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10화 (310/375)

〈 310화 〉 여정 #2

* * *

[310] 여정 #2

결국 사흘이란 기간을 꽉 채운 끝에 우리는 던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 행렬에서 벗어나면 길을 잘못 들 우려가 있는 바, 다른 사람들과 속력을 맞추며 경치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달려왔지만 덕분에 큰 우여곡절 없이 도달할 수 있었다.

어느새 얼굴을 익힌 상인과 모험가들이 인사하고 떠나가자 달그락거리는 마차 뒤편으로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즈음, 라디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결국 완전히 받아버렸네요.”

“그러게...”

우리가 있으니 마물과 도적의 기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보답으로 고기와 술을 잔뜩 받은 덕에 사냥하지 않아도 당분간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다.

마차 짐칸에 가득 쌓인 먹거리를 돌아보며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자 라디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래도... 마을이 얼마나 발전됐을지 기대되네요. 그 왜, 저희가 이곳에 처음 들렀을 때는 굉장히 낙후된 곳이었잖아요.”

“그러게... 쓸데없이 물가만 비싸고 편의 시설도 별로 없었지...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곳도 여기구나..”

또 본격적으로 내 모험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

그땐 정말 거지나 다름없는 무일푼 신세였는데...

“...그럼 한번 가보실래요?”

“응? 어딜...”

“크누트 선술집이요. 그 건물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

“그, 그건 안 돼!!”

“....?”

“아, 아니 그냥 거긴 좀 껄끄러워서...”

“...그래요?”

라디가 고개를 갸웃하며 날 올려다봤다.

나는 녀석의 연색 머리칼을 푹 쓸어주고는 이제 손에 익을 대로 익은 고삐를 쥐고 마차를 앞으로 몰았다.

이제 마차 대여소를 찾아서 마차를 반납해야 할 터.

한데...

“자, 잠깐...! 저게 뭐야?!”

완만한 언덕을 올라 던전 마을이 있었던 곳을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이전에 없던 거대한 성채가 지어지는 중이었다.

밧줄을 이용해 분주히 성문을 끌어올리는 노역꾼, 커다란 석재를 운반하는 정체 모를 대형 마물,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북적거리는 모험가와 인파를 보고 경악하자 아리엘이 마차 창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우와... 여기도 엄청 발전했구나... 던전이 발견된 이후로 와 보는 건 처음인데 아예 못 알아보겠어.”

“뭐, 뭐야?!! 여기가 그 던전 마을이라고!? 벌써 성벽을 저만큼이나 쌓아 올렸단 말야?”

“...여기 주민들은 완전 계 탔네.”

“그러게요... 완전히 환골탈태했어요. 이러다간 곧 베라스틴을 추월할 수도 있겠는데요?”

지난번에 나와 라디가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시점이 두 달 전 즈음인데 벌써 이렇게까지 번창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발전 속도가 빠른 걸까.

마차를 몰고 언덕을 내려가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자 사방에서 혼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다들 빨랑빨랑 움직여!! 기한 내에 완공해야 한다!! 거기 너! 허리 펼 생각 말고 일해!!”

“아고... 죽겠다... 우리는 언제 던전 안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시원한 과실 음료가 단돈 2페니!! 새콤달콤한 코코 열매도 있습니다!!”

“자, 잠깐!! 거기 깔리지 않게 조심해!!”

­부오오오오오!

­쿵!! 쿵!!!

상인들이 수레에 상품을 싣고 돌아다니며 요란하게 소리쳤다. 막 던전 마을에 도착해 흥분한 모함가들이 마차 옆을 지나며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워댄다.

공사 현장 중심에서는 코뿔소와 메가케롭스를 합쳐 놓은 듯한 생명체가 느릿느릿하게 움직였고,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땅울림이 일며 인부들의 다급한 노성이 들려왔다.

나는 밧줄로 석재를 견인하는 몬스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라디야...! 저 마물은 대체 뭐야...?! 덩치가 무슨 집채만 한데... 어깨까지 높이가 오 미터는 족히 넘잖아...!”

“아 저건... 헤비 코도네요. 몸집은 크지만 온순하고 힘이 세서 물자 운반용으로 종종 쓰여요. 대신 너무 굼떠서 장거리 운송에는 부적합하지만요.”

“그, 그럼 왜 그런 몬스터를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못 본 건데? 그렇게나 유용한 마물이면 베라스틴에도 한 마리쯤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음... 여러 이유가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큰 건 비용 때문이죠. 초식성인데 하루에도 풀을 엄청나게 먹어대서 일주일이면 주변 목초지가 깡그리 씨가 말라버릴 지경이라고 해요. 국내에 개체 수도 얼마 없어서 왕실 측에서 따로 관리한다고도 하고... 저 애도 아마 왕도에서 데려온 걸 거예요.”

