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 채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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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채비 #5
“자, 잠깐...!”
돌킨이 물 흐르듯이 날 침상으로 이끌더니 구속구를 채웠다.
옴짝달싹조차 못 할 정도로 단단하게 사지를 옥죄여오는 가죽끈, 얼음송곳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운 바늘, 침상 시트에 흥건한 피의 흔적 따위를 목도하며 맹렬히 몸부림치자 돌킨이 넉살스럽게 말했다.
“에이 뭐~ 나리처럼 용맹한 전사가 고작 이 정도 일에 겁먹을 리가 있겠습니까. 걱정 말고 맡겨 주십쇼! 저와 제 시종 모두 이런 시술엔 이골이 나 있습니다!”
“...너 평소에 나한테 쌓인 거 많았냐?”
“에이, 그럴 리가요. 그럼 옛말에 유니콘 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바로 수술에 들어가겠습니다! 문양 위치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보통 오른손잡이는 왼쪽 손등에 많이들 새기는 편입니다!”
“그럼 나도 그렇게... 아니, 이런 건 보통 안 보이는 곳에다가 새기는 게 나으려나...? 라디 넌 어떻게 생각해?”
“음... 그러네요. 원래 손등에 새기는 건 유사시에 저주를 쉽게 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 텐데.. 저희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게다가 낙인의 존재가 드러나면 실비가 곤란...”
“괜찮아요.”
“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다가 하셔도 괜찮아요.”
“그, 그래...? 그러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돌킨과 그의 시종이 시선을 교환했다.
돌킨이 마석등을 천장의 고리에 걸어 고정하자 시종은 화선지처럼 얇은 갈대의 속껍질에 실비의 낙인을 본떠 탁본을 제작하더니 여러 겹으로 겹쳐 문양을 재구성하고 획을 추가했다.
의아하게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자니 돌킨이 첨언했다.
“이건 나리의 손등에 새길 문양을 정하고 있는 겁니다.”
“뭐...? 실비랑 같은 무늬 아니었어?”
“설마요. 나으리께 원죄의 낙인을 세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노예의 소유주 쪽은 주인이란 걸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다른 문양을 새겨넣습니다. ...아, 작업이 끝난 모양이군요.”
시종이 탁본을 갈무리하더니 내 손등에 신중하게 도안을 그려넣었다.
한데 도안 작성을 끝마친 뒤, 아무런 추가 조치 없이 그가 마석이 부착된 날카로운 바늘을 집어들자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외쳤다.
“자, 자..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니 그 뭐... 없는 거야? 마취제라던가...”
“마취제 말입니까?”
“그래.”
“...그야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시종과 돌킨이 서로를 빤히 마주보았다.
잠시 난처한 공기가 흐르는가 싶더니 돌킨이 머리칼을 긁적이며 답했다.
“마취제로 쓸 수 있는 약초가 있긴 하지만, 치료원에서 사용하는 양품을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품질도 고르지 못해 약발이 얼마나 들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극단적으로 아예 약효가 안 듣거나 신체 일부분이 반년쯤 마비될 수도...”
“염병... 왜 제대로 구비해놓지 않은 거야.”
“아무래도 불법 시술이다 보니 말이죠... 모험가 의뢰를 통해 채집한 약초는 길드를 통해 아가사 치료원과 군사 시설에 우선 납품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베라스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 전시에 긴급하게 필요한 약초들의 수요가 급증했고요.”
“결국 다 영주 때문이란 거네. 그 썩을 새끼...”
꼽등이 속의 연가시처럼 사로잡히고 나서도 꾸역꾸역 성가시게 굴 줄이야.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저주했다. 역시 위에서 단추가 한번 잘못 꿰이면 아래가 고생하는 건 세계 공통인가 보다.
그런데...
“...왜 라디야, 혹시 할 말 있어?”
“.....”
어쩐지 꼬리를 달싹이는 라디에게 묻자 녀석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저한테도 마취제가 있긴 한데...”
“오 진짜?! 하긴 이쪽은 네 전문 분야였지! 역시 준비성 하나는 진짜 끝내주...”
“대신 꼬... 그, 그게... 죽어버려요.”
“음...?”
