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03화 (303/375)

〈 303화 〉 채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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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채비 #4

시종을 보낸 지 삼십 분도 안 되어 라디가 실비를 데리고 도착했다.

라디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더니 무릎을 짚으며 말했다.

“흐읏... 흐... 도, 도란님 실비를 급하게 찾으셨다고...”

“그래, 설명은 나중에 할게. 일단 이쪽으로 와줄 수 있겠어?”

“네.. 잠시만...!”

녀석이 실비의 손목을 잡아끌며 다가왔다.

그녀들을 데리고 노예 거래소를 가로지르다 보니 복도를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하는 돌킨이 보였다.

그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다급하게 채근했다.

“이쪽입니다...! 서두르시죠!”

“그래.”

“.....”

뒤따라붙는 시선에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돌킨이 한 방문 앞에서 멈춰섰다.

그가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실내를 밝히자 구속구 달린 침상, 한쪽 벽면을 빼곡히 차지한 수술 도구, 혈흔으로 추정되는 거무튀튀한 얼룩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실비가 주춤하며 물러나자 나는 돌킨의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야, 야. 혹시 다른 장소 없어? 애가 겁먹잖아.”

“사후 처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절대로 소녀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약속하겠습니다.”

“...알았어. 실비야, 잠시만 믿고 따라 줄 수 있겠어?”

“....”

실비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마지못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녀석을 침상 위에 눕히고 옆을 돌아보게 한 뒤 돌킨이 마석등 불빛을 비추자 목덜미에 선연한 달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어제 봤을 때보다 달의 면적이 줄어든 것 같은데.

돌킨이 문양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그믐달 형태...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군요... 만일 이대로 오늘 밤을 넘겼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입니다.”

“그래, 십년감수했네...”

“자, 잠깐...!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요? 이 문양은 또 뭐고... 끔찍한 일이라니...”

“그건 이제부터 돌킨이 설명해 줄 거야, 돌킨.”

“옛...! 라디 님, 이건 바로 원죄(??)의 낙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원죄의 낙인...?”

“그렇습니다.”

돌킨이 마석등을 옆 탁자에 내려놓더니 열심히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했다.

“이건 본디 중범죄자 중에서도 극악으로 잔학무도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고안된 주술입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지울 수 없고, 피부를 도려내도 근육 위에 다시 나타나죠. 사실상 영구 문신이라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범죄자가 받을 수 있는 최악의 형벌 중 하나라고... 죽는 순간까지 자유를 구속받고 눈을 감아도 편히 잠들 수 없다는...”

“그렇습니다. 이 낙인이 찍힌 사람은 남은 일생을 범죄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다. 문신이 있는 걸 들키면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도 제약이 따르고, 애초에 태양 아래를 돌아다니기는커녕 마석 광산이나 마탑의 실험체로 생을 마쳐야 할 운명이죠.”

“하지만 그런 흉악한 게 왜 실비의 뒷목에 있는 거죠...?”

라디가 실비를 내려다보며 침음하자 돌킨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제 예상으로는... 영주가 불법으로 새긴 게 아닐까 합니다.”

“영주... 말이에요? 하지만 왜 구태여 그런 짓을...”

“그건 바로 이 낙인이 지닌 특별한 제약 때문입니다.”

“제약...?”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 문양은 노예 증명서나 족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한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든 노예의 소유주가 극심한 고통을 가해 노예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고, 대략적인 위치를 감지하는 게 가능하죠. 더군다나 소유주가 없는 상태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사망하는 까닭에 주인을 해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주가 실비에게 이걸 새긴 이유가...!”

“예... 아마 촉수에 감염된 상태의 소녀를 제어하기 위해 새겨넣었을 겁니다.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고통을 주어 행동에 제약을 거는 식으로요. 마지막에 그가 달아났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도중에 뭔가가 잘못된 모양이지만 말입니다.”

