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진실 #7
* * *
[297] 진실 #7
집에 도착하자마자 연못가에서 놀던 란이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됴란!!
“그래그래, 잘 있었어? 오래 안 걸렸지?”
됴란! 됴란됴란...!
“응, 조금 이따가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기다려. 혹시 그동안 별일은 없었니? 몸이 자랐다거나, 성장통이 느껴진다거나...”
됴란?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들어가자.”
나는 웃으며 란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직 중급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조금 남았나 보다.
란이를 등에 태운 채 정원을 지나 현관에 도달하자 안락한 소파와 푹신한 카펫 등 익숙한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라디가 짐을 내려놓더니 소파 위에 축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으아... 역시 집이 최고네요... 지쳤어요...”
“그러게... 기자들 때문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야... 도란이 여태 이런 심정이었구나? ...니아 님은 안 지치셨어요?”
“응! 나야 평소랑 똑같은걸? 근데 소년은 이제부터 뭐 할 거야?”
“저요? 저는 뭐...”
노곤노곤해진 라디의 꼬리를 주물럭거리던 도중, 니아가 슬며시 내 반대쪽 팔로 달라붙었다.
나는 은근슬쩍 내 손아귀에 가슴을 들이미는 니아를 떼어놓으며 답했다.
“전 부엌에서 따로 할 게 좀 있어서 그거 좀 하다 올게요. 나머지 분들은 방에 가서 짐이라도 풀어놓고 계세요.”
“음... 부엌에서?”
“네, 그리고 도와줄 사람이 한 명 필요한데...”
나는 슬쩍 여성진을 둘러보고는 한 사람을 지목했다.
“...실비. 혹시 괜찮다면 나 좀 도와줄 수 있겠어?”
“....저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 다 가봐. 당분간 부엌 근처엔 오지 말고.”
““......””
돌연 말소리가 뚝 멎었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싶은 기색의 라디와 아리엘, 망연자실한 니아, 어쩐지 올 게 왔다는 표정의 실비가 보였다.
실비가 쭈뼛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자 니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안 돼...!”
“네? 뭐가 안 된다는...”
“나도 아직 소년이랑 못 해봤단 말야! 순서 지켜!! 이, 이렇게 된 거 지금 확 덮... 뭐, 뭐야 이거 놔!”
“.....”
아리엘과 라디가 니아의 양팔을 붙들더니 조용히 그녀를 2층 계단 쪽으로 연행해갔다.
아리엘이 복잡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며 말했다.
“도란, 오래전에 실비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나중에 저희한테도 제대로 설명해주세요.”
“자, 잠깐 난 아직 할 말 남았...! 소년!!”
됴란?
니아가 절규하며 끌려가고 나자 거실에 적막이 내리깔렸다.
나는 의아하게 그녀들이 사라진 층계 쪽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짐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저택 내부에서도 동떨어진 부엌에 접어들자 다소 목가적인 광경이 보였다.
가지런히 정렬된 무쇠 프라이팬과 냄비 옆에는 가스레인지 대신 화덕이 빼꼼 튀어나와 있었고, 널찍한 공간 구석에는 쉬이 음식을 데울 수 있도록 마련된 화로와 오븐, 메인으로 조리할 때 쓰는 아궁이 따위가 완비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도 불 마석이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지구의 현대식 주방과 비슷하게 꾸미는 게 가능할 테지만, 불 마석은 범인도 대량 살상을 가능케 하는 폭발물로 오용될 수 있어 민간인은 사용이 불가능하다.
‘아니... 그래도 잘만 샤바샤바하면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당장 니아가 머물던 호텔의 승강 장치도 불 마석을 썼다고 하지 않았는가? 애초에 아리엘 쯤 되는 귀족이라면 법 위에 선 존재고.
그녀가 굳이 불 마석을 주방에 비치하지 않은 건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서 그럴 터, 아리엘이 독특할 뿐 이 세계의 귀족은 부엌에 출입하는 일 없이 하녀를 부리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그나마 연기가 쉬이 배출될 수 있도록 굴뚝 아래 비치된 바람 마석을 작동하고 이것저것 건드리며 요리할 준비를 하고 있자니 절로 콧노래가 새어나왔다.