나는 웃는 얼굴 그대도 얼어붙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서, 설마 성 기능에 장애가 생긴다거나 하는 건...”
“.....”
“지, 진짜야...?”
“...네. 대신 영구 지속은 아니고 한 이 주 정도...”
“성 기능 장애가...?”
“예... 그러니까 그... 발기부전이...”
“.....”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관우와 화타의 설화를 떠올리며 뼈를 깎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건 안 돼. 조금만 참으면 아리엘한테 치유받을 수 있는데 고작 그거 못 견디겠다고 이 주나 성생활을 포기하는 건...!”
“잘 생각했어요. 저도 곁에서 응원해드릴 테니까...”
“그래, 그럼...”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과 돌킨이 성큼 다가왔다.
돌킨이 손바닥을 맞비비며 외쳤다.
“자자 그럼 후딱 끝낼 테니 조금만 참으십쇼! 조금 아플 수도 있습니다!”
“...너 나한테 앙심 품은 거 있지. 솔직하게 말해봐. 안 때릴 테니까.”
“....”
“안 때린다니까?”
“이처럼 합법적으로 조질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크흐흠!!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야, 야!! 너 방금 뭐라 했어!! 당장 이거 풀지 못해?!! 넌 뒤졌─ 크윽?!!”
찰나, 손등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시종이 침으로 내 손등을 찌른 것.
바늘처럼 날카로운 첨단이 살갗을 파고들자 호저에게 찔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연달아 치미는 통증에 진땀을 흘리며 터져나오는 비명을 틀어막자, 돌킨이 수건으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느긋하게 설명했다.
“이는 자문(?文) 기법이라 하여 바늘을 먹에 적시고 찔러서 시술하는 방식입니다. 몸에 상처를 내고 그 안에 잉크를 흘려넣으면 새 살이 돋아나는 과정에서 색소가 잔류하는 원리를 이용한 거죠! 원래는 편의성을 위해 피부에 먼저 먹을 바르고 행하는 편이지만, 신중함을 위해 나리께는 특별히...”
“자문이고 음문이고 나발이고 빨리 끝내!! 너 일부러 천천히 하는 거지?!!”
“하하, 그럴 리가요. 이렇게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할수록 소녀와의 감도가 올라갑니다.”
“내가 실비랑 감도가 올라가서 뭐 한다는 건데?!”
“그거야 뭐...”
돌킨이 허리를 펴더니 검지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우선, 낙인으로 훈육할 때 더욱 선명한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도시를 건설할 때 수로가 정교하게 설계될수록 물이 잘 흐르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저도 원죄의 낙인은 다뤄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사용법에 능숙해지면 고통의 강도도 조절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말했잖아...! 나는 실비한테 고통을 가할... 생각이 없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두 번째 기능으로 소녀의 위치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원래는 도망친 노예를 추격하기 위한 기능이지만 나리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예컨대 던전에서 갈라져서 마물을 사냥하던 중 합류를 편히 한다던가...”
“...그 위치 감지라는 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거야?”
어디 스크린에 위치가 표시되는 것도 아닐 텐데...
미심쩍게 묻자 돌킨이 도안을 들어올리더니 달 주변의 팔괘 문양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 이 무늬 중 하나가 미약하게 따끔거린다고 합니다. 바로 그 문양이 가리키는 방향에 소녀가 있는 것이죠! 비록 지형의 높낮이나 거리까지 확실하게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나름 유용할 겁니다.”
“확실히... 그건 좀 쓸 만하겠네.”
“넷! 그리고 마지막 대망의 세 번째인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더니 가까이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성적인 접촉을 할 때 노예가 나리의 손길을 더욱 민감하게 느낄 겁니다.”
“뭐, 뭣...?!!”
“그렇습니다! 원래 제일 쓸모없는 기능인데 나리님은 유용하게 쓰실 것 같군요! 낙인의 본디 목적 중 하나는 고통을 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선명히 고통을 전이할 수 있도록 설계하다 보니 다른 감각도 일부분 덩달아 같이 증폭되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 크윽?!”
푸욱!
순간, 바늘이 손등을 깊숙이 파고들자 눈앞이 새하얘졌다.
