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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296화 (296/375)

〈 296화 〉 진실 #6

* * *

[296] 진실 #6

“다, 당신은...!”

영주성 지하 수감동에서 내가 풀어주었던 인물이 아니던가.

나는 즉각 거리를 벌리며 손아귀에 단도를 소환했다. 저번엔 이해관계가 맞아 협력했다지만 놈은 거액의 현상금까지 내걸렸던 흉악범.

더군다나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감염체들이다.

한데...

‘왜 촉수가 보이지 않지...?’

순간 놈도 실비처럼 치유된 건가 했지만, 곧바로 생각을 거두었다.

노인과 그의 부하들의 옷차림이 하나같이 펑퍼짐한 로브 차림이었기에.

‘촉수를 감추고 있다...!’

단도에 기운을 두르고, 소환수를 불러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으니.”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으면, 여기 모두가 휘말려도 상관없다는 말이더냐.”

“....”

주위를 둘러보자 험상궂은 사내들을 보고 얼어붙은 손님, 상품을 정리하다 말고 놀란 점원, 후드가 젖혀진 날 알아보고 호들갑을 떨며 수런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대로 놈과 적대하면 이들이 말려들고 만다.

단도를 도로 어둠으로 되돌리자 노인이 웃으며 읊조렸다.

“잘 생각했다. 그래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꼬맹이로군. 그대로 이빨을 드러냈으면 참으로 유감이었을 텐데 말이야.”

“...이곳에서 날 만난 걸 다행이라 생각해. 만약 성밖이었다면...”

“그대가 죽었겠지. 애당초 왜 날 적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서로 상부상조하는 꽤 친근한 사이라 생각하는데 말이야.”

“....”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그래서... 왜 네놈이 여기 있는 거지. 지금쯤 도시를 떠났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이곳을 떠나나. 술과 먹거리는 풍족하고, 숙녀들도 아리따우신데.”

“.....”

“...농담이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게나. 오늘 성문이 닫히기 전에 떠날 테니.”

“뭐, 오늘...?”

그가 이대로 떠나면 여러 의문점이 그대로 미궁에 빠지고 만다.

입술을 깨물며 갈등하자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흐흐.. 방금까지 못 죽여서 안달했으면서 이제는 또 아쉬워하는군. 참 줏대 없는 청년일세.”

“...시끄러. 네놈한테 물을 게 있다.”

“촉수 말인가.”

“그래, 어디 간 거지? 그 로브 안에 숨길만 한 공간은...”

“있다. 감염된 지 며칠 되니 이걸 다루는 데도 능숙해지더군. 대신 더 이상 여자는 안지 못할 테지만 말이야! 크하하하핫!!”

노인이 호탕하게 웃어젖히자 주위로 웃음이 전염되었다. 방파제에 이는 하얀 파도처럼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노인. 어느덧 영문도 알지 못하고 따라 웃기 시작하는 사람들...

한데 주변 시선이 흐트러진 틈을 타 그가 슬리슬쩍 로브 자락을 젖히자­

‘보라색 피부...’

그의 몸 곳곳에 방금 생겨난 화상 자국처럼 선명한 흔적이 보였다.

뱀이 파고든 모래알처럼 표면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걸로 보아 유사시에는 저곳에서 촉수가 돋아나는 걸까.

그가 슬쩍 옷자락을 되돌리자 나는 다시 경계심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문이다. 네놈은 대체 어떤 축복을 받았기에 촉수에 감염되고도 멀쩡한 거지?”

“흐음...”

내 물음에 노인은 턱을 짚고 고민하더니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호기심도 많은 청년이로군. 그게 그리도 알고 싶나.”

“...그래.”

무려 2위 신 안디라 님의 권능을 받은 실비조차 어쩌지 못했던 힘이다. 그런데도 끄떡없다는 건, 정신 공격에 대항하는 힘을 갖추었다고 판단하는 게 옳을 터.

더군다나 이들 전원이 같은 신에게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닐 텐데 멀쩡하다는건...

의문스럽게 노려보자 그는 입꼬리를 쭉 찢으머­

“옜다.”

­티잉!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내 손안으로 날아온 물체를 낚아채 확인해보자...

“이건... 금화...?”

아니, 다르다.

이곳 비스마르크 왕국에서 통용되는 금화보다 한 사이즈 크고 두꺼운 외형. 중앙엔 소름 끼치는 해골이 새겨져 있고, 당장에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이 생생한 독사가 주위를 휘감고 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주조된 물건.

