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화 〉 여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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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여정 #3
우리는 다 같이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니아가 베라스틴에 머물 동안 이용했던 호텔에 비하면 몹시 아담하고 단출하지만, 충분히 멋지고 깔끔한 객실이다.
란이를 수통에서 빼내 준 뒤 짐을 풀지 않은 채 현관에 켜켜이 쌓아두자 니아가 우다다 침실을 확인하고는 눈동자를 빛내며 소리쳤다.
“소년!! 여기 침대 엄청 커!! 침대 위에서 운동회 해도 되겠는데?!”
“그래요? 어디... 정말이네요. 저희 저택 침실만 해요.”
“도란! 여기 봐!! 야외 테라스랑 바비큐 그릴도 있어! 이따가 저녁에 해 먹기에 딱 좋겠다...”
“드링크바 메뉴판도 있어요. 여기서 주문하면 객실로 배달해주나 봐요. 비용이 어디 보자... 무료?!”
됴란!!
깃털 침대를 손바닥으로 눌러보며 감탄하는 니아, 흥미롭게 야외 공간을 살펴보는 아리엘, 눈을 부릅뜨고 메뉴판을 살피는 라디와 영문도 모르고 좋아하는 란이..
한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한 인물이 보였다.
“왜, 실비야 무슨 문제 있어?”
“그, 그게...”
“....?”
“저... 역시 저 같은 노예가 이런 곳에서 숙박하는 건...”
“....”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려다 멈칫했다.
나는 짐짓 헛기침하곤 아이를 대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내일이면 던전에 들어가잖아. 잘 쉬어주는 것도 전력 보충을 위해 정말 중요한 일이야. 게다가 이미 숙박료도 냈으니까.”
“...하지만 저 때문에 굳이 비싼 객실로 고르셨지 않습니까. 저는 근처의 허름한 여관에서 자고 와도 되는데...”
“괜찮다니까. ...그러면 대신 일을 좀 거들어주는 건 어때?”
“일 말입니까?”
“그래, 네가 정 미안하다면 노동력으로 갚는 거지. 우선... 이 짐 속에서 세면도구를 좀 꺼내줄 수 있어? 아마 앞주머니에 따로 넣어두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실비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더니 발치에 놓인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녀석도 나와 니아처럼 편하게 대해줬으면 하지만, 은근히 부채 의식을 느끼는 실비에겐 아직 이 정도 거리감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니아까지는 좀 그렇고 라디나 아리엘 정도로..
현관에서 벗어나자 니아가 자석처럼 내게 찰싹 들러붙더니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야릇하게 속삭였다.
“그럼 이제 소년은 뭐 할 거야? 목욕? 식사? 아니면...”
“일단 한숨 자려고요. 오늘 새벽부터 계속 달려왔으니 너무 피곤해서...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자기에도 좀 찝찝한데... 킁.”
나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의 니아를 떼어놓고는 팔꿈치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았다. 오늘 아침에 옷을 갈아입은 탓인지 별다른 악취는 느껴지지 않지만 찐득찐득하고 몸도 가려운 게 영 기분이 별로다.
더군다나 가축 구린내가 밴 마차를 타고 온 탓에 머리칼에서 말 궁둥이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일단 욕조에서 좀 씻을까요? 이따가 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저녁에 한 번 더 써도 되니까.”
“좋아! 난 찬성!! 그럼 지금 바로...”
“자, 잠깐!!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응? 뭐하긴, 옷 벗는데? 그래야 씻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소년도 빨리 벗어.”
“...탈의실에 가서 벗으세요. 그리고 저는 다들 목욕을 마치고 난 뒤에 따로 씻을 거예요. 이대로 니아 님이랑 같이 들어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한데 제가 미쳤다고 그러겠어요?”
“응? 꼴리면 그냥 그 자리에서 으쌰으쌰 해도 되잖아. 안될 거 있어?”
“아, 안 돼요! 그리고 그런 상스러운 말 좀 쓰지 마세요!”
솔직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암시장에서 붉은 매 길드와 대면하기 전까지는 자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어떤 후폭풍을 감내해야 할지 모르니까.
예컨대 니아를 볼모로 날 길드에 강제 입단시킨다던가.
‘아니, 길드 패를 양도받은 시점부터 이미 반쯤 비공식 길드원이기는 하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녀들이 욕탕을 이용하고 나올 때까지 마땅히 할 것도 없는 바, 바비큐라도 준비해둘 심산으로 상인들로부터 받은 고기를 선별하고 있자니 라디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아니면... 그냥 다 같이 들어가실래요?”
“응? 그게 무슨...”
“그야 그렇잖아요. 나중에 따로 씻으면 불편하기도 하고 기껏 받아둔 물도 더러워질 텐데... 같이 들어가면 떠들썩하고 좋잖아요? 대신 란이와 실비도 있으니 신체 접촉은 자중하기로 하고요. 몸은... 수건으로 가리면 될 테고.”
“으음... 그런 조건이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불안하게 니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약속 지키실 수 있으세요? 덮치지 않겠다고...”
