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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302화 (302/375)

〈 302화 〉 채비 #3

* * *

[302] 채비 #3

“그럼... 내일 바로 던전으로 떠나는 거야?”

“그래, 확인해봐야 할 게 있거든. 니아 님도 이제 복귀해야 하고. ...그러면 내 랭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뭘 어떻게 되긴 돼. 여전히 F랭크지. 조만간 이번 공로가 반영되긴 할 텐데 그것도 네가 베라스틴에 돌아와서 새로 모험가 패를 발급받았을 때 얘기고.”

“그럼 또 당분간 F랭크인가...”

난 대체 언제쯤 밑바닥 모험가 신세에서 벗어나는 걸까.

전산화는커녕 종이조차 값진 세계라 불편함이 많다. 안건도 안건이다 보니 행정 처리에 시간이 걸리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이제 돌킨을 만나러 가 봐야 하는 바, 잠결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며 응접실을 나서던 도중 문뜩 그녀에게 전해주려던 물건이 떠올랐다.

품속을 뒤져 자그마한 봉투를 꺼내 건네자 카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뭐야?”

“저택 열쇠랑 초콜릿. 받아.”

“저택 열쇠...? 그걸 왜 나한테... 초콜...릿? 은 또 뭐고.”

“음... 일단 먹어봐, 맛있어. 열쇠는 우리가 집을 비울 동안에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아리엘이 말하면 알 거라던데?”

“아... 응, 걔가 신전 업무 때문에 파견을 나갈 때면 가끔 내가 대신 맡아주곤 했거든. 그럼 언제 돌아올 거야?”

“글쎄... 우리도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기약은 못 하겠네... 아, 그리고 옮길 짐이 있으면 오늘 밤에 미리 옮겨놔. 도와줄게.”

“고마워. 그럼 이참에 아리엘하고도 미리 작별해두면 되겠다. 당분간 또 못 볼 테니까.”

카렌이 웃으며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그녀는 날 뒤따라 응접실을 나오며 초콜릿을 한입 베어물더니­

“뭐, 뭐야 이거...?! 새까만데 엄청 달아!!”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네. 피로를 회복해주고 기분을 좋게 해준대.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음... 진짜 맛있다! 단 건 정말 오랜만... 어, 어...? 너 방금 뭐라고...”

“피로 회복?”

“아,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직접 만든 거?”

“아...”

카렌은 나와 초콜릿을 멍하니 번갈아 보는가 싶더니­

“───!!!”

돌연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격침되었다.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 신음하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 뭐야...! 너 왜 그래...?”

“.....”

“...혹시 부끄러워서?”

“....”

“야, 뭐 겨우 이런 걸로 수줍어하고 그래. 나까지 이상해지잖아.”

고작 먹을 거 가지고...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손목을 잡아당기며 재촉해도 봤지만, 카렌은 여전히 쪼그리고 있을 뿐.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끙끙대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샘솟았다.

슬쩍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양손으로 허리를 쿡 찌르자­

“꺄으으읍?!!”

카렌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떡 뛰어올랐다.

활어처럼 생동감 넘치는 반응에 감탄하며 물러나자 카렌이 날 죽일 듯이 노려봐왔다.

“야... 도란 너...!!”

“왜, 분해? 분하면...”

“너 죽었어!!! 일로 와!!”

“어디 한번 잡아볼 수 있으면 잡아...! 윽?!”

­턱!

길길이 날뛰는 카렌을 피해 응접실을 뛰어다니던 중, 발이 접질렸다.

오면서 울퉁불퉁한 지붕 위를 뛰어다녔던 것이 요인했던 모양.

우당탕 마룻바닥 위로 엎어지자 그녀는 날쌔게 내 복부 위로 올라타 멱살을 붙들고 끌어올리더니­

“...각오는 됐겠지 도란.”

“자, 잠깐...! 방금은 내가 좀 심했...!!”

“문답 무용! 오늘 제대로 한 번...!”

그때였다.

­벌컥!!!

“카렌!! 여기 있나?! 도란 군이 길드에 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

돌연 응접실 문이 열리고 부 길드장이 들어오더니 사이좋게 겹쳐 있는 나와 카렌을 보고 멈칫했다.

이내 그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천천히 문을 닫으며...

“커흠흠... 실례했네. 불청객은 바로 물러날 테니 하던 일 마저 보시게.”

““.....””

­철컥.

노인이 물러나고 나자 응접실에 깊은 침묵이 내리깔렸다.

말없이 카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끼익..

“아, 그리고 카렌 자네는 오늘, 아니 내일까지 공가로 쳐줄 테니 느긋하게... 이크!”

