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채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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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채비 #2
“아오... 피곤해 죽겠네.”
하품하며 현관을 나서자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후드에 드리웠다. 이 세계 대부분의 일과가 해가 떠 있는 일몰 전에 이뤄진다는 걸 감안하면 매우 늦은 시각.
예정대로 길드에 방문하기 위해 저택을 나서서 오솔길을 걷던 중 나는 문뜩 자리에 멈춰섰다.
‘...잠깐, 이대로 나가면 또 이목이 몰릴 텐데.’
그러면 또 한참을 붙들려 시간을 뺏기지 않겠는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튕기며 미소짓고는 그림자에서 개미를 불러들였다. 잠시 짙은 연무가 발치를 휩쓸고 나자 그곳엔 사슴뿔과 유사한 톱니를 지닌 개미가 더듬이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크샤아아앗!!
“응, 마침 네게 시킬 게 좀 있는데.”
크샥! 크샤샤샷!!
“그래, 별건 아니고 요 앞에 나가서 사람들 있나 좀 보고와. 들키지 않게 은밀히.”
개미가 아래턱을 까딱거리곤 몸을 돌려 풀숲 너머로 향했다. 역시 녀석의 진짜 장점은 내 입맛에 맞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점.
‘그러고 보니 이름도 지어주기로 했었는데...’
어차피 던전에선 상시 소환해둘 예정이니 그때 생각해도 되려나?
해일이나 메라, 울시 때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 이름을 떠올리고 있자니 녀석이 수풀 너머에서 돌아왔다.
“그래, 어땠어?”
크샤아아아앗!!
“...사람이 쫙 깔렸다고?”
크샥! 크샷샷!!
“안 돼, 잡아먹진 말고... 일단은 수고했어. 들어가 봐.”
나는 개미를 도로 그림자 속으로 물리고는 고민했다. 인파가 몰려 있는 것도 알았겠다 이대로 나가면 또 사람들에게 붙들리고 말 텐데...
‘아니, 이럴 땐 또 좋은 방법이 있지.’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오솔길에서 벗어났다. 방향을 틀어 잡목 사이를 가로지르다 보니 가도가 아닌, 건물의 담벼락이 나왔다.
능숙하게 담장을 기어올라 며칠 전 안디라 님이 베라스틴에 방문했을 때처럼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넘자 드넓은 베라스틴에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진작 이렇게 좀 할걸.”
푸른 하늘과 느긋하게 흘러가는 구름. 선선히 흑발을 간질이는 바람. 활강하는 날치 떼처럼 곳곳에서 반짝이는 신문 가판대, 모험가의 사슬 갑옷, 유리 공예품 등.
북적거리는 광장에는 물물교환이 성행했고, 얼굴과 옷에 알록달록한 물감을 묻힌 채 그림을 판매하는 화가의 주변에는 나와 내 애인들의 초상이 담긴 유화가, 분수대가 있는 광장 중심부에서는 한 쌍의 음유시인이 영주성 사건을 주제로 한 노래를 연주 중이었다.
살짝 흥미가 동해 자리에 멈춰서서 엿듣자...
아아~ 딩기리딩기딩~
멋쟁이 흑발의 사내~
홀연히 나타나 부패한 기사를 물리쳤다네~!
어디 이뿐인가~ 어디 이뿐인가~
괴물도 무찌르고 이교도도 때려잡았다지~
멋쟁이 흑발의 사내~
아아~ 딩기리딩기딩~
“.....”
‘우씨... 내가 불러도 저것보단 잘 부르겠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가사에 진저리치며 지붕 위를 뛰어넘다 보니 부모와 손을 잡고 길가를 걸어가는 꼬마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입에 문 당밀 사탕을 툭 떨어뜨리는 아이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계속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저만큼 새하얀 아카이아 길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군중 사이로 조용히 착지해 스윙도어를 젖히자...
“...뭐야, 왜 이렇게 북적거려?”
