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채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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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채비 #9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욕실은 김으로 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느릿느릿하게 탈의했다. 대련하며 생긴 찰과상에 옷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상하의를 벗어내자 그간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아닥쳤다.
조용히 벗은 옷을 선반에 올려두고 피부에 선연한 멍 자국을 문지르며 욕조로 향하자 뜨거운 증기 사이로 불어오는 창가의 시원한 바람, 청결한 백색 타일과 찰랑이는 물기, 대리석 장식 등 이 세계에서 접하기 어려운 설비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무리 피곤하다곤 해도 흙투성인 채로 욕조에 들어갈 수는 없는 바, 대충 바가지로 물을 끼얹고 입욕하려는 차...
‘어...?’
욕조에 누군가 있었다.
유독 추운 날씨 탓인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증기와 등을 돌려 창가를 바라보는 자세 탓에 육안으로 자세히 식별하는 건 불가능했으나...
‘아리엘인가...’
김 사이로 얼핏얼핏 하얀 목덜미와 머리칼이 비치는 걸로 봐서 틀림없겠지.
그녀가 무방비하게 온욕을 즐기는 모습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해 나는 발끝을 세우고 살금살금 욕조를 향해 다가갔다. 수면에 얼핏얼핏 비치는 살결과 살굿빛으로 상기된 피부를 보자 묘한 음심이 들끓는다.
나는 조용히 아리엘의 뒤로 접근해 꿈틀거리며 손가락 근육을 풀고는
“우와악─!!”
“꺄아아아아악!!!”
“히히...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고 그래. 우리 사이에. ...근데 너 왠지 가슴이 조금 작아진 것 같...”
주물주물.
절묘한 볼륨과 그립감.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으로 솟구친 유방. 극상의 감촉이지만 어쩐지 기억과 다른 감각에 손바닥을 주무르고 있자니...
아리엘이 날 돌아보았다.
감귤처럼 진한 주황색 눈동자로.
“어, 어.. 어어? 어어어어?”
순간 사고가 굳어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자 주홍빛 눈동자가 당혹으로, 당혹에서 노여움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그제야 나는 내 손이 카렌의 가슴을 만끽 중이라는 걸 깨닫고 놀라서 털썩 주저앉았다.
황급히 욕조에서 등을 돌리고 외쳤다.
“왜, 왜 네가 여기 있어?!!”
“왜 여기 있긴!! 당연히 씻으려고 들어왔지!!!”
“무, 문은 왜 안 잠갔는데?!!”
“이따가 아리엘도 들어오기로 했으니까!!”
“아니 대체...!!”
절망하며 머리털을 움켜쥐었다. 신음하며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혼선이 있었던 모양.
대련으로 몹시 지친 상황인데다가 자욱한 증기, 욕조에 전신 대부분이 가린 탓에 카렌을 아리엘로 혼동한 모양이다. 머리칼을 흰색이라고 착각했던 건, 그녀가 흰색 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나저나 그렇게 열렬히 쪼물딱거렸으니...
‘...좆됐네.’
성추행으로 길드에서 잘려도 할 말이 없다.
모든 일의 원흉인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야, 야 미안하다. 절대 고의는 아니었고 나, 난 일단 여기서 빨리 나갈게. 이대로 같이 있는 걸 들키면 아리엘이 오해할 거 아냐.”
“....알겠는데 너 이따가 나랑 따로 얘기해.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간 온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뽑아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
“그, 그래...”
얼음장처럼 살벌한 음색을 뒤집어쓰자 작두 위를 걷는 듯 오싹한 심정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수건으로 국부를 가리고 엉거주춤 출구로 향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간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는 바, 특히나 카렌과 절친 사이인 아리엘이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봐올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오는 듯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탈의한 옷을 챙기는 것도 빠트리지 않고 알몸으로 욕실을 나서서 조용히 문을 닫은 뒤, 허겁지겁 내달려 방문 앞까지 도달하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현행범이 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막 문을 열려던 찰나
“도란...?”
란이를 옆에 달고 막 1층에서 올라오던 아리엘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가 날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며 물었다.
“거기서 뭐 해? 왜 옷까지 전부 벗고 있고... 세, 세상에...! 상처투성이잖아!! 잠깐만 기다려 봐, 지금 치유해줄 테니...”
“괘, 괜찮아...! 보기보다 안 아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응...? 왜 이렇게 허둥대. 혹시 니아 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설마 헐벗고 있는 것도...”
“아, 아냐! 난 그럼 이만...! 이따가 봐!!”
됴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는 아리엘과 란이를 뒤로 하고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
우여곡절 끝에 저택 외부의 수돗가에서 냉수로 몸을 씻었다.
차디찬 냉기에 벌벌 떨며 돌아와 가운으로 온몸을 감싸고 거실 소파에서 멍~ 하니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층계로부터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렌이 다가와 소파 옆자리에 걸터앉고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욕실 비었어. 가서 씻고 와.”