“그래, 소년! 내가 있던 제국은 각 도시마다 헤비 코도가 한 마리씩 있었거든? 그래서 잘 아는데 쟤네 똥이 진짜 장난 아냐.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서 사람만 한 똥을 무더기로 싸질러놓는데 처리하기도 힘들고 간신히 치워놔도 바로 다시 싸놓거든. 또 냄새는 어찌나 고약한지...”

니아가 코를 틀어막고 손을 휘휘 젓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기야, 저런 마물은 몸집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열량도 장난 아닐 테니까.

‘그러고 보니... 아시아코끼리의 하루 식사량이 백 킬로그램 정도 한다고 했던가...’

단순 계산으로만 일 년에 36톤 분량의 목초지를 먹어치운다는 말이 된다. 더군다나 중간중간 영양 균형을 위해 과일과 채소도 섭취해줘야 할 테고, 배설량은 그의 1.5배에 이른다.

저 마물은 얼핏 봐도 그것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테고.

나는 고삐를 잡아당겨 멀찌감치 우회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남루한 차림의 사내들이 악취가 뿜어나오는 갈색 덩어리를 삽으로 퍼 나르고 있었다.

눈앞을 지나는 용병 무리에 잠시 정차한 사이, 마차에서 빼꼼 눈만 내밀고 신기하게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실비와 란이를 보며 피식 웃자 아리엘이 내 목덜미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도란, 그럼 이제 우리 어떡할 거야? 마차를 반납한 다음에는 할 것도 없잖아. 아니면 바로 던전으로 들어가게?”

“음... 그것도 괜찮지만...”

나는 슬쩍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은 요 던전 마을에서 하루 쉴까 하는데 다들 괜찮아?”

“어? 바로 입장하는 거 아니었어?”

“그래도 되긴 하는데 그랬다간 편히 휴식할 수가 없으니까. 던전 안에서는 여러모로 신경 쓸 것도 많고 사흘 동안 마차를 타고 오면서 다들 피곤할 테니 오늘 하루는 여관에서 푹 쉬고 내일 들어가자. 어때?”

“나는 좋아! 던전 마을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마침 잘됐다!”

“저도 찬성이에요. 사흘이나 마차를 타고 오니 허리가 욱신거려서... 물가가 비쌀 테니 이것저것 할 여유는 없겠지만요.”

“...저는 주인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됴란? 됴란!!

“그래, 그럼 거의 결정된 것 같은데... 니아 님도 괜찮아요? 하루라도 빨리 길드로 복귀하셔야 하는 게...”

“응... 괜찮아! 이제 와서 하루쯤 더 늦는 거야 큰 차이도 없거든! 난 소년하고 같이 있을래!! 너무 좋아!!”

“네, 그러면...”

나는 웃으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사람을 치지 않게 부드럽게 운행하며 마차를 성벽 인근으로 몰자 상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상품을 권유했다.

부드럽게 거절하고 약도에 그려진 대로 마차 대여소가 밀집된 곳에 도달하자 베라스틴에서도 보았던 상호의 건물이 나왔다.

무탈하게 마차 반납 수속을 마치고 길거리로 나오니 이젠 단단한 지면의 감촉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라디가 빌린 수레에 가득 쌓인 짐을 응시하더니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숙박할 곳을 먼저 찾고 마차를 반납할 걸 그랬나 봐요.”

“그러게... 나도 그 생각 중이었어. 던전 안 깊숙이 들어가면 개미를 부리면 되니까 괜찮긴 한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옮겼다. 수레를 이끌고 기다랗게 늘어선 공사판을 따라 거닐자 미완성인 성벽 안쪽으로 드문드문 건물들이 보였다.

이전에는 마을이랑 던전이 별개로 분리되어있었는데 규모가 확장되면서 통합된 모양. 덕분에 완공되기 전까지 입장할 때 줄을 서지 않아도 돼서 편리하지만.

다른 모험가들을 따라 모호한 도시 경계선 안쪽으로 들어서서 조금 더 이동하자 눈에 익은 거리가 나온다.

이국적인 가로수와 벽돌 깔린 대로. 왕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만 같은 건축 양식. 얼굴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나오는 행인들.

‘메다올리눔 던전 고급 여관 거리’ 라고 적힌 팻말을 지나치며 좋은 곳이 없을까 살피고 있자니 문뜩 라디가 내 소매를 툭툭 잡아당겼다.

“도란님, 도란님! 저기 저 건물 그때 그 여관 아니에요? 외관이 낯이 익은데...”

“그때 그 여관이라니? ...혹시 우리가 던전에서 나온 직후에 머물렀던 곳 말하는 거야?”

“네! 제가 짐 때문에 빌헴 마을에 다녀오기로 해서 잠시 헤어졌잖아요. 그래서 하루 동안 호텔에 틀어박혀서 함께 아쉬움을 달랬고요. ...추억이네요.”

“그러게...”

약 한 달이나 서로를 못 볼 거라 생각해 정말 애틋하고 격렬한 하루를 보냈었다.

하지만 그 뒤로 불과 며칠 만에 아리엘의 저택에서 단둘이 와인을 기울이는 모습을 들켜버렸지만.

