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 진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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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진실 #9
“...나 이 과일들의 유래를 알 것 같아.”
“....”
아리엘이 말하려는 바는 알겠다.
하지만...
“...아니,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그건 아니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어째서...?”
“그거 진짜 말도 안 되게 무진장 어려운 거거든.”
그 말대로, 생물 전파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선 쉽게 묘사되곤 하지만 토양의 성분이 다르거나 비율이 조금만 틀려도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또 각 작물마다 걸맞은 기온, 일조량, 습도, 야간 온도와 강풍의 유무 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예컨대 식물의 올바른 생장에 관여하는 필수 영양소, 그중에서도 다량으로 요구하는 질소, 인산, 칼륨 등이 모자라면 성공적으로 과실을 수확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 과일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재배되는 작물이 아니던가.
망고는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 사과는 그보다 서늘한 북부 온대 지방, 멜론은 고온성 작물이지만 토양 습기에 약하다.
이처럼 이 과일들이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환경에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할 정도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재배되어야 하고, 화학 비료나 첨단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수입까지 해 올 정도로 번창해야만 하며, 극소량의 유전자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병충해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 세계의 작물을 먹고 말지.
이처럼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만 하는데 이곳에서 지구의 작물을 키우는 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그러니 이는 유사하지만 다른 작물이라고 보는 게 옳을 터. 실제로 눈앞의 과일들엔 사과의 씨앗이 한 개뿐이라거나 멜론이 주홍색을 띠는 등 차이점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이에 라디는 턱을 짚으며 숙고하더니...
“...아니요. 가능해요.”
“뭐...? 그게 무슨 말...”
“저희는 모두 알고 있잖아요. 이 세계에 그런 게 가능한 존재가 한 분 계신다는 걸.”
“대체 누가 그런 걸... 아.”
...설마.
“티바르 님...?”
며칠 전,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목장의 주인. 농업의 신이자 해당 계열의 최상위 신. 바람처럼 신출귀몰하며 홀연히 땅에 축복을 부여하고는 사라지는 축복의 은둔자.
그분이라면 수많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성공리에 과실을 일궈낼 수 있을 터.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씨앗을 전달하고, 그가 이 세계에 작물을 퍼트렸다고 하면...
“.....”
라디가 여전히 날 빤히 응시하는 니아, 줄곧 침묵하는 실비를 곁눈질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짚이는 거 없으세요?”
“아니... 그렇게는 말해도... 이전에 만났을 때 티바르 님은 날 보고 딱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잖아. 말마따나 이전에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면 아는 체라도 했을 텐데.”
“어쩌면 위장이었을 수도 있죠.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던가... 도란님을 만나러 온 것 자체가 특별 상황이고요.”
“하지만 그건 결국 안디라 님 때문으로 밝혀진 거 아니었어? 그분이 온다는 걸 귀띔해 주려고... 그분에게 축복이 받은 인물이 누군지 궁금해서 온 걸 수도 있고.”
“.....”
아리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작물을 퍼트린 게 도란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아니라고? 그럼 누구...”
“그 왜 있잖아. 혹시 도란의 아버님이라던가... 어쩌면 티바르 님과 친우 관계였을 수도 있고.”
“내 아버지? 에이 설마...”
그분이 조금 특별하긴 해도 그 정도로 특별할 리가.
‘아니... 그래도 섣불리 단정하는 건 조금 그런가...’
내가 세계를 두 번이나 드나들었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마당에 아버지가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어쩌면 특이 체질이 유전된 걸 수도 있고.
더군다나 당시에는 원망스러웠다지만 아버지와 함께 오지를 돌아다니며 쌓은 서바이벌 지식이 이 세계에서 생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가.
설마 아버지는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테이블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라디와 아리엘이 난처하게 눈치를 교환했다.
라디가 살며시 내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도란님, 혹시 아버님한테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일단 겉보기로는 없었어. 상당히 별난 분이시기는 해도 그게 전부거든. 내가 다른 가정을 못 겪어본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 빨리 먹고 이제 슬슬 일어나자. 너무 늦었어.”
창밖을 쳐다보자 이미 어두워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내일은 경과 확인을 위해 길드에 방문할 계획이니 일찍 자야 한다.
이후로도 자잘한 대화를 나누며 후딱 그릇을 비우자 실비가 다 먹은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빈 접시는 제가 치우겠습니다.”
“아, 괜찮아. 한 번에 치우면...”
“괜찮습니다.”
실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
불현듯 창가로 새어들어온 바람에 그녀의 머릿결이 살랑였고
‘달...?’
실비의 목덜미에 새겨진 흑백 문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
“진짜 요즘은 너무 뒤숭숭하네...”
나는 거울에 비친 초상을 확인하며 타올로 젖은 머리칼을 닦았다. 대충 물기를 털어낸 뒤 욕실에 비치된 가운으로 몸을 감쌌다.
뜨거운 온수로 하루 동안의 피로를 씻어내자 머리가 개운해졌다.
한데 막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한 인물이 잠옷 차림으로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지금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렸던 거예요 니아 님?”
“.....”
끄덕.
“왜요...? 화장실은 저택 안에 또 있으니 급하면 그곳을 써도 되는데...”
“....”
“아니면 저한테 볼일이 있어요?”
끄덕끄덕!
“뭔데요 말해 봐요.”
나는 상냥하게 눈웃음지으며 니아를 마주보았다. 평소의 발랄한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고 침착한 분위기.
심경에 변화를 겪을 만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니아가 불안한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내 방에 올래? 아니면... 내가 도란 방에 가도 될까?”
“왜 그래요. 정말 무슨 일 있어요...?”
“.....”
“...혹시 아까 팝콘 해 준 것 때문에 그래요?”
“....”
