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 진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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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진실 #8
레모네이드, 멜론과 망고 후르츠, 식빵에 얹어 먹을 홈메이드 사과와 복숭아 잼 등등.
테이블 위로 완성본이 쌓일 때마다 실비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도중에 아리엘의 지하 창고에서 몰래 얼음을 꺼내와 녀석의 레모네이드 잔에 넣어주었을 때의 반응은 꼭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을 정도.
전보다 한결 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자니 실비가 가까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녀석은 한참이나 날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지금 팬에 볶고 계시는 알맹이들은...”
“아, 이거? 이것도 오늘의 메인 요리 중 하나야. 혹시 초콜릿이라고 들어봤어?”
“초콜...릿 말입니까?”
“그래, 나도 발음이 확실하진 않는데... 아무튼, 카코오라는 커다란 열매 안에는 요런 콩이 하얀 중과피에 잔뜩 쌓여있거든? 이걸 나무 상자 안에서 발효시키고 뜨거운 햇볕 아래서 건조하면 이렇게 메마른 상태가 돼. ..한번 만져볼래?”
“...단단하네요. 독특한 향도 나고... 원래 이렇게 메말라 있나요?”
“그래, 잘 말려야 카코오의 향이 좋아지거든. 그리고 이 정도면 얼추 다 볶아졌을 테니 이제 겉껍질을 솎아내면...”
나는 불에서 팬을 분리해낸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로스팅을 마친 카코오 콩을 부엌 벽면에 걸려 있던 체에 흔들어 겉껍질을 벗겨내고, 잘게 부수어 맷돌에 넣자 실비가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이내 천천히 맷돌 손잡이를 쥐고 돌리니 질척한 액체가 갈려나오기 시작한다.
“오오, 나온다.”
“이, 이건...”
“이게 바로 초콜릿이야. 원래는 훨씬 더 반지르르하고 묽은데 직접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이제 여기에 몇 가지만 더 추가하면 되는데...”
나는 맷돌질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온 걸쭉한 액체를 그릇에다 옮겨 담았다. 카카오버터 대신 티바르 산 버터를 섞고, 바닐라를 대체할 향신료와 설탕을 넣고 반죽을 저었다.
이후 슬쩍 맛을 보자...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네, 진짜 초콜릿에 비하면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실비도 한번 먹어 볼래?”
“네...?”
“자, 보기보다 맛있어.”
나는 검지 끝에 걸쭉한 초콜릿을 묻혀 실비에게 들이밀었다.
실비는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과 밝게 웃는 날 복잡한 표정으로 번갈아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더니
...핥짝.
“....!!”
“...어때, 맛있지.”
“이, 이건 대체 뭔가요...?!”
“말했잖아. 초콜릿이라고. 카코오라는 과일의 콩, 그러니까 씨앗을 갈아서 만든 거야. 이곳에서 고급 디저트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던데?”
“세상에...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이 존재했다니... 살짝 쓰지만 엄청 달아서...”
“그 쓴맛이 단맛하고 잘 어울려서 맛있는 거야.”
사실 다 설탕빨이지만.
아직 초콜릿이 묻어있는 검지를 내밀자 실비가 마저 손가락을 핥았다. 살짝 흘러내린 초콜릿을 신중하게 마디 아래부터 위로 훔치기를 반복한다. 고양이 수인이라 그런지 혓바닥에 돋아난 까슬까슬한 혓바늘의 감촉이 기분 좋다.
‘잠깐, 근데 이거 이 상황 조금 위험한 거 아냐...?’
새삼스럽지만 연하의 소녀에게 손가락을 핥도록 시키고 있다는 상황. 내 몸에는 손조차 대지 않고 공손히 손을 모은 채 몸을 왕복하는 실비. 새의 속깃털처럼 내리깔린 눈꺼풀과 살짝 상기된 뺨.
실비가 마지막까지 초콜릿을 핥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만족하셨나요.”
