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 채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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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채비 #8
“헉... 허억.. 헉... 뒤지겠네 시팔...”
풀밭 위에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땀방울이 안구로 치밀어 눈을 감았다. 단단했던 근육질 몸매는 멍과 생채기로 뒤덮였고, 잇따른 타격으로 성한 곳이 없을 지경이다.
흙과 땀 투성이가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벌써 뻗으면 어떡해. 아직 더 할 수 있지?”
“.....”
“대답해 소년.”
“크윽...”
나는 비틀비틀 무릎을 짚고 일어나 중얼거렸다.
“이 괴물... 조금만 살살 해주시면 어디 덧나나...”
“이것도 최대한 힘조절 한 건데? 내가 진심이였으면 지금쯤 소년은 핏덩이가 되어 있었겠지.”
“그건 그렇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니아가 내민 승리의 조건은 단 하나.
제한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유효타를 입히는 것.
하지만 내가 급소를 세 자릿수 넘게 허용할 동안 유효타는커녕 니아의 머리칼 하나 스치지 못했다.
흑도를 거세게 움켜쥐자 전방에서 흐트러짐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본기는 나쁘지 않아. 날렵하고, 공격도 다채로운 편이야. 마력 대신 독특한 힘으로 육체의 강도와 스피드를 올린 것도 인상적이고. ...하지만 너무 조급해. 수세에 몰리면 어떻게든 속도에 의존해 상황을 파훼하려는 버릇이 있어.”
“...그럼 어떡하죠.”
“우선 침착하려고 노력해봐. 시야를 넓게 가지고,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고 스스로 흐름을 만들어야 해. 할 수 있겠어?”
“흐름이라... 너무 두루뭉술한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어요?”
“으음... 가끔 내가 일부러 틈을 보여주면 소년은 그때마다 다짜고짜 달려들었거든. 내가 정말로 소년과 적대하는 사이였다면 서른 번은 족히 더 죽었을 거야. 강자와의 싸움에선 상대의 수에 말려들지 말고 확실한 각을 노려야 해. 이건 이해했어?”
“음... 솔직히 들어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함 박아보죠.”
“응? 박는다구...? 어디에? 설마 니아한테...?”
“.....”
니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순진무구한 소녀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이 마냥 어려 보이는 외견에 얼마나 속았던가.
지칠 데로 지친 나와는 달리 아직도 여유가 넘쳐 보이는 니아를 응시하며 칼자루를 고쳐 쥐자 그녀가 씨익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구름 사이에 가려졌던 달이 뒤뜰을 비춘 순간, 나는 대퇴근에 폭발적으로 힘을 실었고ㅡ
돌진했다.
흩날리는 잡풀. 형체를 잃고 흐려지는 사물. 흑도의 기운을 이용해 순식간에 가속하자 주변 시야가 뭉개졌다.
나는 호흡을 틀어막고, 신속하게 니아에게 쇄도해 칼날을 찔러넣었으나
“느려~.”
그녀는 마력을 두른 발차기로 검면을 걷어차 튕겨내더니 샛노란 안광을 흘리며 저돌해왔다.
카가강!!
“으윽...!”
불똥이 산발했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살갗을 갈라놓는다. 니아가 금빛 마력으로 가속하며 빗발쳐왔고, 측면으로 파고들며 옆구리를 가격했다.
나는 재빨리 도신을 세워 틀어막았으나 니아는 가볍게 제동하며 선회했다. 시야가 미치지 않는 사각에서 정강이를 찍어누르고, 내 균형을 송두리째 앗아가며 소름끼치게 웃은 뒤로는 강타. 회전력을 실어 타격.
“커흑...! 제, 젠장!!”
‘백은보(白??)...!’
열세에 몰리자 나는 기척을 감추고 보법을 밟아 니아의 배후로 뒤돌아갔지만ㅡ
퍼억─!!!
“끄아아악!!!”
니아가 날렵하게 회전하며 뒤돌려차자 복부를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풀밭에 엎어져 위액을 게워내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사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하고도 아흔아홉 번.”
“콜록! 콜록...! 네...? 지금 뭐...”
“소년이 내게 급소를 허용한 횟수야. 이제 대련 종료까지 한 목숨 남았어.”
“그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인가.
후들거리는 두 팔로 땅을 짚고 풀밭을 응시하자 니아가 날 힐끔 쳐다보더니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힘들면 그만할래? 이미 충분히 했으니 피곤하면 쉬어도 괜찮아.”
“....아니요. 끝까지 할게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솔직히 조금 분하기도 하고.”
반드시 한 방 먹여주고 마리라.
흑도를 땅에 꽂아 넣고 일어서며 다짐하자 니아는 날 응시하며 은은하게 미소짓더니ㅡ
“응... 난 소년의 그런 점이 정말 좋아. ...그래! 결심했어! 이번 시도에 날 잡으면 앞으로든 뒤든 마구마구 범하게 해줄게! 묶어도 좋고.”