순간 그때의 아찔한 기억이 떠올라 잠시 멈춰서자 아리엘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무슨 일 있어 도란?”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딱히 끌리는 여관이 없으면 저기 한번 가볼래?”

“아는 곳이야?”

“응, 이전에 라디랑 들린 적이 있거든. 내 기억으로는 조식도 괜찮았고 시설도 나름 나쁘지 않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객실 안쪽에 욕조랑 사우나가 마련되어 있거든.”

“뭐어?! 그렇다면 당연히 찬성이지!! 안 그래도 사흘이나 마차를 타고 오느라 찝찝했거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실비도 괜찮지?”

“사우나...? 가 뭡니까?”

“아, 음... 그러니까 방 안의 공기를 뜨겁게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건데...”

“...고문 기구입니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후드 아래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실비와 녀석에게 열심히 손짓해가며 설명하는 아리엘을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들에게 짐을 맡기고 라디와 니아를 양팔에 낀 채로 건물 안에 들어서자 데스크에 서 있던 여성 종업원이 밝은 미소로 맞이해왔다.

“어서 오세요! 루구두눔 여관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일행은 세 분... 흐, 흑발...?”

“....”

종업원이 흠칫했다. 당당하게 들어오는 내 머리칼을 보고 놀란 눈치.

...그러고 보니 원래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었지. 그간 베라스틴에서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졌나 보다.

“아차... 까먹고 있었네... 니아 님, 혹시 길드 패 있어요? 제건 짐 속에 있어서...”

“응, 잠깐만... 여기 어디다가 넣어놨을 텐데...”

니아가 가슴 안쪽을 뒤섞거리더니 금으로 장식된 붉은 패를 꺼내들었다.

아니 근데 당신 지금 그거 어디서 꺼낸 거야.

“...신원 증명은 이거면 될까요? 짐이 많으니까 수속은 최대한 간편하게 해주셨으면 하는데...”

“하, 하지만 저희 여관에 흑발인 남성을 들이는 건 좀... 자, 잠깐...! 이건 붉은 매 길드 패?!!”

종업원은 내 얼굴과 금판을 몇 번이나 번갈아 쳐다보다 니아에 시선이 미치더니 당장에라도 졸도할 것처럼 경악했다.

그녀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인 줄도 모르고 제가 무례를...!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보다 남는 방이 있나요? 여섯 명이 이용할 건데 침실은 두 개로 나누어져 있으면 좋겠어요. 방음도 좀 잘 되는 곳으로요.”

“예, 옛...! 저희 여관에서 가장 좋은 객실이 남아있습니다! 귀빈께서 말씀하신 조건에도 부합하고, 널찍한 야외 욕조에서 따뜻한 온욕과 스파를 즐기실 수도 있습니다! 조식도 서비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용은요?”

“하루 숙박에 48실링입니다!”

“48실링이라... 네, 그럼 그 방으로 할게요. 바로 체크인하려는데 괜찮죠?”

하루 숙박치곤 몹시 비싼 편이지만, 원체 비싼 이곳의 물가와 란이를 포함해 일행이 여섯 명이나 된다는 걸 감안하면 참작할 수 있는 금액이다.

더군다나 니아와 아리엘도 같이 비용을 부담할 테니.

한데...

“음...?”

라디가 데스크에 놓인 가격표를 유심히 훑어보더니 의아하게 내 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란님, 혹시 저희가 저번에 이용했을 때 숙박료가 20실링이었어요?”

“음... 아마 맞을걸? 이인실이었으니까.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아, 아니 그야...”

라디가 겸연쩍게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때는 진짜 터무니없는 액수처럼 느껴졌는데 왠지 지금은 적게 느껴져서요... 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지 여전히 비싼 금액인 건 맞지만...!”

“...실은 나도 그래.”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라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능력이 올라간 만큼 씀씀이도 늘었고, 아리엘 함께 저택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왔으니까.

새삼스럽지만 성장한 걸 실감하며 종업원에게 숙박료를 지불하고 객실을 안내받으려는 차, 문뜩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맞다, 니아 님. 저랑 라디는 이대로 올라가서 짐을 풀고 정리하고 있을 테니 니아 님은 실비랑 같이 나가서 던전 지도를 좀 구해와 주실 수 있으세요? 그새 바뀐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붉은 매 길드가 주둔하고 있는 3계층까지 도달하려면 하나쯤은 필요...”

“야.”

“...네?”

“너 내가 호구로 보여?”

“....”

입을 다물자 니아가 서늘한 눈동자로 내 멱을 움켜쥐며 읊조렸다.

“나 보내놓고 라디랑 아리엘이랑 셋이서만 야한 짓 할 속셈이잖아!! 다 알거든?!”

“.....”

“너 당분간 내가 있을 때는 그럴 생각 꿈도 꾸지 마. 할 거면 나도 껴서 해. 아니면 똑같이 참던가.”

“....”

괜히 이럴 때는 눈치가 빨라가지고...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며 층계를 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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