길드로 들어서자마자 바글거리는 모험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접수창구에는 여름철 빙수 가게만큼이나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간단한 주류와 안주를 판매하는 구석에는 빈 컵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며, 양피지가 빽빽하게 내걸린 의뢰 게시판 앞에는 번잡한 인파로 발을 디디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 속으로 파고들어 앞으로 나아가던 중, 나는 한 남성과 어깨를 부딪쳤다.
툭.
“어이쿠, 미...”
“뭐냐?! 감히 이 아카이아 길드의 강철 주먹 엄베르크에게 어깨빵을 놓다니! 어디 한번 얻어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
“뭐야 너였냐? 난 또 누군가 했네.”
“네놈은 뭔데 아는 척.. 호, 혹시 도란 님이십니까?!”
“그래.”
어쩐지 낯이 익더니 길드를 왕래하며 자주 마주쳤던 모험가가 아니던가.
눈앞의 사내가 내 후드 안쪽을 들여다보며 경악하자 주위에서 이목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이 엄베르크, 얼굴이 왜 그래?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잠깐, 엄베르크 앞에 저 사람은... 설마...!”
“저 키에 후드, 틀림없어!!”
““도란이다!!””
“뭐? 도란 님이 이곳에 왔다고요?!”
주위에서 억센 목소리가 산발했다.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더니 저마다 뜨거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생소한 얼굴도 종종 섞여 있는 걸로 보아 신규 모험가를 대거 받아들이기라도 한 모양.
열렬한 모험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곤란해하고 있자니 엄베르크가 자세를 낮추며 물었다.
“그,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번에 영주성 도개교 앞에서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혹시 기억하실련지...”
“아 맞아, 너도 그때 있었지? 고맙다. 새벽이라 일어나기도 힘들었을 텐데.”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도란 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나중에 콩고물이라도 얻어 먹으려면... 크흠 흠..”
“그래, 그건 그렇고 혹시 카렌 여기 있어?”
“엄... 아까 접수창구에서 서류를 만지는 걸 봤습니다! 아마 안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텐데. 아, 저기 오는군요.”
찰나, 사람들이 갈라지고 주홍빛 머리칼의 소녀가 걸어나왔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맞이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말없이 내 손목을 붙들더니 길드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뭐, 뭐야...! 뭘 그리 급하게...”
“.....”
“카렌?”
“...일단 잠자코 따라와 도란.”
그녀를 따라서 계단을 올라 응접실이 있는 건물 2층에 도달했지만, 카렌은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쫓다 보니 그녀는 한 층을 더 오르고 나서야 멈춰섰다.
“뭐야, 왜 여기에... 여긴 고급 응접실이 있는 곳이잖아. 니아 같은 하이랭커나 귀빈을 맞이할 때나 쓴다던. ...왜 여기로 온 거야?”
“.....”
카렌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 넌 이제 우리 길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이 됐는데. 이번 영주성 소동 이후로 네 무용담을 듣고 얼마나 많은 신규 가입자가 쇄도했는지 알아?”
“뭐... 그랬어? 어쩐지 사람이 많더라. 처음 보는 얼굴도 섞여 있고.”
“그래, 그리고 지금은 일단...”
카렌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날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여전히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을 둘러보며 잠시 기다리자 그녀가 뜨거운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카렌이 맞은편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왜 매번 올 때마다 소란을 일으키는지... 조금 조용히 다닐 수는 없는 거야?”
“뭐... 나도 그러고 싶지. 근데 이젠 하도 얼굴이 팔려서 후드를 써도 알아보더라고.”
“하긴... 넌 요새 투구도 안 쓰고 다니니까. 가면 같은 걸 써도 키랑 체형 때문에 다 들통날 테고... 아니 그보다...!”
카렌이 찻잔을 세게 내려놓더니 날 똑바로 노려보며 추궁했다.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어제 기자들이 길드로 잔뜩 몰려와서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나도 잘 모르는 이교도 사건의 경위를 묻는 사람도 있고, 나랑 네가 여, 여.. 여...”
“연인이냐고?”
“끄흣...”
카렌이 푸쉬식 얼굴을 붉히더니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그냥 오해하게 냅두지.”
