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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305화 (305/375)

〈 305화 〉 채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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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채비 #6

“이 정도 경과를 확인했으면 이제 돌아가셔도 될 겁니다! 다만 감염되지 않도록 자택에 도착해서 치료받기 전까지는 외부 활동을 삼가십시오. 원래라면 약 2주 동안 꾸준히 연고를 도포하고 물과의 접촉을 피해야 하지만 아리엘 사제님의 권능이라면 바로 일상으로 복귀하셔도 될 겁니다.”

“그래, 아으 따가워... 그러고 보니 혹시 다른 유의사항 있어?”

“유의사항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문양이 실비와 날 연결해준다고 했잖아. 혹시 다른 효과나 부작용도 있나 해서. 예를 들어 생각이 전해진다던가, 감정을 공유한다거나...”

“으음... 문양을 손보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들어본 바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손등에 난 문양을 들여다봤다. 일단 겉보기로는 특별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데...

돌킨이 전에 말한 대로 정신을 집중해도 봤지만, 워낙 통증이 심해 위치를 가늠하기는커녕 돌아버릴 지경이다.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스며나오는 진물을 닦아내자 돌킨이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 그리고 나리님께 드릴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선물? 뭔데, 혹시 또 뭐 이상한 거면...”

“그럴 리가요. 이걸 좀 봐주시겠습니까?”

“....?”

그가 고급스러운 비단 보자기를 상 위에 풀었다.

천이 부드럽게 끌러지자 내 눈에 들어온 건...

“메이드복...?”

검은색과 흰색 프릴의 조화. 소매와 분리된 커프스와 카츄사. 묘한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가터벨트.

빅토리아 시대에 실존했던 실용적인 디자인이라기보단 저번에 라디와 아리엘에게 입힐 용도로 받아왔던 것처럼 노출이 많이 들어간 타입. 다만 속살이 비칠 정도로 얇은 원단을 사용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그럭저럭 코스프레 의상으로 봐줄 수 있는 수준이다.

내 기준으로는 여전히 떳떳하게 바라볼 수 없었지만.

돌킨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자고로 고용인은 고용인다운 복장을 입어야만 하는 법이지요. 저번에 나리가 소녀를 보살펴 달라고 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의상 제작을 의뢰해두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 뭐... 그야 따지자면 마음에 들긴 하지만...”

실비가 라디로부터 빌려 입었던 메이드복은 사이즈가 맞지 않아 가슴 쪽이 헐렁했으니까.

허나...

“...그래도 당사자가 희망해야 입든지 말든지 하지. 이거 꽤 비싸다며? 만약 실비가 안 입으려 하면 어쩌려고 그래.”

영주성에서 탈출한 직후라 선택권이 없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제는 입을 옷이 넘쳐나니까.

돌킨이 손바닥을 맞비비며 말했다.

“하지만 굉장히 기대되시지 않습니까? 분명 잘 어울릴 겁니다!”

“그건 맞지만... 어제 잠깐 입은 모습을 봤는데 엄청 이뻤거든..”

­솔깃.

‘응...?’

불쑥 느껴진 기척에 옆을 돌아보자 어느새 내 주위로 다가온 실비가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일단 보따리를 덮고 물러나려는 차, 돌킨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아래쪽에 다른 것도 넣어두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 뭐가 있어?”

“다른 타입의 메이드복 말입니다...! 분명 밤 시중을 들 때 유용하게...”

“필요 없거든?”

나는 실비를 보호의 대상일 뿐, 그런 눈으로는 보고 있지 않으니까.

이미 라디와 아리엘이 있고, 아직은 조금 애매하지만 니아도 있으니.

어째 점점 대상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크흠... 그럼 우리는 이제 가볼게.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고,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던전으로 연락하고.”

“옙!!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나으리를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쇼!”

“그래.”

손을 흔들어주고 응접실을 나섰다.

수많은 메이드와 집사에게 깍듯한 배웅을 받으며 노예 거래소를 벗어나자 어느새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해가 보였다.

따스한 주홍빛 저녁놀을 뒤집어쓰고 남쪽 가도를 거닐고 있자니 라디가 내 손등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이 문양이 실비하고 이어져 있다니... 혹시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지는 않으세요? 가슴이 두근거린다던가...”