“제어라.... 하긴, 저도 줄곧 그 점이 의문이었어요. 그렇게 강력한 괴물을 만들어낼 예정이었다면 분명 안전장치도 마련해뒀을 텐데... 잠깐, 그러면 실비는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뜻 아니에요? 영주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그게... 참 다행이면서도 마냥 안도할 수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

“이 문양을 한번 자세히 봐주시겠습니까?”

돌킨이 양해를 구하고는 살짝 실비의 뒷머리를 젖혔다.

그러자 갸름한 초승달과 그 테두리를 둘러싼 원, 팔괘처럼 주위를 수놓은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라디가 가까이 다가와 문양을 들여다보자 돌킨이 초승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길 보시면 달 내부가 비워져 외각선만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주인이 있으면 이 부분이 검게 채워집니다. 즉, 지금은 소유주가 없는 자유 노예 상태란 것이죠.”

“...영주가 현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불완전하게 낙인이 새겨진 상태에서 이 소녀가 도망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촉수가 특별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폭주 과정에서 지워졌을지도 몰라. 돌킨 너도 이제 알겠지만, 실비의 뒷배에 선 존재가 여간내기가 아니거든. 나랑 마지막에 결전을 벌일 때도 어마무시했었고.”

마지막 순간에 목도했던 칠흑의 폭풍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킨은 턱을 짚으며 난색을 표했다.

“으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리 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지만 이 낙인이 워낙에 강력한 저주여서 말이죠... 정말 해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이따가 또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래, 계속해 봐.”

“옛...! 그러면 요지는 이 그믐달인데... 아까 제가 나리께 달이 만월이었는지 초승달이었는지를 제일 먼저 물었던 게 기억나십니까? 원래는 이처럼 불완전한 모양이 아니라 주위 월륜에 꼭 들어맞는 원 형태를 띠어야 합니다. 한데 이렇게 찌그러져 있다는 건...”

“설마... 소유주가 없는 상태로 일정 기한이 지나면 죽는다고 했던 것과 관련이 있나요...?”

“정확합니다. 낙인의 주인이 사라지면 보름달에서 하현달, 하연달에서 그믐달이 되는 과정을 거쳐 점차 달의 면적이 줄어들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즉, 이건 시간의 제약을 가시화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유예 기한은 대개 사흘로 잡아두는 편이고, 공교롭게도 오늘이...”

“...사흘째네요.”

“예, 나리가 발견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이 소녀는 유명을 달리했을 겁니다.”

돌킨이 진중한 어조로 읊조렸다.

그 또한 실비가 처참하게 죽는 건 바라지 않을 터, 만약 자고 일어났더니 녀석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싸늘하게 굳어있었다고 하면 나 역시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나는 돌킨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방도는 있는 거야? 네 말대로라면 실비는 몇 시간 뒤에 죽는다는 얘기잖아. 이대로 죽게 놔둘 순 없어. 당장 해주할 수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낼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나 비용이 많이 들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낙인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는 원래 중범죄자 중에서도 죄질이 매우 극악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구속이자 형벌입니다. 저주에 매우 능통한 상위 주술사만이 구사할 수 있고, 한 번 시전하는 데도 재룟값으로 금화가 족히 수 개는 들어갑니다.”

“영주는 대체 어떻게 그런 인재까지 대동하고서... 그럼 이 저주는 아예 못 푸는 거야?”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합니다. 왕도의 궁전 마법사들이 해제 방법을 알고 있다더군요. 아니면 해주, 그러니까 잠긴 것을 여는데 아주 초월적인 재능을 지닌 존재나 신이 아니라면 정식 방법 외에 편법으로 낙인을 해체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런가...”

나는 실비의 목덜미에 난 문양을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이게 그리도 복잡하고 어려운 술식이란 말인가.

...잘만 하면 해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스무아흐레가 아닌, 사흘을 기준으로 공전하는 달. 무한과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호. 팔괘처럼 주변을 수놓은 기하학적 문양...