“....아까 수돗가에서 대충 씻고 왔어.”
“.....”
“....”
정적.
어색하면서도 싸늘한 공기가 거실에 내리깔렸다.
마치 냉전 중인 부부처럼 피를 말리는 기분.
시시각각 숨통을 죄어오는 침묵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차마 도망가지도 못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자니 카렌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
나는 곧게 벽난로를 응시한 채 천천히 대답했다.
진심을 담아, 진솔하게...
“...너 몸매 좋다.”
“목욕하는데 엿봐놓고 하는 소리가 기껏 그거야?!!”
“아야얏!! 그럼 어떡해!? 사실인데!!”
“다른 말도 많잖아!!!”
“고, 고맙습니다?”
“미안하다고 해야지!!”
“아야야얏!!! 억울하면 너, 너도 내 거 만지던가!!”
귓불을 쭈욱 잡아당기는 카렌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외치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ㅡ
“내가 왜 네 꼬추를 만져?!! 더럽잖아!!!”
“아, 안 더럽거든?! 라디랑 아리엘은 엄청 아껴준단 말야!! 그, 그리고 거기라곤 말 안 했어!! 가슴! 가슴 말한 거야!!”
“내 가슴하고 네 가슴이 같냐?!”
“.....”
그건 그렇지만요.
담백하게 인정하자 카렌이 홍당무처럼 새빨간 얼굴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 애초에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너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런 거지...!”
“나, 나도 피곤해서 맨정신이 아니었다고! 고의로 그런 짓을 했다간 애들이 엄청나게 경멸할 텐데 그럴 리가 없잖아!”
라디와 아리엘이 나와 니아의 애정 행각을 눈감아 주는 건, 어디까지나 나와 그녀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눈 사이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니아를 좋아하고 그녀도 날 사랑하니까.
만약 내가 엄한 여자를 희롱하고 다니면 그 둘도 내게 정나미가 떨어지겠지.
그렇다고 내가 카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정말 나인 줄 몰랐다고?”
“그, 그래...!! 진짜라니까! 욕조에 가려서 몸도 안 보였고, 머리도 수건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잖아! 게다가 창문도 열어놔서 김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였다고! 당연히 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그럼 평소에 아리엘한테는 그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거야?”
“....”
“대답.”
“그, 그렇죠...? 아무래도 동거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 그래도 평소보다 조금 짓궂은 장난이었던 건 맞지만...”
“.....”
급작스레 카렌이 조용해졌다.
노심초사하며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으아아아!! 열받아!!!”
“카, 카렌?!!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몰라! 너고 가슴이고 나발이고 다 열받아!! 애초에 욕실에 불이 켜져 있으면 바로 뒤돌아서 나가거나 누구 있냐고 물어보는 게 상식 아냐?!”
“그, 그야 실비가 욕실 물 받아놨다고 해서 당연히 나 때문에 준비한 줄 알았지...! 아, 저기 온다!!”
옥신거리며 다투고 있자니 논란의 당사자가 걸어왔다.
실비는 길길이 날뛰는 카렌과 울상을 지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역시나... 싶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이 욕실로 향하고 난 뒤에 아리엘 님과 친구분이 온욕을 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나 봅니다.”
“그, 그치...?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방금 말한 거 진짜야? 도란이 일부러 그렇게 말하게 시킨 게 아니고?”
“진실입니다. 라디 님의 명으로 제가 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주인님께 말씀드리러 간 사이에 아리엘 님이 라디 님과 대화하시고 먼저 욕실을 이용하시기로 한 듯합니다. 듣기로는 아리엘 님이 실수로 친구분의 옷에 홍차를 쏟으셨다고...”
“....”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간다.
실비가 대련 중이던 날 위해 욕조물을 받아두었다는 걸 알고도 카렌과 아리엘이 급하게 욕실을 이용했던 건 홍차를 뒤집어쓴 까닭이고, 아리엘이 먼저 카렌을 욕실로 보내고 나중에 들어오기로 한 건 카렌의 옷을 급히 세탁하기 위해서였던가.
그렇다면 내가 선반에 옷을 벗어둘 때 카렌의 의복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도 납득이 간다.
뛰어난 추리력에 스스로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니 실비가 내 쪽을 돌아보며 메이드복의 양 치마 밑단을 붙잡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배상하겠습니다. 원하는 요구를 말씀해 주십시오.”
“뭐... 딱히 네 잘못도 아니잖아. 그냥 열심히 일한 것뿐인걸. 아니, 그보다 넌 가진 것도 없는데 어떻게 배상한다는 거야.”
“....벗을까요?”
“아, 아니!! 갑자기 생뚱맞게 그게 무슨 소리야?!! 필요 없어!!”
황급히 실비를 막아세웠다. 이미 오늘 니아와 카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처리하기로도 벅찬데 실비마저 참전하면 도무지 여력이 없다.
