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 채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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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채비 #7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그래도... 주인의 짐을 드는 건 노예의 의무라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 짐은 제 것이기도 하니...”
“정말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난 널 노예로 생각 안 한다니까?”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론디니움 대장간에서 맞춘 실비의 장비를 들고 가도를 나아가다 보니 높다란 담벼락에 둘러싸인 저택이 나왔다.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에 도착하자 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한 표범 소녀가 튀어나와 날 끌어안았다.
“소년! 기다렸잖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조금 일이 많아서요. 혹시 아리엘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리엘? 아마 침실에서 란이랑 낱말 퍼즐로 놀아주고 있었을 텐데... 지금 불러줄까? ...잠깐, 너 손등에 그게 뭐야.”
“음... 이건 다 모였을 때 한꺼번에 설명할게요. 실비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어서...”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니아가 쏜살같이 사라지더니 저택 2층에서 아리엘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리엘은 내려오자마자 내 손등을 확인하더니 나지막이 침음했다.
“태양 낙인... 왜 이런 게 도란의 손등에... 설명해줄 수 있어?”
“그래, 바로 알아보는구나? 니아 님도 와서 앉아보시겠어요?”
“...응!”
우리는 거실 안쪽으로 들어서서 다 같이 소파에 둘러앉았다.
아리엘의 치유를 받으며 어젯밤, 실비에게서 낙인을 발견했던 것부터 노예 거래소에서 있었던 일까지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하자 거실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니아가 완치된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면... 실비가 이제 소년의 노예가 되었다는 거야?”
“음... 아무래도 그렇죠. 어디까지나 서류상이지만요. 그리고 이전이랑 똑같이 대하기로 약속했으니 니아 님도 상냥하게 대우해주세요.”
“그야 당연하지! 그래도 조금 복잡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던 동생이 하루아침 만에 노예 신분이 되어버리다니... 이게 다 영주 때문이야.”
“그러게요... 빨리 적합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도란이 태양 낙인을 새긴 것도 이해가 가네... 깜짝 놀랐잖아.”
“당연하지. 내가 무턱대고 갑자기 노예를 구해 올 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아리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렇게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내일 있을 던전 탐색에 관한 서두를 꺼내려던 차
딸랑...
타닥거리는 벽난로의 소음을 뚫고 희미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의아하게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오늘 누구 오기로 했었어?”
“이 시간에 찾아올 만한 사람이면...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데요...”
“그럼 그때 그 접수원 아냐 소년? 우리가 던전에 간 사이 집을 맡아주기로 했잖아.”
“그렇지만... 카렌은 제가 직접 길드까지 마중을 나가기로 했었는데... 일단 나갔다 올 테니 다들 편하게 있어. 금방 다녀올게.”
“응,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도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소리치고.”
“그래.”
가볍게 손을 흔들며 현관으로 향했다. 대충 외투를 걸치고 저택 건물을 나서자 쌀쌀한 공기에 코가 시큰거렸다.
밤하늘에서 휘황하게 빛나는 달과 별 아래를 거닐다 보니 바지 밑단이 밤이슬로 축축하게 젖어든다.
한데...
‘저건 뭐지...?’
정원 쪽에서 거대한 형체가 움직였다.
순간 경비를 위해 소환해둔 개미나 노래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큰데...?’
노래기는 불필요한 정신력 소모를 막고자 일부러 작게 소환해두었고, 개미는 기껏해야 나와 엇비슷한 정도에 불과하니까.
재빨리 흑도를 소환해 움켜쥐고 수상한 형체를 목격했던 나무 사이로 다가가자
“...뭐야, 너였냐.”
그곳엔 큼지막한 거미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거미도 소환했던가...?
나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명령했다.
“소름 끼치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빨랑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이런 야밤에 뭐 하는 건지...”
.....
“어쭈, 안 돌아가?”
강제로 힘을 써서 역소환하려는 순간
콕!
“끄악!”
거미가 뾰족한 발끝으로 내 이마를 콕! 찌르고는 냅다 튀었다.
나는 순식간에 거미줄을 타고 저택 너머로 도주하는 녀석을 아연하게 바라보고는...
“저 새낀 대체 뭐야?!”
기가 차 소리쳤다.
소환수마다 개성이 뚜렷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저 녀석은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거미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영 꺼림칙한 놈이고.
‘게다가 대체 어디서 뭘 훔쳐먹었길래 쩝쩝 입맛까지 다시고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얼얼한 이마를 매만지며 대문으로 향하자 철창살 앞에 선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뭐야, 카렌? 왜 벌써 왔어. 데리러 간다니까.”
눈짓으로 인사하며 문을 열어주자 카렌이 묵직한 배낭을 이끌고 들어서며 말했다.
“길드 업무가 일찍 끝나서 빨리 왔어. 부 길드장한테 너랑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믿더라고. 피곤할 테니 어서 퇴근하라더라.”
“하하... 힘들었겠네.”
“...무슨 남 일처럼 말하고 그래. 맞아, 그리고 너.”
카렌이 날 찌릿 째려보더니 옷깃을 붙잡고 추궁했다.
“솔직히 말해봐. 길드에서 나오기 전에 나랑 잤다고 한 거 일부러 그랬지.”
“.....”
“어쭈, 대답 안 해?”
“그럴 리가. 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
“진짜?”
“저, 정말이라니까...! 사람들이 오해할 걸 뻔히 알고도 내가 왜... 아.”
“...적어도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건 그때도 알고 있었다는 얘기네?”
“.....”
“도란 너...!!”
“빠, 빨리 들어가자!! 춥겠다! 배낭은 내가 들어줄게!!”