한데...
스륵.
‘음...?’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소음에 뒤를 돌아보자 내가 목격한 건ㅡ
“왜, 왜 벗고 있어?!!”
아슬아슬하게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실비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렸다. 어째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싶었는데 날 사회적으로 암매장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게, 게다가 바닥에 저건 아까 그 끈 아냐?!’
설마 진짜 입고 있었을 줄은...!
실비가 계속 옷고름을 풀어나가자 나는 재차 소리쳤다.
“왜 벗어?!”
“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물리시고 굳이 절 이곳으로 혼자 데려온 이유는...”
“아, 아냐...! 난 그냥 그런 게 아니라 같이 요리를 하고 싶어서...! 제길... 모, 못 믿겠어?”
“노예 거래소에서 그러더군요. 남자가 여성 노예를 사는 목적은 몸이 목적이라고. 육욕을 해소하기 위해...”
“난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전에 그런 짓을 했다간 애인들한테 맞아 죽을 걸.”
“....”
“정말이야. 그보다 이것 좀 도와줄래?”
강건하게 부정했지만 실비가 여전히 반신반의한 기색으로 쳐다봤기에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옥수수가 담긴 포대를 내밀자 녀석이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이건...?”
“옥수수야. 한 번도 안 먹어봤어?”
“...먹어 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딱딱해서 이빨이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음... 아무래도 생옥수수를 먹은 모양인데... 괜찮아. 잘 조리하면 맛있게 바꿀 수 있거든. 오늘 우리가 먹을 것도 이거야.”
“이걸... 먹는다고요?”
“왜, 이상해?”
“예... 옥수수는 가축이나 먹는 곡물이라 귀족은 고사하고 서민조차 꺼린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먹을 거라면 몰라도 아리엘 님이나 라디 님이 드실 만한 건...”
“아하 어쩐지...”
옥수수가 재배되고 있는 것 치고는 유달리 안 보인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나.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도 전파가 늦게 된 까닭에 옥수수를 먹지 않았을뿐더러, 지력도 많이 소모되어 한 해 농사를 짓고 나면 휴경이 강제되거나 단일 섭취 시 펠라그라 병을 유발하는 등 단점도 명확한 작물이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다들 잘만 먹었거든. 혹시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종교적 신념에 어긋난다거나 아니면 진짜 진짜 죽어도 먹기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됐어. 여기서 모래알이나 옥수수 수염 같은 이물질 좀 분리해줄래? 일단 상등급으로 가져오긴 했는데 혹시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선 옷부터 입고.”
“.....”
실비가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작업에 착수했다. 항상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잿불을 불씨통에서 덜어낸 후 불쏘시개용 짚단에 옮겨붙기고 장작을 쌓았다.
이후로도 간단한 요리 준비를 마치고 불 위에 팬을 달구고 있자니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 벌써 다 했어?”
“네, 이미 얼추 분리되어있어서...”
“잘됐네. 이리 줘봐. 이제 이걸 여기에 넣으면... 잠깐만, 기름 두르는 걸 깜빡할 뻔했네.”
서둘러 창고에서 버터와 소금을 가져와 팬에 두르자 지글지글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나는 실비가 분리해 준 옥수수를 팬에 넣고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집어 불 세기를 중불로 맞췄다. 이후 낱알마다 열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중간중간 팬을 흔들고 있자니 옆에서 다분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솥뚜껑을 덮고 실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궁금해?”
“....네, 대체 무얼 하시려고..”
“기다리면 곧 알게 될 거야. 이제 잠시 후면...”
그때였다.
펑!!
“....!!!”
솥뚜껑 안쪽에서 큰 소음이 들려오자 실비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 물러났다. 경계하듯 바짝 선 꼬리와 귀 털은 놀란 고양이 그 자체.
낱알이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실비를 보며 웃자 녀석이 보기 드물게 당황하며 내 소매를 붙잡았다.
“저...! 빨리 불을 꺼야 하는 건...!”