“아니, 그냥 겁나 아파.”

“하기야... 그래도 뭔가 오묘하네요. 왠지 문신 동료가 늘어난 듯한 기분이라... 그 왜, 저도 뺨에 타투가 있잖아요. 타투라기엔 특수 페인트라 원하면 지울 수는 있지만...”

라디가 내 손을 볼에 비비더니 행복한 듯 배시시 미소지었다.

나는 석양이 아름답게 수놓은 그녀의 붉은 문양을 홀린 듯이 어루만졌다. 애정 담긴 푸른 시선을 마주하고, 다가가 입을 맞추며 깍지를 꼈다.

밀착하며 입술의 부드러움을 느끼고, 비강을 적시는 달콤한 향기에 매료되고, 서로를 더욱 끌어안아 온기를 나누고 나면 살결을 타고 전해지는 고동. 빨라지는 맥박.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연인의 키스를 마치자 라디가 까치발을 내리며 아쉬움 어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왠지 그립네요. 풋풋하던 연애 초기로 되돌아간 것 같아서.”

“지금도 그렇잖아. 난 매일 아침 함께 일어날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데 라디 넌 안 그래?”

“저도 당연히 설레죠. 지금도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리는데... 그래도 이젠 그때에 비해 한결 여유로워졌잖아요. ...애도 생겼고.”

“애...? 뭐, 뭐야...! 너 혹시 임신했어?!!”

최근 이것저것 물불 장소 안 가리고 해대긴 했지만 설마...!

허둥지둥하며 소리치자 라디가 주위 행인을 의식하더니 내 볼살을 꾸욱 잡아당기며 말했다.

“...란이 말이에요 란이. 아기라기보단 늦둥이 동생이 생긴 느낌에 더 가깝지만... 왜요, 애 가지고 싶어요?”

“으으 그허히 하히만...”

라디가 슬쩍 손을 놓자 나는 겸연쩍게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안 가지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조금 시기상조 같아. 아기를 가지는 건 아리엘의 고향에서 장인어른을 만나고, 교회에서 정식으로 혼인 신고도 하고, 이 세계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난 후에 해도 충분하니까. 그 왜... 난 아직 서류상으론 F랭크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굳이 성급하게 굴 필요도 없고... 뭐, 그래도 만약 도란님이 원한다면..”

“....?”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라디는 입가에 선정적인 미소를 머금고 꼬리로 상의 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더니ㅡ

“언제든지 임신해드릴 수 있어요.”

“....!!”

야릇한 음성, 당당하면서도 살짝 수줍은 뺨, 자그마한 체구에 맞물려 몹시도 배덕적인 모습에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들자­

“안 돼요. 지금은 밖이잖아요. 던전처럼 사람이 없으면 또 몰라도...”

“...요 앞에서 대실할까?”

“아뇨, 집이 코앞인데... 빨리 언니한테 가서 치유받아요. 그래야 뭘 하든가 하죠. 그리고...”

라디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리자 실비가 한 발자국 뒤에서 충격에 빠진 채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채로도 경악할 수 있었구나.

나는 짐짓 헛기침하며 말했다.

“미안, 못 볼 꼴을 보였네. 난처했지?”

“아, 아...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이서 즐기시길...”

“괜찮아. 이제 다 끝났거든. 그리고 같이 갈 데가 있는데 잠깐 따라올래?”

“....?”

실비의 꼬리가 물음표처럼 휘었다.

*

땅거미가 드리운 건물, 구불구불한 골목길, 을씨년스러운 폐가와 무너진 담벼락.

비좁고 어지러운 골목 사이, 캄캄한 고샅길을 거닐자 초현실주의 화풍처럼 기울어져 가는 건물들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거대한 마물의 아가리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광경에 라디와 실비가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억을 되짚으며 조용히 앞서나가고 있자니 참다못한 라디가 입을 열었다.

“저... 도란님...?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

“어디로 가는지 좀...”

“잠깐만... 거의 기억 날 것 같아.”

“....”

계속해서 골목길을 헤매자 라디가 날 빤히 올려다보더니 살며시 실비의 팔을 붙들었다.

“설마 그런 거였어요...?”

“응?”