“...평소랑 같잖아요. 평상시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기분이 다르잖아! 기분이! 실력으로 쟁취해서 하이랭커를 마음대로 다룬다고 생각하니 흥분되지 않아?”
“.....”
그야 그런 로망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겼을 때 얘기다.
자세를 갈무리하며 흑도를 중단으로 겨누자 니아가 발끝으로 잔디를 다지며 툭 내뱉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이니 이번엔 소년도 전력으로 덤벼봐. 나는 여전히 손속을 둘 테지만. 여차하면 아리엘한테 치유받아도 되니까 다치는 건 걱정하지는 말고.”
“.....”
끄덕.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돋아나라!!!”
콰르르르륵!!!!
돌연 뒤뜰에 굉렬한 소음이 퍼져나갔다. 시꺼먼 아지랑이가 대지를 뒤덮고, 내 부름을 듣고 온 검은 줄기가 사방에서 창궐했다.
불쑥 돋아나 선박을 휘감는 전설 속의 크라켄처럼 섬뜩한 자태.
나는 단숨에 지면을 박차고는 신기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니아에게 질주했다.
가속하며 진각을 내디디고. 왼발을 축으로 회전해 높게 뛰어오르고. 흑도를 휘둘러 권압을 빗겨낸 뒤로는 덩굴과 함께 일제히 착탄.
날카로운 줄기 끝을 한 점으로 모아 쇄도하자 지면이 폭사했다.
이내 자욱한 흙먼지 사이에서 신속히 고개를 들자...
“호오... 제법인데?”
등 뒤에서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난폭한 충격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니아가 날쌔게 도약하자 대기가 파열했다. 이어서 산개하는 금빛 잔상. 울려퍼지는 뇌성.
나는 급급하게 치미는 공격을 틀어막으며 반격을 도모했다.
검격을 가해 궤적을 비틀고, 위치를 전환하며 검로를 트고, 단도를 소환, 짧게 절개하며 장검으로 참격.
베고. 긋고. 찌르고. 마력의 폭풍 속으로 파고들며 육참골단.
짦은 순간, 격렬하게 오고간 수십 합의 공방에 니아는 입꼬리를 들어올리더니
“아직 부족해.”
까아아아앙─!!!
강력한 일격으로 흑도를 어둠 저편으로 튕겨냈다.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공중에서 회전하더니 내 왼손을 찍어눌러 단도마저 잔디에 처박았다.
검을 잃은 검사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바, 내 패배가 확실시되는 순간ㅡ
“...잡았다 요놈.”
“자, 잠...! 꺄으으읏♡?!”
나는 허공에서 춤추던 니아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현저한 실력 차이를 역으로 이용해 일부러 검을 노리도록 유도했던 것이 결실을 맺은 순간.
무너져내리는 자세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싣자 니아는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성대하게 고꾸라졌다.
나는 그녀가 비틀거리며 착지하자마자 어깨를 밀어붙여 잔디 위로 깔아뭉갰다.
“지금까지 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겠다...!”
집요하게 때린 곳을 또 때리고, 이마에 딱밤을 놓으며 농락하고, 잡았다 싶으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그녀에게 쌓인 울분을 토해낼 기회.
나는 니아를 바닥에 고정한 채 꼬리를 주물럭거리며 반응을 감상했다.
어떤 식으로 수인의 꼬리를 만지면 좋아하는지는 이미 라디를 통해 숙달된바, 부드럽게 손압을 가하며 쓸어올리자 그녀는 흠칫 허리를 떨더니...
“으힉?! 하그윽...♡”
“....”
“자, 잠깐...! 소년! 만지는 방식이... 히끅! 너, 너무 야해...!! 우으.. 하으읏...”
꿀처럼 달콤한 교성이 흘러나온다. 내 가슴팍을 붙잡은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꼬리 밑동을 건드릴 때마다 니아의 탐스러운 골반이 움찔했고, 간헐적으로 튀어오르던 저항도 점차 멎어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에 젖은 새처럼 파르르 떠는 그녀를 보자 나는 새삼 니아의 용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깨달았다.
달빛을 잘게 부수어 흩뿌린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발, 개당 수억을 호가한다는 유명 장인의 비스크돌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콧날, 신음과 함께 몸을 들썩일 때면 풍겨오는 매혹적인 페로몬과 땀 냄새.
‘...엄청 말랑말랑하네..’
근육질일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몹시 부드러운 니아의 여체에 놀라고 있자니 아래쪽에서 어렴풋이 물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저기... 배에 닿고 있는데...”
“.....”
“소년...?”
“...그래서요.”
“.....”
니아가 놀란 숨을 들이켜며 내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결심한 듯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운 채로 살짝 몸을 뒤집더니...
“그, 그럼... 끄트머리만 살짝 넣어볼래?”
“끄트머리요?”
“응... 분명 기분 좋을 거야... 아무도 책망하지 않을 테니까...”