“꺼져 이 노친네야!!!”

­쾅!!

카렌이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자 황급히 도로 문이 닫혔다.

나는 콕 찌르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빨개진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일단 대화로 해결할까?”

“.....”

*

어색한 공기가 응접실을 휩쓴 뒤, 나는 실내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이네... 카렌, 이대로 냅둬도 괜찮은 거야?”

“.....”

“카렌?”

“몰라!”

카렌이 획 고개를 돌리더니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영감탱이 영주성 때부터 계속 저런 식이야. 자꾸 나한테 너 꼬시라고 치근거려서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왜, 길드 옮길까 봐?”

“그래.”

“...안 옮긴다니까 그러네.”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이적할 필요가.

더군다나 과거부터 그랬듯 앞으로도 내 담당 접수원은 카렌 한 명뿐이다.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자 그녀가 째려보며 읊조렸다.

“...뭐, 내가 정말로 널 꼬시기라도 할 줄 알아?”

“아니.”

“그래, 절대 그럴 일 없거든? 만에 하나라도 절대 없으니 기대하지 마.”

“...그건 좀 아쉬운데.”

“뭐, 뭐...? 너 그거 무슨 뜻...”

“왜, 아쉽잖아. 너처럼 예쁘고 성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라디랑 아리엘하고 사귀지만 않았어도 너한테 푹 빠졌을걸?”

“읏... 으...”

카렌은 재차 얼굴을 붉히는가 싶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내 등을 응접실 바깥으로 떠밀며 중얼거렸다.

“...이런 무자각 둔탱이를 떠맡은 내가 잘못이지.”

“무자각...? 나 말이야?”

“그래 이 멍청아. 이제 볼일 다 봤으면 빨리 돌아가. 괜히 또 소란 벌이지 말고.”

카렌이 더더욱 팔에 힘을 실었다. 방을 빠져나온 후로는 내 손목을 잡아끌며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등쌀에 못 이겨 길드 로비로 나오자 나는 한 가지 간과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드, 드디어 나왔다...!”

“저 두 사람... 정확히 두 시간이나 응접실에 있었어... 대체 뭘 했길래...”

“항상 단정한 카렌도 미세하게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고...”

“도란 님도 옷자락이 접혀 있어요...!”

“연인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나봐... 어쩌면 내연 관계일 수도...”

웅성웅성. 속닥속닥.

응접실에서 나오고 보니 주위의 시선이 달라져 있다.

개중에는 나와 카렌을 곁눈질하며 뺨을 붉히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자 엄베르크가 총대를 메고 다가와 조심조심 물었다.

“저... 도란 님, 혹시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응접실 안에서 무얼 하다 나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

나는 힐끗 카렌을 돌아보고는...

“그냥 잠만 잤어.”

“뭐, 뭣...! 자다니... 서, 설마 두 분이서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카렌!”

“으, 으응?”

“이따가 밤에 데리러 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뭐, 뭐...? 야!! 너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

“오해?”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인데 오해랄 것까지야.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나왔다. 어째선지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지만, 나머지는 카렌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끼익...

‘날씨 한번 좋네..’

스윙도어를 젖히고 나오자 쾌청한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슬슬 저녁 시간에 가까워진 가도는 오전에 비해 한결 한산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거나 찬거리를 들고 자가로 향했다.

행인 사이에 녹아들어 판잣집과 빈민 시설이 몰려 있는 남쪽 구획으로 향하자 점차 주변 풍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반듯했던 포장 대로는 점차 좁아지고 경계선이 흐릿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종적을 감추었고, 건물들은 낡고 층수가 낮아졌으며,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에도 꼬질꼬질한 때가 묻어나왔다.

그렇게 계속 걷자 저만치 푸른 외장재를 써 멀리서도 눈에 띄는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서 안디라 님과 만났었지...’

그때 목도했던 비현실적인 마물들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아직도 꿈을 꾸는 듯하다.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경비가 지키고 선 정문을 눈짓만으로 통과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일렬로 나열한 돌킨과 그의 하인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맞이해왔다.

“그간 평온하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으리.”

“...그러니까 이런 대접은 필요 없대도.”

내가 올 방문할 때까지 계속 대기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메이드와 집사 행렬을 바라보며 침음했지만, 돌킨은 대수롭지 않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베라스틴의 영웅이자 제 생명의 은인이신 나리를 맞이하기 위해선 당연한 절차입니다. 그럼 바로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괜히 또 대접한다고 이상한 짓 꾸미지 말고 시간도 늦었으니까 빨리빨리 끝내자. 어떻게 됐어?”