“아무리 그래도 너무 욕망에 충실한 거 아녜요? 실비를 노예로 만들자마자 바로 골목길에서 덮칠 심산이라니...”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게 아니면 이렇게 깊숙이 올 필요가...”

­딱콩!

“...그런 거 아니거든.”

가볍게 라디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주었다. 안 그래도 실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텐데 여기에 불안을 가중해서 어쩌자는 건가.

억울한 듯 이마를 부여잡고 뒤따라오는 라디를 다독이며 나아가다 보니 목표했던 장소가 나왔다.

자그마한 등불이 내걸린 문을 조심스레 밀어젖히자­

­딸랑...

“음...? 이런 시간에 손님이...? 이제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인데...”

“안녕하세요 론디니움 영감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자, 자네는?!”

실내에 전시된 무구를 닦으며 마감 준비를 하던 드워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았다.

그가 내 머리칼을 손가락질하더니 건물이 떠나가라 외쳤다.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베라스틴 화젯거리의 중심 아니던가! 내 대장간에서 무기를 맞춰 갔던...! 그때 그 코볼트 발톱으로 만든 단검은 여전히 잘 쓰고 있나? 각반이랑 건틀릿은?!”

“덕분에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코볼트 단검은 이전에 이교도랑 싸우면서 화염에 녹아버렸지만요... 그나저나 투구 없이 방문한 건 처음인데 용케 알아보시네요?”

“옛끼!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가 처음 단검 제작을 의뢰할 때 모험가 패도 같이 맡겼으니 말일세! F랭크가 코볼트 킹을 쓰러뜨렸다고 해서 놀랐었지. 그때 이름을 기억해두었는데 거리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리니 얼마나 반갑던지 말이네...”

“하하... 그랬군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겐가? 칼날 연마? 수리? 아니면 새로운 장비를 맞출 셈인가?”

“음... 그게...”

나는 슬쩍 실비를 돌아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제가 아니라 이 아이가 쓸 무기를 보러 왔어요. 내일이면 던전에 들어갈 예정이거든요. 무기 말고도 각반이나 팔꿈치 보호대 등 자잘한 방어구도 있으면 보고 싶고요.”

“그렇군. 이 꼬마에게... 잠깐, 꼬마가 아니라 성인인가? 내 수인족은 나이 가늠이 어려워서...”

“...성인이에요.”

“그래, 그럼 숙녀분. 혹시 희망하는 무기 유형이라도 있는가? 단검이라던가 세이버, 글라디우스, 스몰 엑스도 괜찮고... 할버드는.. 체구 때문에 무리겠구먼?”

“.....”

“...실비야, 혹시 원하는 무기 있어?”

어쩐지 난감해 보이는 기색의 실비에게 묻자 녀석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실 병기를 다뤄보는 건 처음이라서... 단검 종류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검? 단검이라... 그래, 확실히 잘 쓰겠네.”

“....?”

과거, 영주성 지하에서 목도했던 실비의 압도적인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짓자 녀석이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나는 웃음으로 무마하며 말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전투에 나서는 건 우리가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디까지나 자기방어를 위해서 구입하는 거니까. ...그러면 그쪽으로 봐주실 수 있겠어요? 얘가 날렵하니까 방어구도 움직임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쪽으로...”

“그런가... 알겠네. 마침 좋을 때 찾아왔군. 내 무깃값만 받도록 하고 방어구는 원가에... 아니, 적당한 게 있으면 그냥 공짜로 넘겨주도록 하지.”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물론이지! 곧 중심가로 가게 위치를 바꿀 셈이라서 말이야. 괜히 옮길 짐이 많으면 번거롭거든. 그때 그 저주받은 검은색 장검 기억하나? 그 마검이 사라진 뒤로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얼마나 속이 후련하던지...! 이제 그 검에 피해를 입는 사람도 사라질 테니 마음껏 손님을 맞이할 수 있네!”

“.....”

아 그거...

나는 피식 웃으며 허공에서 흑도를 소환했다.

“혹시 어르신이 말한 그 장검이 이걸 말하는 건가요?”

“허억... 헉... 그 망할 쓰레기 검!! ..그걸 어떻게 자네가 가지고 있나...?”

“뭐... 설명하자면 좀 긴데...”

나는 쿡쿡 실소를 흘리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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