동전 둘레에는 위변조를 방지하고 과거에 성행했던 테두리 깎기를 막기 위해 홈이 파여 있으며, 번쩍거리긴 하지만 제법 손때를 탄 걸로 보아 기념주화 따위가 아닌 명백히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이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금화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니 주변에서 한 시민이 소리쳤다.

“저, 저건...!”

“왜 그래 로빈, 저게 뭔데.”

“저거 그거잖아! 해적 금화!!”

“해적 금화?!”

“해적 금화라면...!”

“해적들이나 쓰는 주화가 왜 여기에...?”

­술렁술렁..

“.....”

‘해적 주화?’

멍하니 노인을 응시하자 그는 시원스레 웃으며­

“그건 크림스나가의 동전이란 게다. 네게는 진 빚이 있으니, 만약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토투르가의 실베스튼이란 자를 찾아가라. 그자가 네 한 가지 청을 들어줄 테니. 그 금화는 노잣돈이다.”

“뭐...? 토, 토투르가? 거기가 어딘데? 실베스튼이란 작자는 또 누구고.”

“잡담은 여기까지다. 갈 길이 머니. 가자!”

“흐핫핫핫!! 출항이다!! 바다여 내가 간다!!!”

“크흐흐 이게 얼마 만이냐! 푸른 만이 날 기다리고 있다!!”

““보물!! 약탈!! 모험!!””

노인이 쿨하게 금화로 물건값을 계산하고는 발길을 돌리자 부하들이 거칠게 환호했다. 뱃머리에 작렬하는 태양처럼 뜨거운 함성.

노인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전, 나는 다급하게 달려가 그를 멈춰세웠다.

“잠깐! 아직 네게 볼일이 있다!!”

“뭐지? 대화는 끝났을 텐데.”

“...세 번째 의문이다.”

“.....”

노인은 어깨너머로 날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내뱉었다.

“레몬 다 사 가지 말고 내 것도 좀 남겨줄 수 있나?”

“.....”

*

식료품 판매장에서 과일을 구매한 후 만족스럽게 잡화점으로 돌아가자 라디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이 날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볼일은 잘 마치고 오셨어요? 음... 짐이 늘어났네요...?”

“그래, 이건 이따가 보여줄게. 필요한 건 다 샀어?”

“네, 실비가 쓸 배낭이랑, 반짇고리, 다용도 로프... 그 외에도 자잘한 것들은 다 구매했어요. 저도 이참에 몇 개 보충해뒀고요.”

“보충? 뭐 뭐 샀는데?”

“철실이랑 독병이요! 얼마 뒤면 다시 유적에 들릴 예정이라면서요. 그럼 해일이랑 메라도 볼 수 있을 테니 이김에 잔뜩 독을 추출해둬야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본전을 뽑아 오려고요!”

“참 너답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라디의 머리를 쓸어주자 매장 안쪽에서 금빛 섬광이 달려들었다.

­와락!!!

“소년!! 어디 갔다 왔어?! 기다렸잖아!!”

“아야야... 그냥 요 근처에 살 게 있어서 다녀왔어요.”

“그래? ...근데 이젠 세게 끌어안아도 별로 안 아파하네.. 그새 강해진 거야?”

“글쎄요... 몸이 단련된 건지 그냥 적응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 저희 계산할게요.”

점원이 다가오자 나는 로브 안쪽을 더듬어 동전 지갑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점원은 손바닥을 들어 공손하게 내 손을 도로 밀어넣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결제는 필요 없습니다 도란 님.”

“네, 결제가 필요 없다니 그 말은...”

“넷!! 저희 사장님이 도란 님 같은 훌륭한 모험가분께는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금액이 생각보다 얼마 안 나온 까닭도 있고... 사장님이 영주를 엄청 싫어했거든요. 시민들 혈세나 뜯어먹는 놈이라면서.”

“아...”

고개를 돌려 점원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응시하자 한 땅딸보 남성이 엄지를 척 치켜세우고 있었다.

공짜로 제공해주겠다면 우리야 좋지만...

‘...살다 보니까 이런 일도 다 일어나네.’

머리 때문에 마을이나 가게에서 출입이 금지당한 적은 있어도 물건을 공짜로 받아본 적은 처음 아니던가? 그것도 하루에 두 번이나.

이것도 나름 성장의 반증인 걸까.

나는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어쩐지 지금까지의 고생이 조금 보답받은 기분.

한데 막 짐을 들고 매장을 빠져나오자 그곳엔 좀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인파로 야단법석이 벌어져 있었다.

