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09화 (309/375)

〈 309화 〉 여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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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여정 #1

이른 새벽, 성문을 개방하자마자 동쪽 성벽 밖으로 나왔다.

쪽빛으로 물든 하늘, 옷자락을 적시는 새벽녘 이슬, 부산스럽게 여정을 준비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마차 앞에 서자 카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리엘의 손을 맞잡았다.

“조심히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응, 꼭 무사히 다녀올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돌아올 때 선물도 사 올 테니 기대하고 있어!”

“그래, 카렌. 우리 걱정은 하지 마. 무엇보다 내가 있잖아.”

“...네가 제일 걱정이거든? 이 철부지야. 아리엘, 만약 도란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야 해? 막 심하게 대한다거나 강제로 밤시중을 들게 한다던가...”

“으음... 가끔은 그런 것도 괜찮을지도...”

“어...?”

“아무것도 아냐.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잘 타이를 테니 걱정하지 마. 도란 목줄은 내가 꽉 쥐고 있을게!”

아리엘이 낯부끄럽게 웃으며 손바닥을 내젓자 라디와 니아가 덧붙였다.

“네, 카렌 님... 무사히 잘 다녀올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만약 마물이나 도적이 아리엘을 채가려 들면 묵사발을 내놓을 테니 걱정 마!”

“감사합니다 니아 님... 라디도 고마워. 다들 무사히 돌아와줘. ...그리고 도란 너.”

­덥석!

카렌이 내 옷깃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나 아직 용서 안 했어. 결혼도 안 한 숫처녀의 가슴을 그렇게 주물러놓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

“돌아오면 각오해.”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렌이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너도 무탈하게 잘 다녀오고. 저번처럼 너무 늦게 돌아오면 길드에서 제명... 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성가셔지니까 편지라도 써서 보고해줘.”

“알았어, 그럼 너도 몸 조심히 잘 있어. 힘들게 구는 모험가가 있으면 얼굴 기억해뒀다가 나한테 말하고.”

“으이구... 너나 잘하세요. ..그래도 고마워. 내가 네 담당 접수원이라는 게 알려지고 나서 치근거리는 모험가가 확 줄었거든. 그러면 이제 슬슬... 뭐야,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봐...?”

뒤를 돌아보자 어째선지 라디 일행이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뒤에서 보면 꼭 카렌이 강제로 날 덮쳐서 키스하는 듯한 모양새지만...

나는 카렌의 머리를 푹 눌러주고는 손을 흔들며 마부석에 올라탔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수많은 인파와 함께 서서히 이동을 개시하자 사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차륜의 소음이 들려왔다.

던전 마을까지 도달하려면 사흘이 넘게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바, 간만의 긴 여정에 설레며 푸렴푸렴 밝아오는 능선 너머를 올려다보자 옆 좌석에 앉은 아리엘이 내게 고삐를 건네며 말했다.

“자, 도란은 말을 몰아본 적이 별로 없다고 했지? 잘 할 수 있겠어?”

“글쎄... 승마 경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너무 오래전 얘기라... 마지막으로 말을 타본 게 아버지랑 유목민 부락에 방문했을 때인데 몇 년은 됐을걸?”

“그래? 그럼 내가 차근차근 가르쳐줄게! 원래 가장 기본은 말이 아프지 않게 굴레를 씌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건 대여소 쪽에서 해줬으니까 우리는 주행만 하면 돼. 우선 제대로 고삐를 쥐는 것부터 시작하자. 자, 한번 잡아봐!”

“이, 이렇게...?”

­꽈득...

단단한 도구를 움켜쥐듯 주먹으로 가죽끈을 부여잡자 아리엘이 부드럽게 내 손가락을 펴주며 말했다.

“음... 이렇게 왼쪽 고삐를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로 통과시키는 거야. 오른쪽 고삐는 중지와 약지 사이에 끼워서 가운데에 위치시키고.”

“이, 이렇게...?”

“응, 잘했어 도란. 그 상태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오른손을 왼손 뒤에 놔둬서 고삐를 고정해. 이러면 왼손을 미끄러지듯 위아래로 움직여서 끈을 늘이고 줄일 수 있거든.”