“옛! 우선 영주성으로 팔려갔던 노예 중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다시 사들였습니다! 또한 다른 노예상과의 조정하에 이번에야말로 베라스틴 재건 작업을 수행 중입니다. 주로 공사 현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이번에 영주성이 요구했던 노예 중에는 육체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노예도 있다며. 예를 들어 어린이라던가... 걔네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거야?”

“아닙니다! 보통 여성이나 어린 노예는 키론 경의 유산으로 임시 운행되는 무료 급식소에서 배식하는 역할을 맡거나 환경 미화 등에 할당해두었습니다! 육체 능력에 걸맞은 노동 환경을 적용하고자 노력 중입니다!”

“잘했네. 수완이 제법인데?”

“과찬입니다! 전부 나으리 덕분입니다!”

돌킨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잘한 대화를 나누며 실내를 거닐다 보니 그는 날 남쪽 지구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로 안내했다. 이후로도 메이드들이 가져다준 고급 홍차를 음미하며 사건의 경과를 보고받던 도중 문뜩 한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문을 뗐다.

“...아, 그리고 미안하다.”

“예, 예...? 왜 나리가 갑자기 사과를...”

“아니 그때 네가 영주성에 팔려 간 노예 중에 심복을 심어뒀다고 했잖아. 영주의 동향을 감시하고 묘인족 소녀의 상태를 보고해주던 노예 말이야. 그동안 전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네... 혹시 회수했다던 노예 중에 섞여 있지는 않았지?”

“아...”

돌킨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이후로도 소식이 없는 걸 보니 그곳에서 전사한 모양입니다... 상당히 충직한 사내였는데...”

“...그렇다면 인상착의라도 알려줄 수 있겠어? 어쩌면 내가 쓰러뜨렸던 감염체 중에 있었을지도 몰라. 적어도 사인은 알아야 하니까.”

“예... 나이는 스무 살 중반 즈음이었고, 키는 나리보다 주먹 하나 작은 정도로 조금 큰 편입니다. 그리고... 몸집은 다부지고, 갈색 곱슬머리에, 말끝마다 악센트를 주는 독특한 억양이 특징이었습니다.”

“...미안, 전혀 모르겠다. 그땐 나도 싸우느라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상세하게는...”

“예, 이해합니다. 비록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그 아이의 장례는 후하게 치러줄 예정입니다.”

“그래... 뭔가 좀 씁쓸하네...”

“아, 그리고 그 노예에게 특징이랄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

시선으로 묻자 돌킨은 제 앞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왼쪽 팔에 커다란 문신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달고 살았다고 들었는데... 분명 심장과 단검을 묘사한 그림이었을 겁니다.”

“심장과 단검이라... 심장과 단검... 자, 잠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멱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네가 봤던 그 단검...! 혹시 날이 톱날이었어?!”

“예, 옛...?! 아, 아마 맞을 겁니다...! 날이 삐죽삐죽했으니... 저, 저도 오래전에 본 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왜, 왜 그러십니까...?!”

“제길...”

심장에 톱날 단검 문신이면 붉은 매 길드가 추격하고 있다던 그 세력이 아니던가.

나와도 질긴 악연이 있는.

“젠장... 어쩌면 그 노예는 지금쯤 어딘가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문신이 왜...”

“...아무것도 아니야. 넌 몰라도 돼. 혹시 네 가게의 다른 노예 중에 같은 문신을 지닌 사람이 있어?”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한은...”

“그래, 앞으로도 비슷한 문신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거든 나한테 보고해줘. 위험하니까 티 내거나 가까이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돌킨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도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문신이라고 하니까 나도 생각나는 게 있는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쇼 나으리.”

“실비, 그러니까 고양이 수인 목덜미에 무슨 달 문양 같은 게 있던데 혹시 아는 거 있어? 자국이 선명한 걸로 봐서 최근에 생겨난 것 같...”

­쾅!!!

찰나, 돌킨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엎질러진 홍차에 당황하며 올려다보자 이번엔 역으로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다, 달 문양 말입니까?!!”

“으, 으응...”

“혹시 그 문양이 만월이었습니까 아니면 초승달이었습니까?!!”

“...나도 확실하지는 않은데 보자마자 달인 걸 깨달았으니 초승달이 아닐까? 보름달이면 다른 착각할 거리가 많잖아. 해라던가 그냥 동그라미라던가...”

“지, 지금 바로 그 아이를 불러 주십시오!! 당장!!!”

다급한 돌킨의 음성이 테라스에 울려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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