 방금까지 둘러보던 옷과 비교하면 훨씬 실용적인, 전문성이 묻어나오는 디자인의 의류들.

마물이 노리기 쉬운 팔뚝이나 뒷목에 단단한 철판이 덧대어져 있는 옷도 있으며, 단검이나 버클러를 쉬이 휴대할 수 있도록 고리가 튀어나와 있거나 아예 칼날이 부착된 실험적인 상품도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이게 잘 어울리겠네.”

홀로 매장의 한쪽 벽을 차지한 칠흑색 의복을 올려다보았다.

게임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암살자 풍 코트.

세련된 가죽 재질 겉감에서는 반지르르한 광택이 흘렀고, 기다란 래글런 소매와 등판에는 수려한 금자수가 수놓아져 있다. 로브를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도록 어깨의 에폴렛에는 단추가 돌출되어 있고, 붉은 색조를 띤 안감 덕에 몹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미관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기능적인 부분까지 두루 갖춘 모습.

평범한 사람은 소화하기 어려운 스타일이지만, 영주성 지하에서 목도했던 전율적인 실비의 모습을 떠올리면 분명 잘 어울릴 거다.

아리엘이 내가 고른 옷을 응시하더니 눈동자를 빛냈다.

“응! 이거 진짜 잘 어울리겠다!! 시크한 실비의 분위기와도 딱이야! 어때, 한번 입어볼래?”

“.....”

실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멍하니 옷을 올려다봤다.

쇼윈도 너머로 염원하던 드레스를 맞닥뜨린 소녀 같은 반응에 나와 아리엘은 피식 실소하고는 견본 제품을 녀석의 손에 쥐여서 탈의실로 들여보냈다.

잠시 후, 실비가 쭈뼛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걸어나오는 나는...

“.....”

‘...미쳤네.’

자신이 옷의 주인이라 주장하는 듯 완벽하게 들어맞는 핏, 반면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호박색 눈동자, 살짝 부끄러운 듯 꼰 허리.

까마귀처럼 새까맣고, 자칫 남성적일 수 있는 디자인의 의복이 오히려 실비의 도도하면서도 귀여운 매력을 이끌어낸다.

메이드복 때부터 알아차리긴 했지만 모델이 좋으니 인형처럼 여러 옷을 입히고 노는 재미가 있다.

홀린 듯 실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탄성을 흘리며 말했다.

“우와...! 진짜 예쁘다!! 꼭 엄청 뛰어난 자객 같아! 정말 잘 어울려 실비야!!”

“...그, 그런가요..”

“그래! 우리 이걸로 사자! 어디 보자 가격이... 4골드 38실링...?”

“사, 사 골드...?!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응...? 괜찮아 도란도 완전히 마음에 든 모양이고.”

“....”

시선에 내게 쏠리자 얼떨결에 대답했다.

“으, 으응... 그래, 진짜 장난 아니네... 가격은 걱정하지 마. 어차피 여기 지배인이 내주는 거니까.”

나는 어쩐지 마주 보고 있기가 낯뜨거워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전시된 옷 아래 비치된 팻말을 읽자 ‘특수 강화 소재’나 ‘로열 흑우 가죽’, ‘방검 효과’ 따위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 광택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특별하게 개량된 의복인 모양.

...이런 건 나도 비싸서 입을 엄두조차 못 내는데.

이 매장이 여성 전용 매장이라는 데 한탄하며 시선을 돌리려던 차...

‘잠깐 이건 뭐지...?’

자세히 살펴보니 팻말 옆, 전시된 옷 아래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기다란 끈이 걸려있었다.

슬쩍 떼내어 잡아당겨 보니 신축성도 좋고 고무줄처럼 탄력적인 게 무슨 특별한 용도가 있는 것 같은데...

“어디 보자... 세트... 세.. 세트 속옷?!!”

이게 저 코트랑 한 세트라고?!

아연실색하며 옆을 돌아보자 실비는 살짝 빨개진 얼굴로 날 응시하더니­

“....변태.”

꼬리를 들어 살짝 가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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