“어어... 이, 이거 맞아...?”

“음... 살짝 어설프긴 하지만... 응. 그리고 또 이게 마지막인데, 요 고삐의 끝 버클이 있는 부분을 집어서 왼손 새끼손가락에 걸면 끝! 이렇게 해야 남는 끈이 바퀴에 걸려서 사고가 발생하는 걸 미리 방지할 수 있어.”

“...복잡하네. 내가 본 마부들은 그냥 대충 잡는 것 같았는데.”

“대충 쥐었다간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민하게 대처할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왼쪽 고삐가 엄지와 검지 사이, 오른쪽 고삐가 중지와 약지 사이, 버클을 새끼손가락에 위치시키는 것이 올바른 파지법이야.”

“으음... 그, 그럼 여기 이 채찍은? 이것도 쓰는 방법이 따로 있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간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마부석 옆에 비치된 채찍을 집어들었다.

솔직히 아리엘이 채찍을 쓰는 모습을 구경해보고 싶기도 했고.

평소엔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아리엘이 어떻게 행동할지 기대하며 채찍을 쥐여주자 그녀는 손을 높게 들어올리더니­

­톡톡!

“어...?’”

그저 글라스 위에 묻은 물기를 털듯이 우아하게 손등을 까닥이는 걸로 그쳤다.

빤히 쳐다보자 아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뭐 이상한 거 있었어?”

“아니 그 뭐시기... 방금 그게 채찍질한 거야?”

“응, 말에게 채찍을 사용할 때는 항상 부드럽고 가볍게 사용해야 해. 안장이나 그보다 좀 더 앞쪽 부분을 살짝 쓸어준다는 느낌으로. 가끔 홋­치! 소리가 나도록 세게 때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엄연하게 잘못된 사용법이야.”

“그래...? 하지만 분명히 자주 봤는데...”

예컨대 텔레비전에서 채널을 돌리다 경마 경기나 사극이 나올 때면 기수가 있는 힘껏 채찍을 후리곤 했으니까.

의문스럽게 기억을 뒤집고 있자니 아리엘이 난감하게 뺨을 짚으며 말했다.

“음... 아무래도 군마나 경주마를 착각한 모양인데... 그건 최대한 속도를 올려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마차를 모는 건 달라. 세게 때리면 말이 널 존중하고 따르지 않거든. 게다가 봐봐, 말채찍은 끝이 단단한데 요건 끈으로 되어 있지?”

“그러네...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럼 네가 방금 한 것처럼 툭툭 두드리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거야?”

“응. ...아, 그리고 말 뒤쪽을 자극하지 않게 조심해야 해.”

“응? 그건 왜?”

“그랬다간 궁둥이에 파리가 앉아 있는 걸로 착각하고 뒷발차기를 할 수도 있으니까.”

“아하...”

고양이 낚싯대처럼 생긴 채찍을 쥐고 요리조리 둘러보고 있자니 이후로도 아리엘이 손가락으로 조목조목 짚어가며 마차를 모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짐말이 여러 마리일 때는 재갈을 고삐로 연결시켜 말끼리의 머리 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점이나, 우리가 탄 쌍두마차에서는 언제나 두 마리중 좀 더 빠르게 걷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이나, 이럴 경우 고삐의 버클을 조정해서 이들의 속도를 맞추면 된다는 점이나...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상냥하게 말과 교감하며 마차를 모는 아리엘을 보고 있자니 색다른 매력에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보니 정말 귀족이 맞구나...’

어느 순간부터 마차의 설명은 안중에도 없이 숲속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입김, 생기가 넘치는 듯 반짝이는 하늘색 눈동자, 어깨 위로 흘러내린 고운 은발을 새벽 여명이 따스하게 물들여가는 광경을 보며 마음을 빼앗기자 아리엘이 날 돌아보고 눈웃음지으며 물었다.

“왜 도란?”

“....”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그냥... 사랑스러워서. 뽀뽀해도 돼?”