나는 황급히 카렌에게서 배낭을 낚아채고는 현관을 향해 내달렸다.
뒤에서 우두두두 성난 멧돼지가 쫓아오는 소음이 들려왔지만 나는 앞만 보고 질주할 뿐.
간신히 현관문을 열고 터치다운에 성공하자 내 목덜미에 손톱을 세운 채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카렌, 신기하게 실비의 문양을 구경 중인 여성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리엘이 고개를 들더니 화사하게 웃으며 맞이해왔다.
“아, 왔구나? 잘 지냈어 카렌? 기운이 넘쳐 보이네!”
“응, 네 남편 때문에 말이지.”
“으음... 그, 그래? 일단 방 안내해줄 테니 이리 와! 평소에 자주 쓰던 손님용 객실은 지금 니아 님이 이용 중이거든. 어차피 하루만 있다 갈 거니까 내 침실에서 자도 되고.”
“그래, 고마워. ...이제 배낭 줘 도란.”
“으, 응...”
순순히 배낭을 넘겨주자 카렌은 맹금류 같은 시선으로 힐끗 날 흘겨보고는 아리엘을 뒤따라 저택 2층으로 향했다.
식은땀을 훔치며 안도하자 라디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카렌 님이었네요... 위험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잠깐 위험할 뻔했지만.”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넌 이제 뭐 할 거야? 아직 자기에는 조금 이르잖아.”
해가 지긴 했지만 잠자리에 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 어두운 밤하늘을 돌아보며 묻자 녀석이 거실 구석에 쌓아둔 여행용 배낭을 눈짓하며 대답했다.
“아, 저는 무기 점검을 좀 해두려고요. 내일 던전에 들어가니 마지막으로 확인해야죠.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끝낼 테니 걱정 마세요. 도란님은요?”
“아, 난 니아 님하고 잠깐 할 게 있어서 뒤뜰에 갔다 올게. 오늘 같이 대련하기로 했거든.”
“그래요? 그럼 이따가 침실에서 봐요.”
“그래.”
라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저택 안쪽에 난 쪽문으로 향하자 금빛 형체가 곧바로 내게 들러붙었다.
니아가 살갑게 팔짱을 끼며 외쳤다.
“소년!! 오늘 같이 대련하기로 한 거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나 너무 기뻐!!”
“그야 당연히 기억하죠... 그리고 가슴 닿고 있어요.”
“응? 원한다면 마구 주물러도 되는걸?”
“...제발 성희롱 좀 하지 마세요. 아니, 이런 건 보통 입장이 반대여야 하지 않나...”
“뭐 어때~! 아 그리고 소년은 혹시 실비처럼 저런 게 취향이야? 문신 말이야!”
“문신이요?”
그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글쎄요... 그것도 다 사람 나름이지 않아요? 그 왜, 아리엘이 문신한다고 하면 상상이 안 가는데 라디는 뺨에 페인팅이 있는데도 잘 어울리잖아요.”
“으음... 그러네. 그럼 나는 어때?”
“니아 님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저런 거 해줄 수 있는데... 소년 거라는 증표로! 원한다면 아랫배 위에다가 분홍색...”
“안 돼요!! 어디서 그런 이상한 것만 배워가지고...”
“음...? 하지만 실비 문신도 엄청 야하잖아.”
“네? 뭐가요...? 그냥 평범한 달 문신 아니었어요?”
딱히 야하다고 느낄 만한 포인트는...
“그 왜 있잖아. 처음에는 초승달 모양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보름달처럼 점점 차오르는 게 꼭 아기방에 씨앗...”
“진짜 미친 소리 하지 마세요!!!”
황급히 니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순진한 척이란 척은 죄다 떨어대더니 한 번 가면이 벗겨지니까 그때부터는 폭주 기관차가 따로 없다.
그녀가 우리 저택에 온 이후로 대화의 수위도 좀 올라간 것 같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뒤뜰에 도달하자 너르게 깔린 잔디가 보였다. 제법 널찍한 저택 뒷마당에는 아리엘의 마법 연습을 위한 목인형과 내가 애용하는 중량 가검, 라디의 표적판 따위가 널려있다.
나는 비치된 마석등을 점등하고는 니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일단 나오긴 했는데 막막하네요... 어떻게 할 거예요?”
“음 그러게... 나도 막상 누군가를 가르쳐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럼 한 번 싸워볼까?”
“네? 그냥 싸워요?”
“그래 대련한다고 했으니까. 일단 부딪혀 봐야 뭐든 되지 않겠어?”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가검 좀 가져올 테니... 응?”
덥석.
막 뒤뜰 구석에서 훈련용 목검을 들고 오려는 차, 니아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네 장검으로 해.”
“네? 하지만...”
“왜?”
“아니... 그야 니아 님이 다칠 수도 있잖아요.”
“으음... 내가 다쳐?”
“네, 진검으로 하다가 실수로 베기라도 하면... 게다가 제 검은 엄청 날카로우니... 윽?!”
찰나, 눈앞이 시꺼메졌다.
뒤늦게서야 내가 지면에 고꾸라져 있다는 걸 깨닫고는 땅에서 머리를 뽑아내자 뒤집힌 세상 너머에서 사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
“소년은 방금 나한테 한 번 죽은 거야.”
“....”
“...일단 가뿐하게 이백 번 죽는 걸로 시작할까?”
“저기 혹시 조금만 살살 해주실...”
“소년도 알겠지만 나는 힘 조절이 서투르니까.”
살고 싶으면 알아서 잘 피해봐.
찬란한 금빛 오라에 비명을 지르는 대기를 보며, 나는 새삼 이 여자가 저명한 하이랭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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