“괜찮아. 터지는 소리가 난다는 건 잘 되고 있다는 뜻이거든.”
“.....”
“그렇게 불안하면 직접 확인해볼래?”
“....”
끄덕.
실비가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팝콘이 튄다고 해서 다치는 것도 아닐 터, 슬쩍 뚜껑을 열어주자 실비는 가까이 상체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펑!
“....!!”
반사적으로 튀겨져 나온 옥수수 낱알을 붙잡았다.
신기에 가까운 반응속도에 경악하자 녀석이 팝콘 알맹이를 집은 채 쩔쩔매며 날 올려다봤다.
“요, 요 이상하게 생긴 건 대체...”
“...그건 팝콘이라고 하는 건데 옥수수 낱알을 고온에 가열하면 내부에 있던 수분과 유분이 빠져나오면서 터진 형태 그대로 굳어지는 거야. 어때, 신기하지?”
“그런...”
솔직히 반 정도는 도박이었는데 이번에 산 옥수수가 팝콘을 만들기에 적합한 품종이어서 다행이다. 매장 진열대에 늘어선 상품을 만져보고 일부러 껍데기가 단단한 녀석으로 사 온 덕도 있지만.
실비가 당황한 기색으로 팝콘 알갱이를 관찰하자 나는 부드럽게 눈웃음지으며 말했다.
“먹어도 돼.”
“네...? 하지만...”
“왜, 탈 날까 봐 걱정돼?”
“그, 그런 건 아닌데...”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 누가 스트릿 출신 아니랄까 봐 경계심도 많다.
이에 나는 조용히 웃으며 살며시 거리를 좁히고는
냠.
“....?!!”
실비의 손에 있는 알갱이를 그대로 날름 집어삼켰다.
천천히 낱알을 음미하자 짭짤하고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퍼져나갔다. 저도 모르게 탄산음료를 찾게 만드는 짭쪼롬한 소금간이 일품.
‘음... 괜찮네.’
이 세계의 옥수수는 다를까 봐 걱정했는데 기억 속의 팝콘과 완전히 동일한 맛이다. 이거라면 분명 모두 좋아할 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뚜껑을 들추고 낱알 하나를 집어 권하자 실비가 황당한 어조로 물어왔다.
“...원래 이런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나요?”
“뭐가?”
“....아닙니다.”
실비가 슬쩍 한숨을 내쉬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머리카락을 넘기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여
...냠.
“....!?”
오랜지색 눈동자가 보름달마냥 똥그래졌다.
입을 가리고 오물거리는 녀석의 고운 얼굴 위로 경악이 퍼져나간다. 마치 신세계를 접한 듯한 표정.
“어때, 맛있지?”
“그, 그냥 그렇네요...!”
“그러지 말고. 그렇게 인색하게 굴면 나만 먹는다?”
“읏... 그건...”
어찌어찌 새침한 모습을 가장하던 실비의 가면이 무너져내리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맛있었어요. 그 딱딱하고 톱밥처럼 무미건조하던 옥수수가 이렇게 변하다니... 고소한 데다가.. 짜고...”
“....”
톱밥도 먹어 본 거냐...
나도 한창 곤궁할 때 먹어 보긴 했지만.
“고소한 건 버터 때문에 그래. 간은 소금으로 맞춘 거고.”
“버, 버터랑 소금...?! 그 귀한 걸... 그, 그럼 아까 팬에 두른 게...”
“그래, 몰랐구나?”
“죄, 죄송합니다...!!”
“...왜?”
“그야... 그렇게 귀한 걸 제가...”
“.....”
나는 피식 웃으며 실비에게 말했다.
“이 저택에선 흔하니 마음껏 먹어도 돼. 아까 그 은발 언니 봤지? 걔가 어마어마한 부자거든. 아마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저택을 몇 채나 사들이고도 남을걸?”
“....”
“그래, 그럼 난 이제 다른 걸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이 팬 좀 잘 지켜봐 줘. 중간중간 집어먹어도 되긴 한데 앞으로 더 맛있는 게 기다리고 있으니 벌써부터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더, 더 맛있는 거 말씀이십니까?”
“그래.”
실비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