“우... 조금 부끄러운데...”

아리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차 행렬을 살피더니 달그레 뺨을 붉히고 눈을 감았다.

그녀와 입술을 포개어 온기를 나누고, 서로의 허리를 감싸고, 맞잡은 깍지를 쓸어내리다 끝끝내 진하게 타액을 교환하고 나자 나와 그녀 사이에 반짝이는 은빛 다리가 수놓아졌다.

아리엘은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내 품에 안기더니 애정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도란.”

“응, 나도 엄청나게 사랑해 아리엘.”

“...우리가 키스한 거 주변에서 봤을까?”

“아마 그렇겠지.”

“....”

아리엘이 부끄러운 듯 내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자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그리고 말 하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뭔데...?”

“음... 그렇게까지 말에 해박할 정도면 당연히 승마도 잘하겠네?”

“응? 그야 당연히 잘 타지. 귀족의 필수 교양 중 하나니까. 내가 처음 말을 탔던 건 다섯 살 때였는데... 잠깐.”

아리엘은 내 입가에 걸린 짓궂은 미소를 눈치채고는 말을 삼켰다.

나는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말 잘 타?”

“.....”

“한번 보고 싶은데. ...밤에.”

“....”

“아니면 가르쳐 주던가.”

“....”

이에 아리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부끄러워하며 웃더니­

“그, 그럼 이번에 제대로 함께 배, 배워볼까? 암말에 굴레를 씌우는 것부터 올바른 채찍 사용법까지... 너, 너무 아프지는 않게..”

“응, 아마 배낭에 던전 탐사용으로 가져온 로프가 있을 거야...”

잔잔하게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주고 이마에 키스하자 아리엘이 간지러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한데...

­드르륵.. 쾅!

“...야, 너희들. 여기 밖에서 하는 소리 안에 다 들리는 거 몰라?”

마차 방면으로 난 나무 창문이 열리고 니아가 도끼눈을 한 채 째려봤다.

나는 머쓱하게 아리엘과 떨어지며 말했다.

“...들었어요?”

“응, 둘이서 물고 빨고 안달하는 것부터 채찍질해달라고 조르는 것까지.”

“자, 잠깐만요 니아 언니...! 그렇게까지는 안...”

“왜, 틀려?”

“아, 아예 안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

아리엘이 당황하며 힐끔힐끔 이쪽을 돌아보자 나는 입꼬리에 웃음을 머금고 물러나 마부석 중간을 두드렸다.

“...니아 님도 이쪽으로 오실래요?”

“응, 잠시만... 읏챠..!”

니아가 비좁은 마부석 창문을 통과해 마차 밖으로 나오더니 내 옆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녀를 꼬옥 끌어안아 주며 속삭였다.

“...외로웠어요? 제가 안 돌아봐줘서?”

“응... 나도 소년을 사랑하는데 나 혼자만 바람맞히고, 이렇게 애타게 부탁해도 소년은 라디랑 아리엘만 바라보고, 아무리 고백해도 돌아오는 답변은 미적지근하고.. 어제도 처음으로 거의 사랑을 나누기 직전까지 갔는데 결국 찬바람만 맞히고...”

“...말했잖아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나중에 던전에서 붉은 매 길드와 합류하고 난 뒤로부터는 계속 저랑 떨어져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땐 어떡하시려고요.”

“으... 솔직히... 모르겠어. 나한테는 소년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지만, 붉은 매 길드원도 너무 고마운 존재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어느 것도 저울질할 수 없어. 그러니까 지금 소년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전력을 다해 보내려고. 사랑해 도란.”

“윽... 그, 그러니까 다들 보는 앞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이런 거에 부끄러워하기엔 소년하고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한걸?”

“.....”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 귀를 쓰다듬어주자 니아가 고양잇과 수인답게 눈을 감고 그르렁거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게 됐는지...

라디와 아리엘이 각각 한마디씩 했다.

“아무래도...”

“조만간일 것 같네... 응...”

“.....”

마차는 덜컹거림을 싣고 던전 마을을 향해 부단히 나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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