이 수많은 효(?) 중 양(?)을 실선으로 연결하고, 어긋난 가짜 괘(?)를 지우고, 순리에 따라 중괘(??)를 대입하면...

순간, 떠오른 영감에 뇌내의 광경을 눈앞에 투영하고 있자니ㅡ

“나으리!”

“어, 어...? 왜...”

“...부르셨는데도 대답이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미안, 뭘 좀 생각하느라. 그래서 대안은 있는 거야?”

“예, 당장 술식을 해제하는 건 무리여도 새 소유주를 등록하는 건 가능합니다.”

“소유주를 등록한다는 건...”

“나리가 이 소녀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뭐...?”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자 돌킨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측에서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술식을 덮어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새로 등록하는 것뿐이니까요. 그저 약간의 수고스러움만 감내하면 됩니다.”

“아, 아니 잠깐만...! 실비를 내 노예로 만든다고...? 그게 말이 되는 거야?”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으리 정도 재력가 중에는 노예를 안 부리는 사람이 더 드물 지경입니다. 더군다나 이대로 놔두면 이 소녀는 곧 죽을 겁니다. 이미 노예 신분이기도 하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요.”

“그, 그래도 이건 실비 의견도 들어 봐야...”

“알고 있었어요.”

“뭐...?”

“...영주가 이 낙인을 새길 때 들었어요. 저는 평생을 노예로서 꼭두각시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그, 그걸 왜 지금까지 말 안 한 거야...?”

“.....”

나는 속뜻을 읽을 수 없는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사에 달관한 듯 무덤덤한 등색 눈동자를.

아니, 어쩌면 낙인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몰랐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걸 알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을 수도 있지만.

설마 지난 사흘 동안 저자세로 나온 건 노예라는 자각이 있어서 그랬던 걸까.

지근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발 뒤로 물러나자 돌킨이 입을 열었다.

“나리가 갈등하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만... 더군다나 이 소녀는 나리처럼 흑발이지 않습니까? 홀로 길거리를 거닐다가 시비에 휘말리거나 이상한 사람이 꼬일 바엔 노예로 위장하는 편이 낫습니다. 주인이 있는 물건이란 걸 알게 되면 변상하기가 두려워서라도 건드리는 일이 줄어들 테니 말이죠.”

“...맞아요 도란님. 게다가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에요. 저도 이 낙인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들어봤거든요. 단순한 죽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끔찍한 고통을 동반한다고 해요. 인간의 존엄성 따윈 없는... 그런 최후 말이에요.”

“....제길, 알았어.”

나는 자세를 다잡고 차가운 실비의 손을 맞잡으며 고했다.

“...실비야,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내가 네 주인이 되어도 괜찮겠어? 일단은 명목상으로만 노예일 뿐 이전과 똑같이 대우하겠다고 약속할게.”

그녀는 반드시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줄 거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사흘간 유대를 쌓아왔으니.

신뢰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전하자 실비는...

­...끄덕.

“그래, 그러면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 등록하자. ...돌킨, 내가 뭘 하면 돼?”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리 오너라!!”

­끼익...

돌킨이 소리치자 방 입구에서 대기하던 한 시종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가 우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벽에 내걸린 기구 중에서 흑요석 메스와 채혈용 바늘 등 몇몇 도구를 쟁반에 골라 담자 돌킨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계약 자체는 간단합니다! 도란님의 몸에 이 낙인과 상응하는 무늬를 새기고, 소녀의 낙인에 피를 흘려넣어 서로를 연결하면 모든 절차가 끝납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그래? 생각보다 간결... 자, 잠깐...! 내 몸에 문양을 새긴다니...?! 그럼 설마 굳이 이런 방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나 때문이었어!? 실비가 아니라?!”

그럼 벽에 걸린 저 섬뜩한 도구들도...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쳐다보자 돌킨의 입꼬리에 음흉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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