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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300화 (300/375)

〈 300화 〉 채비 #1

* * *

[300] 채비 #1

결국 아침까지 니아와 뒹굴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느즈막한 점심이 되어서야 그녀의 침실에서 눈을 뜨자 미약한 두통과 함께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니아가 보였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오려던 찰나­

­덥석!!

“....!!”

“우음... 카라매엘 파콘... 마시써어...”

“....”

잠꼬대인가.

나는 내 가운을 붙잡은 그녀의 손가락을 조심조심 떼어냈다. 이후 나무늘보처럼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온 다음 까치발을 든 채 침실에 깔린 양탄자 위를 거닐었다.

살금살금 발을 옮겨 막 방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혹시 깨어난 건 아니겠지?’

­새근새근..

‘휴...’

다행히 깊게 잠든 모양.

속으로 크게 안도하며 문을 열고 발을 내디디자ㅡ

“...뭐해 소년.”

“흐어어어어버법!!!”

니아가 도끼눈을 한 채 눈앞에 서 있었다.

대체 어느 순간에...!!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고 침대로 잡아끌었다.

“이리 와. 조금 더 뒹굴뒹굴하자. 나 아직 피곤하단 말야.”

“어떻게든 안 자려고 버팅기니까 당연히 피곤하지!! 결국 새가 지저귈 때가 되어서야 잠들었잖아요! 결국엔 나까지 덩달아 늦게 자버렸고!”

“그래도 재밌었잖아. 안 그래?”

“뭐 그렇긴 하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떠들거나 함께 조명에 비친 그림자를 가지고 놀기도 했고, 이따금씩 방심할 때면 그녀가 시도하는 야릇한 장난에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여러 웃긴 일화나 모험가로 살아오며 힘들었던 경험, 유년 시절의 아픈 기억 등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결 더 가까워지기도 했고.

이미 중천에 다다른 해를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자니 그녀가 침대 위에 드러누우며 꼬리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우음... 피곤해에~ 지금이라면 누군가가 막 만져도 못 알아챌 것 같은데...”

“.....”

“나 만질래...?”

“...진짜 가지가지 하네.”

나는 걸리적거리는 이불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베개에 고정하고 내려다보자 잠결에 헝클어진 금발,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잠옷과 아직도 달콤한 간밤의 꿈을 꾸는 듯 수줍게 달아오른 뺨이 보였다.

이대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을 터.

“각오 단단히 하세요.”

“.....”

이미 반나절 동안 니아의 약점은 완벽하게 파악한 바, 그녀의 가슴으로 팔을 뻗은 순간ㅡ

“크흠...”

““.....””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메이드복을 입은 실비가 헛기침하며 보고 있었다.

녀석이 갯지렁이처럼 뒤엉켜 있는 나와 니아를 힐끗 바라보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말씀드릴 예정이었는데...”

“어...”

“라디 님과 아리엘 님께는 두 분이 아직 주무시는 중이라 전해드리겠습니다.”

“....”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자, 잠깐...! 실비야!! 이건 간지럼을 태우려던 것 뿐...!”

황급히 손을 뻗으며 불러세웠지만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뿐.

나는 황급히 니아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 어떻게 할 거예요?! 완전히 오해했잖아요!! 빨리 쫓아가서 설명해야...!”

“응? 괜찮지 않아? 그냥 오해하게 냅둬두...”

“절대 안 돼요!!”

나는 서둘러 옷을 추스르고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정돈할 새도 없이 빠른 걸음걸이로 복도를 가로지르자 니아가 달려와 팔짱을 끼고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시시덕거렸다.

“이러니 꼭 불륜이라도 저지른 커플 같다. 그치?”

“지금 말을 잘못했다간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요...!”

“음... 그것도 재밌겠는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는 것두...”

“난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이 망할 뇬아!!”

“히히...”

티격태격하며 니아와 걷고 있자니 점점 거실이 가까워졌다. 층계를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심정이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막 거실에 도착하자 조용히 독서 중인 라디와 양피지에 글귀를 써 내려가는 아리엘, 먼지떨이로 선반을 청소하는 실비가 보였다.

한데 우리가 1층에 발을 들이자 라디는 탁 소리가 나게 책장을 덮더니­

“...왔네요.”

“응... 왔네.”

“제가 도란님 쪽을 맡을 테니.”

“내가 니아 님을 맡을게.”

­성큼성큼.

‘뭐, 뭐.. 뭐야...?!’