“뭐, 뭐...?! 넌 아무렇지도 않아!? 너랑 내가 연인이라는데...! 게, 게다가 넌 다른 애인도 있잖아!”
“응? 그 정도쯤이야 다들 크게 신경 안 쓸걸? 진짜 만나는 것도 아니니까.”
“....도란 너 좀 변했어.”
“...그래?”
“응, 예전에는 소문이나 타인의 시선에 엄청 민감했잖아.”
“뭐... 사람은 다 바뀌는 거지. 관심에도 익숙해지다 보니 견딜 만하더라고. 그보다 이제 슬슬 경과를 듣고 싶은데...”
“그래, 알았어.”
카렌이 살며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문을 뗐다.
이후, 그녀의 입으로부터 나온 내용은 대부분 예측 가능한 내용이었다.
하킴이 차기 기사단장 후보로 지목되어 열심히 영주성을 보수하고 치안 강화에 힘쓰고 있다던가, 그간의 실종과 언데드 사건의 배후가 밝혀져 사람들의 경각심이 극에 달했다던가, 그와 반대급부로 내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드디어 키론 경의 유산이 제대로 풀려 빈민 구제와 베라스틴 재건에 쓰이고 있다던가 등.
나 또한 영주성에서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털어놓다 보니 홍차가 식은 뒤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대화가 끝났다.
담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나자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가로이 창밖을 내다봤다.
유유적적 흘러가는 구름, 개미처럼 바삐 오가는 행인, 사람들의 입가를 수놓은 웃음 따위를 응시하며 하품을 내쉬고 있자니 카렌이 조심조심 물어왔다.
“피곤해...?”
“아... 응. 어제 잠을 거의 한숨도 못 잤거든. ...그러는 너도 부쩍 힘에 부쳐 보인다?”
“응... 신규 가입 희망자를 처리하느라 바빴거든. 타 길드랑 도시 재건 계획에 인력을 얼마나 파견해야 할지도 조정해야 하고, 안 그래도 날씨가 풀린 지 얼마 안 돼서 한창 바쁜 시기니까.”
“하긴... 그렇겠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기울이는 카렌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우리 둘 다 잠깐 쉬었다 갈까?”
“뭐...?”
“뭘 반응이 그래. 같이 좀 있다 가자.”
“자, 잠깐 너는 몰라도 난 바쁘단 말야...! 아직 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야!”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며 고했다.
“그래, 그럼 맘대로 해.”
“응...?”
“나도 이제 이 길드의 귀빈이라며. 근데 응대가 이렇게 소홀해서야 되겠어? 이러다간 다른 모험가 길드로 이적...”
“뭐...?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뒷바라지해 줬는데!!”
“그래, 그러니까 같이 쉬다 가자고. 나 눕는다?”
대충 부츠를 벗고 소파에 드러눕자 카렌이 황당한 눈길로 쳐다봐왔다.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안 누울 거야? 이상한 부탁도 아니고, 길드의 귀빈이 이렇게 간곡히 요청하는데.”
“약았어 정말... 처음 봤을 땐 안 이랬는데...”
“다 너 쉬는 시간 챙겨주려고 그러는 거지. 알잖아? 어차피 업무야 다른 접수원들이 하면 되잖아.”
“.....”
카렌이 한숨을 내쉬더니 구두를 벗고 소파에 누웠다. 입으론 툴툴거리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걸로 보아 내심 고마운 모양. 카렌은 가만히 놔두면 홀로 무리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카렌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지...’
말톤은 모험가가 된 후에 만났고, 아리엘은 친구라기보단 은인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녀한테라면 물어도 되지 않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저... 카렌, 나 물을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만약 삶이 반복되고...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처음이 아니라면 너는 어떡할 거야?”
“...그거 넌센스 퀴즈 같은 거야?”
“아니, 그냥 그렇다면 말이야. 갑자기 궁금해져서.”
“.....”
카렌은 뚫어져라 날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똑같아.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으니까.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에 얽매여 현재에 소홀할 필요가 있겠어?”
“.....”
참 너답네.
나는 미소지으며 솔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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