나는 단칼에 거절하고는 서서히 내려가는 실비의 손목을 원위치로 되돌렸다. 중세의 하녀와 노예는 엄청난 박대와 노동, 심지어는 주인의 강간에도 시달리는 등 취급이 열악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도 처우가 좋지 못한 편이지만 나는 절대로 실비를 푸대접할 생각이 없다.
그랬다간 우리를 몇 번이나 곤궁에서 구해준 그림자 여왕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어느 날 갑자기 안디라 님이 찾아와 목을 쓱싹해갈지도 모르니까.
한데 옆을 돌아보니 카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뭐? 벗는다고?! 너 그게 이렇게 어린 애한테 시킬 짓이야?! 게다가 뭐?! 주인님? 주인니임ㅡ?!”
카렌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내 구레나룻을 한 움큼 움켜쥐고 외쳤다.
“야, 야!! 너 이렇게 어린 애한테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시킨 거야?! 게다가 요런 이상한 옷까지 입혀두고!?!”
“아야야!!! 나 대련하고 온 직후라 아프다고!!”
“그런 놈이 내 가슴을 떡 빚듯 주물러?!! 빨리 물음에나 답해!!”
“얘 성인이야!! 그냥 동안이라 어려 보이는 거라고!”
확실히 실비가 나이에 비해 왜소한 편이기는 하지만 길거리에서 살아왔으니 영양 부족으로 발육이 늦어진 까닭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카렌은 여전히 내 구레나룻을 쥐고 흔들며 외쳤다.
“그럼 호칭하고 옷은?!”
“으아악!! 아파!! 너도 대충 들어서 사정은 알잖아!! 내가 일부러 노예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다른 호칭도 많은데 왜 주인님이라 부르게 시키냐고!! 네가 무슨 변태 중년 귀족 아저씨야?! 게다가 저 희고 검은 옷은 뭔데?! 악취미잖아!!”
“....”
그야 그게 정상적인 반응인데 말이죠.
“나, 난 주인님이라 부르게 시킨 적 없어!! 저 옷도 얘가 그냥 혼자서 입은 거야!! 노예 상인이 왕도에서 유행하는 옷이라고 선물로 준 거란 말야! 저거 보기보다 엄청 비싸!!”
“...노예 상인? 그때 여기서 봤던 사람?”
“그래! 나 진짜 억울하다고...!! 으헝헝...”
“.....”
울먹이며 밥그릇을 빼앗긴 똥개처럼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자아내자 카렌도 조금 심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손을 떼고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봐왔다.
나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제 곧 애들 올 텐데 일단 가슴 만진 건 비밀로 해줘. 진짜 고의가 아니었단 말야.. 반성도 많이 하고 있고...”
“...알았어. 나도 구태여 말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원래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고. ...뻔뻔하게 추행이나 하고 다닐 놈이었으면 내가 진작 죽여놓거나 길드에서 쫓아냈지.”
“그래.. 진짜 고맙다...! 다음번에 돌아올 때 대신 선물이라도 사 올게.”
“됐거든? 그런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무사히 돌아오기나 해. 넌 맨날 무지막지하게 다쳐서 오니까 걱정...”
돌연 카렌이 말을 멈췄다.
못 박힌 듯 내 뒤로 고정된 그녀의 시선이 점차 창백해진다.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자ㅡ
“니, 니아 님?!!”
니아가 소파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녀는 스윽 일어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슴 만졌어?”
“어, 어...”
“만졌어?”
“....”
“만졌어?”
“저... 니아 님...?”
“만졌냐고 묻잖아.”
“.....”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니아는 잔뜩 울상을 짓고는
“치사해!!! 난 아무리 사정해도 안 만져주더니!! 나도! 나도 가슴 만져줘!! 마구마구 주물러달란 말야!!! 이렇게 된 거 그냥 이 자리에서 확 따먹...!!”
“니, 니아 님은 일단 가만히 계세요!! 제, 젠장...! 안 그래도 복잡한데...!! 더 이상 달라붙으면 혀 깨물 거에요!! 그리고 은근슬쩍 제 거시기 주물럭거리지 마시고요!”
“...응? 그건 나 아닌데?”
“어 그럼 누구...”
시선을 내리자
됴란!
음...?
“라, 란이가 왜 여기에...! 그거 장난감 아니야! 손 떼!! ...잠깐, 란이가 여기 있다는 건 설마...”
고개를 들자 우두커니 계단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는 아리엘이 보였다.
그녀가 은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말했다.
“뭐... 너 카렌 가슴 만졌어?”
“아, 아니 이건 전부 오해...”
“도란님, 식량 창고에 가보니 꿀단지가 전부 동이 나 있던데 혹시 아는 거 있으세요?”
“아, 라디야!! 나 안 그래도 발정기라 힘든데 소년이 계속 나 자극해!!”
“아까 도란님이 뒤뜰에서 니아 님 자빠뜨리는 거 봤어요. 재밌어 보여서 침실 창문으로 계속 구경중이었거든요. ...근데 이젠 카렌 님한테까지 손을 댔다고요?”
“....”
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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