라디와 아리엘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혼연한 동작으로 나와 니아를 분리해내더니 각각 거실 구석으로 연행해갔다.

이에 라디는 날 코너에 몰아붙이고는...

“킁...”

“라, 라디야...?”

“킁킁... 일단 그런 냄새는 안 나는데...”

“....?!”

라디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코를 쫑긋거렸다.

솔직히 조금 떳떳하지 못한 심정도 있는 바, 무의식적으로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 떼어내고자 했지만­

“히이이이익?!!”

“.....”

라디의 푸른 눈동자에 혹한보다도 싸늘한 눈보라가 맺혀 있었다.

녀석이 내 몸을 요리조리 둘러보더니 천천히 손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외관상으로 특별한 점은 없는데... 언니, 그쪽은요?”

“이쪽도. 겉보기는 그대로야.”

“흐음...”

라디가 턱을 짚으며 숙고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라디가 살짝 흥분하더니 내 가운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란이가 어젯밤에 달려와서 손짓 발짓으로 말해줬어요. 도란님이 니아 님을 유괴하려 든다고. 침실로 잡아끄는 도중이었다는데요?”

“.....”

아니... 어떻게 그게 그렇게 되는 건데.

나는 소파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원흉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비취색 눈망울을 반짝거리고 있는 란이를.

귀여워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럴 리가 없잖아. 애초에 내가 니아를 어떻게 유괴해. 바로 제압당하고 온몸의 뼈란 뼈는 바스러져서 바닥을 기어 다닐 게 눈에 훤한데.”

“저희도 그쯤이야 알죠. 저희가 진짜로 걱정했던 건...”

“.....”

“...섹스했어요?”

“그, 그럴 리가...! 손만 잡고 잤어!! 케, 켕길 만한 짓은 아무것도...!!”

“...잠깐만 도란, 그건 뭐야?”

“뭐, 뭐...?”

어느새 반대편에서 니아의 검문을 마치고 온 아리엘이 내 가운을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고스란히 드러난 목덜미를 라디와 아리엘이 빤히 바라보더니­

““키스마크네.”요.”

“.....”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 물러났다.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아 입에 담으려던 찰나, 니아가 발등에 떨어진 불씨에 기름을 때려부었다.

“아, 저거 나한테도 있다 봐봐!!”

­슬쩍!

“야 니아!! 이 상황에서 그걸 까버리면...!”

““니아?””

“.....”

끼긱거리며 고개가 돌아가더니 오싹한 푸른 눈동자 두 쌍이 날 똑바로 응시했다.

“...어젯밤 사이 많은 일이 있었나 봐? 존칭까지 생략하고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저 키스마크는 대체 뭐에요. 한둘이 아닌데요? 심지어... 목 언저리뿐만 아니라 배꼽 근처에도 있네요. 간밤에 재미 좀 보셨나 봐요.”

“자, 잠깐...! 일단 나한테 설명할 기회를 줘!!”

“.....”

그녀들이 시선으로 승낙하자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선 내가 어젯밤에 니아 님 방에서 잔 건 고민 상담을 해주기 위해서야...! 도중에 일선을 넘는 행위는 없었고, 원래는 니아 님이 잠들면 바로 나올 예정이었는데 너무 늦게 자는 바람에 나도 곯아떨어졌어.”

“키스 마크는요?”

“그, 그건...!”

“소년이 꼭 끌어안고 쪽! 해줘서 기분 좋았어! 입술 엄청 부드러웠어!”

“니아!! 아, 아니 니아 님! 잠깐 조용히 계세요!”

“왜 맞잖아~”

“아니 맞긴 한데 잠깐만 제가 해명할 기회를 주시라고요!!”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내기?”

“그, 그래...! 어떻게든 안 자고 버티겠다고 생떼를 부려대는데 어쩔 수 없잖아...! 도중부터 장난치며 어울려 주다 보니 얼떨결에 하게 된 거야! 게다가 이 사람 그땐 분명 한 번만 뽀뽀해주면 바로 잔다고 했단 말야!!”

“우음... 하지만 소년이 너무 매력적이라 잠들 수가 없는걸?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

아리엘과 라디가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라디가 내 어깨에 들러붙은 먼지를 탁탁 떼어주며 말했다.

“...저희는 딱히 도란님이 니아 님과 자고 와서 화내는 게 아니에요. 이전에는 같이 목욕을 제안한 적도 있었잖아요. 니아 님도 저희 못지않게 도란님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고, 도란님도 니아 님에게 호감이 있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 그럼...?”