살랑살랑..
니아가 은근슬쩍 꼬리를 흔들어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고했다.
“...진심이야?”
“으응, 진심이야.”
“돌이킬 수 없어.”
“응... 이전부터 결심했어. 좋아해 도란.”
“....”
나는 천천히 니아의 이마에 키스했다.
이어서 지긋이 손을 뻗어 니아의 하의 단추를 풀어나가던 순간ㅡ
“.....”
“....”
뒤뜰 쪽문에 서 있던 실비와 눈이 마주쳤다.
커흠 헛기침하며 니아의 위에서 내려오자 그녀도 뒤늦게 실비의 존재를 눈치채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나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물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니아 님이 소년, 만지는 방식이 너무 야해라고 할 때부터입니다.”
“그럼 다 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하필이면 오해하기 딱 좋은 순간에.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자 실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엿볼 의도는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주인님 두 분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아니, 괜히 비밀로 하면 더 이상해지니까 말해도 상관은 없는데...”
어차피 니아와의 관계는 사실상 공인받은 거나 다름없고...
“...그보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볼일이 있어서 온 거 아냐?”
“그렇습니다. 라디 님이 욕조에 온수를 받아놓았으니 대련이 끝나면 이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다야?”
“그렇습니다.”
“...알았어. 전해줘서 고마워. 우리도 이제 바로 들어갈게.”
“.....”
꾸벅.
실비가 공손하게 인사하고 떠나자 나는 겸연쩍게 니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으음... 어쩌다 보니 분위기를 타버렸네요. 저희도 이만 돌아갈까요?”
“그, 그래...! 춥다! 빠, 빨리 돌아가자!”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원했으면서...”
“그, 그래도 막상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소년은 경험도 많을 테지만 나는 처음이고...”
“뭐... 그러네요...”
만일 실비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 여기 침실 창문으로 다 보이잖아.’
어쩌면 니아 위로 올라탔을 때 라디가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머쓱하게 관자놀이를 긁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니아가 상그레 뺨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뭔가... 엄청 나쁜 짓을 저지르고 온 기분이네... 대련하면서 소년이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봐서 기쁘기도 하고... 이 뒤로 초야를 치를 걸 상상하면...”
“네? 당연히 따로 잘 건데요?”
“뭐, 뭐?! 안 할 거야!?”
“네.”
“하, 하지만...! 아까 거기까지 가놓고...!!”
“아니, 그야.. 그때는 대련을 끝마친 직후라 머리에 피가 쏠려있었잖아요. 게다가 내일은 아침 일찍 던전으로 향해야 하는데 이 이상 무리하는 것도 곤란하고요.”
“우으...!”
니아가 꿀을 도둑맞은 호박벌처럼 잔뜩 볼을 부풀렸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제가 그렇게나 좋아요?”
“응! 이 세상의 땅과 바다와 하늘을 다 합친 것보다도 사랑해!!”
“제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데요?”
“음... 처음엔 나한테 아무런 사심 없이 굴어서 신기했는데... 내 어리광에도 잘 어울려주고, 조그만 일에도 밝게 웃어주고, 세세한 배려도 엄청 눈부시고... 또 엄청 용감한데다 착하기까지 하고...”
“제가 착하다는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 게다가 그런 사람이야 저 말고도 많잖아요. 니아 님이 말씀하신 건 전부 사소한 것들이기도 하고...”
“응! 난 소년의 그런 사소한 점에 반했는걸? 또 내 마음에 처음으로 불을 지핀 게 소년이기도 하고! 소년을 만나고 난 뒤로 세상이 흑백에서 물감투성이 수채화로 변한 기분이야!”
“...콩깍지 한번 단단히 꼈네요.”
“응, 아마 평생 내 눈에서 안 떨어질걸?”
니아가 살갑게 웃으며 내 팔뚝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계속 떨어지지 않을 기세기에 나는 부드럽게 다독이고 살며시 떼어놓으며 말했다.
“...이 뒤로는 이따가 얘기해요. 그럼 저는 땀이 식기 전에 빨리 욕실에서 씻고 올게요. 아니면 니아 님이 먼저 씻으실래요?”
“응? 굳이 따로 들어갈 필요 있어? 그냥 같이...”
“안 돼요. 그랬다간 정말로 일을 저질러버릴 거 아녜요. ...만약 제가 씻는 도중에 욕실로 난입했다간 바로 내쫓은 다음 던전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도 안 나눌 테니 그렇게 아세요.”
“읍...!”
단호하게 내뱉자 실실 웃던 니아가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진짜 들어올 셈이었구먼.
나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절망하는 니아를 소파에 앉혀두고 저택 2층으로 향했다. 대련에 지친 몸을 이끌고 층계를 오른 뒤 욕실 앞에 도달하자 쌓여왔던 피로가 한 번에 몰아닥쳤다.
한데...
‘물소리...?’
뭐... 욕조에 물을 담아뒀다고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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