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 진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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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진실 #5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무사히 쇼핑을 마치고 나오자 두 팔이 뻐근했다.
옷뿐만 아니라 실비가 신을 부츠, 허리띠, 양말과 로브 등 다양한 상품이 담긴 보자기를 들고 대로를 걷자 옆에서 우물쭈물하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의아하게 돌아보니 실비가 짐 더미로 손을 뻗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아, 내가 들게. 이거 꽤 무거워.”
“.....”
“그렇게 눈치 안 봐도 돼.”
“으...”
실비는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색이었으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며 발길을 옮기자 니아가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소년~! 그럼 내가 들어줄까? 무겁잖아!”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그보다 니야 님이야말로 괜찮은 거예요? 장신구 다시 사 드린다고 했는데도 거절하셨잖아요. 비록 저번에 선물로 드렸던 조개껍데기는 다 팔리고 없었지만...”
“아, 그거...?”
니아는 다소곳하게 웃으며 날 응시하더니...
“난 괜찮아 도란. 비록 자개는 부서졌지만 도란이 날 위해 선물해줬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니까. 꼭 물질적인 게 없어도 따스한 유대를 느낄 수 있는걸?”
“...그래요?”
“응! 그리고 나 아직 그 파편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
“왜 그걸 굳이...”
“그야 도란이 나한테 선물해준 거잖아.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인걸. 천금, 아니 만금을 준다 해도 안 팔 거야!”
“....”
마음씨가 갸륵해 살짝 뒷머리를 쓸어주자 니아가 해사하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더욱 달라붙으며 속삭였다.
“조금 다시 봤어?”
“...네, 솔직히 니아 님이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래? 그렇다면...”
니아가 어여쁘게 눈꼬리를 휘더니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주위에 북적거리는 행인을 둘러보고는 살짝 자세를 낮춰 속삭였다.
“...뽀뽀는 나중에 둘만 있을 때 해드릴게요. 지금은 좀...”
도리도리.
“네...? 하지만 당장은 보는 눈이 너무 많잖아요.”
도리도리!
“그것도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의문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니아가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자
“내가 입으로... 해줄까?”
“뭐, 뭣?!!”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왜~ 똑똑히 들었잖아 소년.”
“아, 아니 방금 그거 무슨 뜻인지 알고는 말한 거예요?!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듣고 아무렇게나 막 말하면...!”
“에이... 설마 뜻도 모르고 말했겠어? 소년, 조만간 조심해. 내가 밤에 확 물어갈지도 모르니까. 크앙!!”
“...당신 저번 이후 너무 노골적으로 변했어.”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고는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큰 소리를 낸 탓인지, 우리의 정체를 깨닫고 주변에서 몰려드는 이목을 제치며 나아가다 보니 아리엘이 후드를 고쳐쓰며 물었다.
“도란, 근데 이제 우리 어디로 갈 거야? 아까 나올 때 용건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가게 점원한테 약도도 받았고...”
“아, 그거? 뭐, 그쪽도 볼일이 있기는 한데 지금은 일단...”
나는 쭈뼛거리며 걷는 실비를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계속 발길을 옮겨 한 매장 앞에서 멈춰서자 여성진이 의아한 눈길로 간판을 응시했다.
“고급 잡화점... 모험가 용품부터 생필품까지 잡다한 물품을 취급하는 가게네요.”
“갑자기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
“.....”
나는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이며 말했다.
“며칠 후면 던전에 가야 하잖아.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미리 구매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실비 전용으로 칫솔이랑 머리빗, 다용도 나이프 같은 것도 사 두려고.”
방금 열거한 항목 외에도 여분 속옷이나 생리용품도 필요할 테지만, 그런 건 좀전의 의류점에서 라디와 아리엘이 챙겼을 터다.
웃으며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한 여성 점원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저희 베라스틴 만물 잡화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처음 오신 손님은 신분증이나 그에 준하는 물건을... 아,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안녕하세요.”
“여, 영광입니다.. 도란 님 같은 거물이 저희 매장엔 무슨 일로...”
“모험가용 캠핑 장비를 보고 있어요. 비용은 좀 나가더라도 품질이 보장되는 제품이었으면 좋겠네요. 또 개인 생필품도 두루 보고 있고요.”
“모험가용 캠핑 장비라면... 곧 던전 탐사라도 앞두고 계신가 보군요. 그리고 생필품이라... 혹시 노예가 쓸 물건 말인가요? 상인 사이에서 도는 풍문으로는 도란 님이 새 노예를 들였다는 말이 있던데...”
“....”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하긴, 항상 붙어 다니던 멤버에서 한 명이 늘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주성에서도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인원이 꽤 될 테니까.
“노예...는 아니긴 한데 나머지는 얼추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혹시 추천하는 상품이 있을까요? 묶음 세트라던가...”
“네, 이쪽으로 오시면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매장 안쪽으로 손짓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보급형 갑주나 유리 공예품 등 일관성 없는 상품이 즐비한 진열대를 지나 조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자 점원이 한 묶음 상품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상품이 노예를 구입하고 가장 먼저 저희 매장에 들르시는 손님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제품입니다! 칫솔과 내의 등 기본적인 구성품이 다섯 개나 들어있으며...”