“그래도 이건 별개예요.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사라져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세요? 저나 언니나 이번에 같이 쇼핑하면서 새로 산 속옷을 보여드리려고 기대도 많이 했는데...”

“맞아. 그리고 피임도 제대로 해야지! 너 약도 그대로 침실에 두고 갔더라? 혹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무, 무슨...! 말했잖아! 처음부터 고민 상담을 들어주러 간 거라고! 그런 짓을 할 거란 생각은 추호도...”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어?”

“.....”

입을 다물었다.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자니 라디가 내 허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럼 당장 잔소리는 끝났으니 일단 가서 밥 먹어요. 저랑 언니는 먼저 먹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요.”

“....고마워.”

“알면 잘해 도란. 나 서운하게 만들지 말고. 안 그래도 마침 본가 쪽에 편지도 쓴 참이니까.”

“펴, 편지? 본가에... 왜, 왜...?”

“왜긴 왜야.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조만간 부모님한테도 도란에 대해 말한다고 했잖아. 마침 영주도 실각했겠다, 이번 사건은 우리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갈 테니까.”

“그, 그랬었지! ...근데 그럼 나름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는 건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점수를 딴 상황이 됐으니까... 혹시 나도 그 편지 볼 수 있어?”

“싫어.”

“응...?”

“전날 밤 외박하고 들어온 바람둥이한테는 내용 안 보여줄 거야.”

아리엘이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메롱하더니 테이블로 되돌아갔다.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고 있자니 니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날 잡아끌었다.

부엌 앞, 식탁에 그녀와 마주 앉자 흰 천에 덮인 빵과 방금 데운 우유죽, 부드러운 고기 요리 등 공복에 편하게 먹기 좋은 구성의 아침상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중간 아스파라거스나 굴, 부추 등 정력에 좋은 음식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진짜 완전히 오해했네...’

복잡한 심경으로 숟가락을 뜨자 이런 소동에도 아랑곳않고 해맑게 웃는 미소녀가 보였다.

나는 힐끗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웃지 마. 정들어요.”

“헤헤... 난 소년의 얼굴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걸? 어떻게 마음씨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고와?”

“어디 가서 마음이 곱다는 얘기는 잘 못 들어봤는데...”

“그럴 리가. 내가 살면서 이렇게 푹 잔 건 처음이야. 소년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깊게 잠들지 못하고 도중에 몇 번은 깼을 텐데.”

“.....”

그건 그냥 아침까지 버팅기다가 지쳐 잠들어서 그런 게 아닐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우유죽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데 식사에 열중하고 있자니 니아가 은근슬쩍 제 그릇을 들고 내 옆자리로 다가오며 물었다.

“소년, 혹시 이 다음에는 뭐 할 거야?”

“뭐 하다뇨?”

“밥 다 먹은 다음에 말이야. 할 일 없으면 나랑 마저 침대에서 뒹굴뒹굴...”

“바로 길드에 나가봐야 해요. 돌킨의 노예 상점에도 들러야 하고.”

“그래...?”

니아가 시무룩하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나는 그녀의 숟가락 위에 고기반찬을 올려주며 물었다.

“...왜요, 아쉬워요?”

“응, 그야 내일이면 다시 던전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전에 베라스틴에서 소년과의 추억을 잔뜩 쌓아놓고 싶어서...”

“어차피 던전에도 같이 갈 거면서 유난은...”

나는 슬쩍 앞을 돌아보고는 짐짓 무심한 척 입을 열었다.

“...그럼 이따가 저녁에 같이 대련이라도 할래요?”

“뭐?! 대련!?”

“네, 이전에 니아 님이 격투술 가르쳐주기로 하셨잖아요. 이번 기회에 간간이 배워두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던전에서 또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나, 나야 환영이지!! 소년한테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내 노하우를 다 전수해줄게! 그리고...”

니아가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둘이 있을 수 있겠네?”

“....확실하게 말해두자면 어제가 특별했던 거고 당분간 그런 일은 안 할 거예요. 내가 두 번 다신 같이 자나 봐라.”

“안 돼~ 표범 수인은 발정기 오래 간단 말야. 소년이 책임져.”

“푸흡...! 너, 너 지금 뭐라고...?!”

“응,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발정기 맞을걸? 어제부터 아랫배가 욱씬...”

“이,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밥부터 먹죠...! 식겠어요!!”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고는 공복을 채우는 데 열중했다.

부엌에서 한 쌍의 호박색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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