“크, 크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그보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나는 황급히 시선을 회피하고는 이제 굳히기 작업만 남은 초콜릿, 테이블을 차지한 각양각색의 디저트, 팝콘에 두를 카라멜 소스 등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나는 거실로 라디 일행을 불러들였다.
잠시 후 디저트를 보고 놀랄 그녀들의 모습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이었지만, 그녀들이 층계를 내려오자 내 눈에 들어온 건
“어어... 니, 니아 님 괜찮으세요...? 라디, 아리엘 너희는 왜 또...”
“.....”
잔뜩 심술이 난 떡두꺼비처럼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니아. 그런 니아를 달래느라 녹초가 된 라디. 난감하면서도 씁쓸하게 웃고 있는 아리엘과 마냥 해맑은 란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까와는 딴판인 분위기에 당황하자 니아가 획 고개를 돌렸다.
“흥!”
“니, 니아 님...?”
“.....”
“저... 혹시 왜 화나신 건지 여쭤봐도...”
“.....”
글렀다.
단단히 삐져서 도통 들을 생각을 안 한다.
니아가 토라진 원인도 모른 채,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중 주방에서 실비가 걸어나왔다.
니아가 고개를 획 돌려 실비를 응시하더니 꼬리털을 잔뜩 부풀리고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저 도둑고양이 년...”
“.....”
설마...
“...니아 님, 지금 혹시 질투하는 거예요?”
“몰라. 소년 미워. 말 안 할래.”
“.....”
니아가 ‘나 삐졌어!’ 하는 기운을 뿜뿜 내뿜으며 외면했다.
설마 A랭크의 초인이 고작 이런 일로 질투할 줄이야...!
나는 눈앞의 표범 소녀가 귀여워 꼭 끌어안았다.
니아를 강하게 품에 안은 채 등을 토닥여주고 있자니 그녀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런다고 내 화가 풀릴 것 같아?”
“네.”
“흥! 어림도 없거든? 나 이번에는 소년한테 단단히 삐졌어.”
“.....”
그러면서도 두 손이 은근슬쩍 제 엉덩이로 향하고 있는데 말이죠.
따질 건 따지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모습에 실소가 새어나왔다. 평소에는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이따금씩 이렇게 솔직한 면모를 보여주니 귀엽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난처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실비에게 부탁했다.
“실비야, 이제 그거 들고 와줘.”
“...알겠습니다.”
실비가 부엌으로 사라지더니 곧바로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거실 소파 앞 탁자에 하나둘씩 디저트가 쌓일수록 라디 일행의 눈동자도 덩달아 커진다.
하지만 단연코 그중에서 제일 놀란 건 니아였으니.
“이, 이건...”
“실비랑 같이 요리했어요. 예전에 저희 기억나요? 암시장의 유랑단 텐트에서 공연을 볼 때 약속했던 거요.”
“설마...”
“네, 캐러맬 팝콘 만들어주겠다고 했잖아요. 니아 님을 위해 준비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나는 니아를 무릎 위에 앉힌 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간 그녀는 내 곁을 지켜준 걸로도 모자라 항상 웃고, 변함없는 애정을 보내주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줄곧 열심히 해 주었으니까.
이에 니아는 멍하니 날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팝콘을 입에 머금더니...
“달아...”
“그쵸, 달고 맛있죠?”
“달아.. 달아... 소년... 소년....”
“니, 니아 님...?”
니아가 내게 안겼다.
그녀가 날 애타게 찾으며 더욱 품에 파고드는가 싶더니 이로 내 옷깃을 깨물었다. 평소와는 다른 음색의 목소리에 은은한 열감이 담기고, 맞닿은 살을 비비적거리며 후끈 달아오른 체온을 전해주었다.
조금 야릇한 니아의 분위기에 꿀꺽 마른침을 들이킨 순간
“소년...”
“...네.”
“우리... 아기 만들자.”
“뭐, 뭐...? 당신 또 취했어?!”