“...이것보다 조금 더 좋은 제품은 없어요? 품질이 너무 조악한데...”
사실상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다가 놨을 뿐인 칫솔, 나무껍질처럼 거칠거칠한 삼베 속옷 등.
누가 보아도 빈곤층이나 노예를 대상으로 한 물품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생색을 내는 데 의미를 둔 비주얼이다. 애초에 속옷은 이미 산 게 있고.
심드렁한 기색을 내비치자 이번엔 점원이 다른 상품을 권했다.
“그, 그렇다면 이 제품은 어떠십니까? 이건 모험가님들이 주로 찾는 세트인데, 아까보다 구성품이 늘어나 총 일곱 묶음 상품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히 이 돼지 지방으로 만든 비누는 저렴한 가격에 때도 잘 빠져서 최근 서민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
“그냥 제일 좋은 걸로 보여주세요. 비용은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품질로요. 가능하면 디자인도 예뻤으면 하는데...”
“저...”
“....?”
점원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아래쪽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하게 시선을 내리자...
“...저는 신경 써주시지 않아 주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분에 넘칠 정도로 받아서...”
“무슨 소리야. 이건 전부 생활 필수품인데. 정말 필요 없겠어?”
“....”
“이런 걸로 눈치 보지 마. 어차피 이제 한 식구나 다름없는데 ”
“식구... 말입니까...?”
“그래, 같은 지붕 아래서 같이 먹고 자고 하면 그게 가족이지 뭐.”
나는 시원스레 웃으며 고했다.
물론, 내가 이렇게까지 실비에게 잘해주는 것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전부 녀석 덕이기도 하니까.
아직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실비는 지금까지 종종 마주쳤던 그림자 여왕의 환생이거나 모종의 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을 터.
그녀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고, 몇 번이나 곤궁에서 구해주고, 위기를 경고해주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보답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당장 라디가 절벽에 떨어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전부 그녀 때문이니.
맑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쳐다보자 실비는 멍하니 내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잠자코 분위기를 지켜보던 아리엘이 다가와 상냥하게 녀석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래 실비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맞아! 꼬맹이는 이럴 때 그냥 감사하다고만 하면 되는 거야!”
“....”
실비가 고개를 떨구었다.
푹 눌러쓴 후드 탓에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고마... 워요..”
“.....”
조금은 와닿는 게 있었던 걸까?
나는 어렴풋한 목소리로 용기를 낸 녀석을 따스하게 바라보고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막 매장을 나서자 라디가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다.
“자, 잠깐...! 도란님 어디 가세요?! 갑자기 말도 없이...!”
“아, 난 요 근처에 따로 살 게 있어서 잠깐 다녀오려고. 너희는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어.”
“그, 그래도... 같이 가요!”
“괜찮아, 요 바로 앞이거든. 오늘 저녁에 놀래켜줄 테니까 기대해.”
“....?”
의아해하는 라디에게 손을 흔들고 가게를 나왔다.
구름에 가렸던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비쳐오자 행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고, 청명한 하늘로 높게 뻗어나간 깃발이 휘날렸다.
품에서 약도를 꺼내 대로를 거닐자 후드 아래로 내 얼굴을 보고는 일행의 팔뚝을 잡아당기며 꺅꺅거리는 십 대 소녀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나는 난처하게 웃으며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웠지만 어째선지 되려 흥분을 돋우는 기색.
점점 내 뒤로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행렬이 만들어졌기에 나는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약도에 적힌 지점까지 도달하자 한 식료품 판매장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저희 매장에서는 수입산 과일과 향신료를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혹시 따로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십니까?!”
“네, 카코오 열매랑 설탕, 옥수수를 찾고 있는데 혹시 이곳에 있나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카코오 열매를 아시다니 요리에 참 조예가 깊으신 분인가 보군요! 다만 옥수수는 이곳에 없고, 옆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나는 앞치마를 두른 점원에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을 이용해 냉방을 하는지 시원한 바람이 솔솔 풍겨오는 점포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 상자에 정갈하게 담긴 과일이 눈에 들어온다.
적포도, 샤인머스캣, 키위, 복숭아 등 진열대를 수놓은 알록달록한 과일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것도 좀 사갈까...’
실비야 가로수 나무 열매를 제외하곤 과일은 꿈도 못 꿔봤을 테고, 라디도 단 음식을 좋아하니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보따리에 가득 담긴 생소한 과일을 보며 기뻐할 녀석들을 떠올리니 입가에 미소가 그칠 새가 없다.
“어디 보자... 망고도 있고, 카코오는 내가 알던 카카오랑 똑같이 생겼고... 잠깐, 라임하고 레몬도 있잖아? 이거만 있으면 레모네이드도 만들 수 있겠네.”
그리운 과일들의 모습에 반색하며 막 팔을 뻗어 짚으려는 순간
“주인장, 여기 있는 라임하고 레몬 전부 다 사지.”
“핫하!! 신 과일이란 과일은 몽땅 다 내놓으라고!!!”
“이곳은 이제 우리가 접수한다!!”
“....?”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에 소란이 들려온 매장 입구로 고개를 돌리자...
“어이, 잘 있었나 반푼이 악마?”
백발의 근육질 노인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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