“에이...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요. 그 정도야 당연한 건데. 약속했던 거잖아요...”
“도란.”
“....”
“도란.. 도란.. 도란...”
니아가 날 끌어안았다. 조심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품에 얼굴을 묻고 체취를 맡았다.
그녀가 금색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도란... 나 안아주면 안 돼? 아니, 안아줘. 꼭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그거 액면 그대로의 말이 아닌 거죠?”
“.....”
가운을 붙잡은 니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눈높이를 맞추고는 부드럽게 그녀를 토닥이며 물었다.
“왜 그래요. 꼭 조급해하는 사람처럼. 니아 님 답지 않아요.”
“....도란에게 버림받으면 어떡해.”
“제가 왜 니아 님을 버려요. 니아 님이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데.”
“....”
“....정 그러면 잠들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어 드릴까요?”
말이 떨어지자 니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러면 라디랑 아리엘한테 말해놔야 할 텐데... 아, 란이야.”
....?
“나는 니아 님 방에서 잠깐 있다가 온다고 언니들한테 말 좀 전해줄래?”
됴란!
“믿고 맡겨도 되는 거 맞지...?”
됴란!!
나는 때마침 복도를 거닐다가 우다다다 뛰어가는 란이를 불안하게 응시하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니아는 그저 뺨을 붉힌 채 침묵하고 있을 뿐.
부드럽게 손을 맞잡고 복도를 거닐자 그녀의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하게 말하지만, 니아 님이 주무실 때까지 같이 있어 드리는 것뿐이니까요.”
“....”
“이상한 짓 하면 바로 갈 거예요?”
“...알고 있어.”
니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끝 그녀의 방에 도달해 문을 열자 아늑한 침실이 나왔다. 기본적인 손님용 객실의 구성. 니아 님이 베라스틴에 머무는 동안 지내기 위해 마련한 공간.
문턱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니아를 다독이며 발을 들이자 향기로운 라벤더 향이 풍겨왔다.
나는 취침등 대용으로 천을 겹겹이 둘러둔 전등갓 안에 마석등을 넣고 니아와 손을 맞잡은 채 침대로 파고들었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거리에서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니아 님이 베라스틴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네요. 낼 모래면 던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간 많은 일이 있었어요.”
“.....”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미안.”
“미안해할 것까지야. 그리고 그 외에 그런 일도 있었죠. 같이 장터를 돌아다닌다거나 동물원을 관람하고 호텔 공원을 산책하고, 목장 일과를 체험해 보기도 하고...”
“.....”
“이제 저한테 솔직하게 털어놔 봐요. 무슨 고민인지.”
“....”
니아가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저녁놀이 파도치는 모래사장처럼 수려한 빛이 일렁거리는 금안에 내 흑안을 담고, 망설인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고백할게. 나... 사실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보기처럼 마냥 밝은 것도 아니고, 심사는 뒤틀렸고, 솔직하지도 않아.”
“....”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식덩어리에다가 키도 작아. 쓸데없이 먹을 건 밝히고, 할 줄 아는 건 주먹질밖에 없고, 아델이나 아리엘처럼 마음이 너그러운 것도 아냐.”
“....”
“환멸했지? 이런 나라서... 내가 생각해도 난 여자로서...”
“알고 있었어요.”
“뭐...?”
니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나는 온화하게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니아 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시는지 절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또 얼마나 저를 생각하고 주변을 배려하는지도요.”
“이, 이런 내가 싫지 않아?”
“제가 왜요? 언제나 매사에 열심인 사람이 싫을 리가요. 게다가 방금 말한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점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타인을 위해 자신을 굽힐 줄 안다는 뜻이잖아요.”
“.....”
니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한 방 먹은 것처럼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역시 난 도란을 좋아해!”
“...그런 말 하면 부끄럽지 않으세요?”
“부끄러워. 엄청. 그래서 말인데...”
니아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도란, 진짜로 날 안지 않을래?”
“...그 얘긴 아까 끝난 거 아니었어요?”
“달라. 이제까지는 도란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어떻게든 곁에 남아있고 싶어서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어.”
“.....”
“안 돼? 나 열심히 해볼게. 처음은 꼭 정말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단 말야. 도란이 해달라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응?”
니아가 내 뺨을 어루만지며 종용했다.
나는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솔직히 남자니까 니아 님하고도 이런저런 거 다 하고 싶죠. 하지만 저는 애인이 있는 몸이잖아요. 아니 애초에 이런 제가 뭐가 좋다고...”
“하지만 그런 건 단점 축에도 끼지 않는걸? 그만큼 도란이 너무 매력적이니까! 그리고 라디랑 아리엘 둘 다 소중한 동생들이고. 또 란이도 엄청 귀엽잖아.”
“....”
“도란이 정 싫다면 더 이상 조르지 않을 테지만...”
“...”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고는 부드럽게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싫지 않아요. 하지만 제게도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단순 충동으로 니아 님과 일을 저지르기보단 제대로 책임질 수 있을 때 정을 나누고 싶으니까요.”
게다가 니아에겐 아직 내 출신을 밝히지 않았으니.
니아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응! 난 도란의 그런 점이 너무 좋아! 가끔은 그냥 짐승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거칠게 범해줬으면 하는 충동도 들지만.”
“...안타깝지만 제가 A랭크를 상대로 그럴 배짱은 없어서요. 그보다 빨리 주무세요. 지금 벌써 시간이 몇 시...”
“싫어.”
“네...?”
“나 자면 도란은 바로 가버릴 거 아냐. 싫어. 최대한 오래 버티고 버티다가 잠들어야지.”
“뭐 그런...! 억지부리지 마세요!”
“히히...”
니아가 꼬옥 품에 안겼다.
포근하게 미소지으며 가운 사이로 뺨을 비비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