“아니, 나 맨정신이야. 나 소년이랑 잘래. 아이 만들래.”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소원권을 써도?”
“윽...! 그, 그건... 이, 일단 지금은 안 돼요! 그, 그보다 빨리 나머지 것들도 먹어 봐요.”
“......”
“...니아 님, 지금은 란이랑 실비도 있으니 조금... 그보다 도란, 이게 다 뭐야?”
마치 발정기라도 온 것처럼 홀린 듯이 내 체취를 맡는 니아를 떨어뜨려 놓자 아리엘이 식탁 위에 가득한 먹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 눈길로 날 애타게 응시하는 니아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아, 사실은 팝콘 재료를 사려고 갔다가 요 과일들을 발견했지 뭐야. 그래서 이참에 잔뜩 사 왔지. 다들 단 걸 좋아하니까. 어때 라디야?”
“지, 진짜 맛있어요! 언니! 언니도 이것 좀 먹어봐요!! 이 팝콘인지 뭔지 하는 거요!”
“그러게... 옥수수에 열을 가하면 이렇게 변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소금간을 해서 먹으니까 엄청 맛있어! 더군다나 카라멜을 두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게요... 게다가 옥수수는 가축만 먹는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이 노란 음료는 뭐에요 도란님?”
“그건 레몬을 설탕하고 같이 물에 탄 건데 한번 마셔봐. 처음 먹으면 조금 시큼할 수 있으니 조심하고.”
“어디 한 번... 읍?!”
라디가 조심조심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리엘을 돌아보았다.
“어, 엄청 새콤달콤해요...! 이, 이렇게 맛있는 음료는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언니도 한 번 마셔보세요!”
“음... 레몬주스구나?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 성에서 자주 먹어봤어. 내가 굉장히 좋아했던 건데... 추억이네. ..도란, 근데 요 갈색은 뭐야? 혹시 초콜릿?”
“뭐야, 알고 있었어? 맞아. 마침 이곳에서도 카카오, 아니 카코오 열매를 수입해서 팔고 있더라고. 마침 제조법도 알고 있으니 잘됐다 싶어서 냉큼 사 왔지.”
“...이걸 도란이 만들었다고? 여기 있는 걸 전부?”
“아니, 나 혼자서는 아니고 실비랑 같이. 마침 내 세계... 아니, 내 고향에서 자라는 과일이랑 비슷한 것들이라.”
“.....”
말을 마치자 아리엘은 입가를 손으로 짚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차, 라디가 식빵에 사과와 복숭아 잼을 반반씩 발라 맛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 뭐, 뭐야 이거도 엄청 맛있어요! 적당히 달면서도 과일의 산뜻함이 받쳐주는 게... 니아 님도 그러고 계시지만 말고 한번 드셔 보세요!”
“...맛있네. ...아까는 심한 말 해서 미안해 실비야. 내가 너무 성급해서...”
“괜찮습니다.”
“...그래요. 둘 다 없던 일로 훌훌 털어버리고 잊어버려요. 그보다 실비도 같이 먹자. 정말 맛있어.”
“저는 아까 요리하면서 많이 먹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언니... 아까부터 무슨 생각 해요? 왜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
아리엘이 대답을 망설이더니 살며시 날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도란, 이 중에서 네가 알고 있던 과일이 몇 개나 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고향에서 본 것과 비슷한 과일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어.”
“이 중에서?”
나는 슬쩍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를 응시하며 말했다.
“레몬에 망고, 멜론, 사과, 복숭아, 카코오, 키위, 포도... 옥수수는 과일이라 하기엔 애매하지만 마찬가지로 많이 먹던 작물이고... 여기 있는 것들은 다 본 적 있는 것들인데? 잠깐, 아리엘 혹시 네가 말하고 싶은 게...”
“.....”
라디가 디저트로 향하던 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방금 전 대화에서 위화감을 감지한 까닭.
이에 아리엘은 슬며시 실비와 니아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보더니...
“...나 이 과일들의 유래를 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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