“나, 나왔다!! 도란 님! 취재 대행 길드에서 왔습니다!!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영주가 시민들을 납치해다가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혹시 자세한 경위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저리 비켜! 난 어제부터 하루종일 찾아다녔다고...! 도란 님! 실은 저번 언데드 사건을 해결한 것도 도란 님이라는데 사실입니까?! 베라스틴 지하에 거대한 비밀 공간이 있다면서요! 이교도가 숨어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니아 님, 아리엘 님, 라디 님도 이번 사건에 혁혁히 기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한 말씀 해 주시죠!!”

“그새를 못 참고 하렘 구성원을 늘렸다는데 사실입니까?! 니아 님만으로는 모자랐나요!?”

“저도 끼워주세요!”

“저놈은 뭐야! 당장 끌어내!!”

바글거리는 기자. 소란을 보고 호기심에 점점 더 몰려드는 군중. 급급하게 휴대용 캔버스에 우리의 얼굴을 묘사하는 화가들.

‘어째 안 보이나 했다...’

아무래도 이곳 북쪽 거리에서 장을 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 최근 들어 니아의 방문 건으로 폭주했던 관심도 조금 시들해졌나 싶더니, 되레 그때보다도 주목도가 더 올라간 느낌이다.

나는 살짝 앞서나가 몸으로 실비를 가려주며 입을 열었다.

“...사건의 전말이라면 하킴 백부장한테 들었을 텐데. 걔가 말 안 해줬어?”

“그렇긴 하지만... 그분은 영주성 정리를 해야 한다며 칩거에 들어가셨습니다! 게다가 이 도시에서 이교도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아는 건 도란 님이 유일하다고 하시더군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도란 님께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

하킴 그 자식이...

“...그러면 나중에 따로 기자회견이라도 해 줄 테니 그때 와. 지금 데이트 중이라 바쁜 거 안 보여? 그렇다고 저번처럼 집 앞까지 찾아오면 이번에야말로 침입죄로 고발해버릴 테니 그리 알고.”

“하지만... 안건을 처리할 영주가 더 이상 없는데요?”

“그건... 아 그러네... 젠장.”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고는 대답했다.

“어쨌든 나중에 제대로 공표해줄 테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아, 그리고 내가 그거 말했던가? 이교도 때려잡으러 지하로 들어갈 때 카렌도 같이 있었어.”

베라스틴 옛 우물가를 통해 지하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망을 보고 같이 땅을 파줬으니.

내 말을 들은 기자 무리는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렌? 카렌이 누군데...?”

“아, 그 왜 있잖아! 아카이아 길드 접수원. 그 사람 아냐?”

“아카이아 길드 터줏대감 카렌이다!! 도란 님의 담당 접수원이야!!”

“특종이다 특종!! 크하하핫! 바로 출동한다!! 가자!!”

“서둘러!!!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다!!”

““와아아아아아!!!””

북새통을 이뤘던 기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깜짝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메뚜기 떼가 휩쓸고 난 뒤의 밀밭처럼 한산해진 매장 앞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 한다.

“음... 이럴 때 보면 나도 꽤 똑똑... 아야얏!!”

“...도란, 카렌한테 일을 떠넘기면 어쩌자는 거야. 곤란해하잖아.”

“그, 그래도 걘 내 담당이잖아...! 이 정도 노고를 나누는 것쯤이야... 아얏! 아파! 알았어 미안해!!”

“.....”

아리엘이 천천히 내 귀를 놓아주었다.

나는 얼얼한 귓불을 매만지며 궁시렁거렸다.

“...왤케 손이 매워. 아파 죽는 줄 알았네.”

“엄살은... 방금은 도란이 나빴어.”

“그건 그렇지만...”

누가 절친 아니랄까 봐...

뭐, 나중에 선물이라도 사 갈까.

나는 가게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고는 서둘러 대로로 나왔다. 괜히 또 사람이 몰리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할 터.

한데 부지런히 가도를 걷고 있자니 등 뒤에서 실비와 아리엘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에요?”

“응...? 아... 도란이 유명하냐고?”

­끄덕.

“음... 아무래도 그렇지? 여기 있는 이 금발 언니가 엄청 인기가 많은 사람인데, 이 언니의 남자친구인데다가...”

“남자친구 아니야.”

아직은...

“조용히 해 도란. ...그리고 이번 영주성 사건 외에도 며칠 전에 언데드를 소탕했던 게 뒤늦게 소문이 퍼졌거든.”

“언데드요...?”

“그래, 혹시 실비도 들어봤어?”

“네... 언데드가 출몰한다고 사람들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혀서... 돌킨 씨도 사로잡혀 있었다고...”

“맞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교도가 뒤에서 암약하고 있었는데....”

“그랬었죠... 게다가 그 외에도....”

“.....”

실비가 묘한 눈길로 날 올려다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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