지구에 비하면 금속 성형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침이 두꺼울뿐더러, 모종의 마법 처리를 하는지 침 상단부에 부착된 마석에서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탓에 도무지 태연하게 견딜 수가 없다.
모험가로 구르며 아무리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한들 고통 자체의 경감보다는 참는 법에 조금 더 능통해지는 것뿐, 심지어 전투 시 발생하는 아드레날린도 없이 생짜로 통증을 감내하자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구속구 탓에 자세를 변경하지도 못하고 피로 흥건해진 팔걸이 위에서 손가락만 쥐락펴락하고 있자니 라디가 반대편 손을 붙잡은 채 측은한 눈길로 올려다봐왔다.
“그... 오늘 집에 가서 잔뜩 위로해드릴게요.”
“윽... 그, 그래..”
“저랑 언니 말고도 도란 님이 원하신다면 니아 님까지 부를 테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니아랑은 그런 사이 아니래도...”
고통에 점철되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와중, 필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여 변호했다.
한데 이번엔 라디의 반대쪽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응...?”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저 타인일 뿐인데...”
“....”
나는 실비를 돌아보고는 힘겹게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너처럼 이쁘장한 노예를 부려 먹으려면 이 정도쯤은 각오해야지.”
“.....”
“농담이야. 내가 왜 그렇게 너를 구하려 하는지는... 아마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고대 유적에 들르면 많은 게 판가름 날 테니까.
온화한 눈길로 그리 고하자 실비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줄곧 유지하던 무표정의 가면을 살짝 깨트리며.
그렇게 조금 더 인내하자
“...끝났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으리!! 곧바로 구속구를 풀어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 소녀의 낙인에 나리의 혈흔으로 지장을 찍어넣기만 하면 모든 절차가 완료됩니다!!”
“젠장... 돌킨 너... 나중에 두고 봐.”
“옛! 불평이라면 이후에 듣겠습니다!”
돌킨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수건으로 먹과 혈흔을 말끔히 닦아내고 자리를 정리하더니 내 등 뒤에 베개를 받쳐 쉬이 상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 돌킨을 힐끗 째려보고는 여전히 얼얼한 손등을 내려다보니 그곳엔─
‘태양...?’
기하학적 문양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흑백의 태양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매우 섬세하고 뛰어난 선명도에 내심 놀라고 있자니 돌킨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결과는 마음에 드십니까? 원래는 금을 녹인 물로 시술하고 싶었지만 부득이하게 지금은 재료가 없어서... 원하신다면 나중에 다시 성형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금을 입혀서 금태양 어떠십니까?”
“시끄러워.”
그런 걸 한 번 더 감내하느니 이대로 살고 말지.
“...아쉽군요. 그렇다면 이제 이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따서 소녀의 낙인에 지장을 찍어주십시오. 이후 경과도 확인해야 하니 서두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래. ...실비야 혹시 가까이 다가와 줄 수 있겠어? 내가 지금 움직이기가 조금 힘들어서...”
“.....”
실비가 말없이 내 침상으로 다가와 뒤돌았다.
바늘로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녀석이 걷어준 뒷머리 사이로 목덜미에 지장을 찍자ㅡ
후끈!
‘윽...?’
순간 화염 마법이 착탄한 것처럼 뜨거운 바람이 전신을 휩쓸었다.
생소한 감각에 당황하자 돌킨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것으로 모든 계약이 끝났습니다. 이제 묘인족 수인 실비는 나리의 노예이자 소유물이며, 나으리는 실비의 주인이자 태양 낙인의 소유자가 되셨습니다. 이는 저 돌킨의 공증 하에 문서로 만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정말 이게 끝이야?”
“그렇습니다. 혹시 별다른 느낌은 없으십니까? 소녀와 연결된 기분이 든다던가... 몸 한구석이 아프다던가...”
“글쎄 그런 건 없는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몸의 이상을 점검하고 있자니 날 빤히 응시하던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실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자 나는 멋쩍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 일단 계약상으로는 노예.. 복잡한 관계가 됐지만 나는 동등한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냥 이전처럼 대해줬으면 좋겠어.”
“.....”
“잘 부탁해 실비야.”
웃으며 고하자 실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폭탄 선언을 내뱉으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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