“응!!! 당연하지!! 나만 믿어!!”
“.....”
아무리 봐도 불안한데...
“...그러면 다들 쉬고 있다가 조금 뒤에 들어와. 나는 욕조에 물 받아두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어디 보자... 요게 좋겠네.”
고기를 들고 야외 욕조와 이어진 탈의실로 향하자 아리엘이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응? 목욕하는데 고기는 왜 들고 가?”
“바비큐 그릴도 야외에 있다며. 기왕 하는 거 물놀이하다가 중간중간 나와서 고기도 좀 집어 먹고 하게. 재밌지 않겠어?”
“응!! 말만 들어도 신난다! 엄청 기대돼!!”
“그래, 그럼 불도 피우고 욕조에 물을 채울 때까지 좀 걸릴 테니까 다들 푹 쉬고 있어.”
손을 흔들며 발길을 옮겼다. 탈의실에 들어서서 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는 옷을 벗은 뒤 수건을 단단히 허리에 둘러맸다.
이어서 대망의 야외 욕탕으로 발을 내딛자ㅡ
“오... 이건 좀 멋진데...?”
객실보다도 커다란 야외 공간. 여섯 명이 들어가고도 충분할 크기의 편백나무 욕탕. 곳곳에 비치된 태닝 의자와 파라솔.
도심지 한복판에 위치한 곳이지만 사방이 빽빽한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프라이버시가 보장될뿐더러, 구석에는 아리엘이 외쳤던 대로 바비큐 그릴과 사우나가 완비되어 있었다.
마치 여름 별장에 온 듯한 광경.
푸른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나무 욕조로 다가가자 은빛 사자가 조각된 수도꼭지와 펌프가 보였다.
혹시나 싶어 펌프 손잡이를 쥐고 위아래로 왕복하자...
끼릭.. 끼릭...
콰르르르!!!
“오오...! 나온다...!!”
맑고 투명한 물이 쏟아졌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는 시종이 일일이 온수를 떠서 옮겨주었는데 이 객실에는 수도 장치가 마련된 모양.
“이야... 이래서 편리하다니까...”
실제로 지구의 중세였다면 수도 시설은커녕 목욕조차도 터부시되었을 텐데 이런 점은 닮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아무래도 현대 문명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위생 문제는 몹시 민감한 사항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 세계도 원래는 더 발전한 곳이라고 했던가...’
본디 더 번성했지만 약 다섯 세기 전에 발발했던 대전쟁 탓에 문명이 퇴보했다고 들었다. 우리의 지금 목표인 고대 유적처럼 이따금씩 현시대의 이해를 초월하는 유물이 출토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혹시 고대 유적들을 탐사하다 보면 과거의 내가 이 세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 수 있을까?
“...아니, 하지만 그래도 그게 말처럼 쉬울 리도 없고..”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고는 눈앞에 집중했다. 일단 물이 나오는 걸 확인했으니 펌프질을 멈추고 바비큐 그릴로 향한 뒤 불씨통에서 불씨를 빼내 불쏘시개에 불을 붙였다.
이대로 불길을 키우고 고기를 얹으면 바비큐 준비는 얼추 끝날 터.
한데...
“그... 벗고 들어가는 겁니까?”
“음... 우리는 벗을 건데 실비는 부끄러울 테니까 옷 걸쳐도 돼. 어떡할래?”
“...그렇다면 저도 벗고 들어가겠습니다. 착의한 상태로 입욕했다간 내일 던전에 젖은 빨래를 들고 입장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어차피 나중에 다 같이 탈의할 거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 그래도 타올은 걸쳐야 한다?”
“저... 그럼 속옷도 벗어야 합니까?”
“응? 속옷은 뭐... 그 정도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속닥속닥..
열심히 그릴에 불을 지피고 있자니 탈의실 쪽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에 허둥거리며 몸을 가릴 곳을 찾고 있자니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탈의실 문이 열리고 흑발의 묘인족 소녀가 다소곳이 인사하며 들어왔다.
알몸으로.
“아, 아니 잠깐...!!”
황급히 두 눈을 감았다. 메두사를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물러나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아 조심스레 손가락 사이를 엿보자...
“뭐, 뭐야... 입고 있었구나...”
피부가 하얗다 보니 몸에 두른 수건을 살결로 착각했던 모양. 전라 상태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니 다행.. 맞나?
실비는 슬럼가에서 살아온 영향으로 발육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는 뜻. 본인이 직접 성인이 맞다고 확언했으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있지만 없는, 대평원처럼 평탄한 실비의 흉부를 보면 꼭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ㅡ
“주인님.”
“예, 옛...?!”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아아... 그, 그래! 그럼 일단 이 불을 좀... 아, 아니 잠깐!!”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현실로 되돌아와 외쳤다.
“왜, 왜 네가 여기 있는 건데?!! 방에서 쉬고 있으라니까...!”
“도란님 혼자서 모든 걸 준비하게 할 순 없다고 라디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그럼 다른 사람도 많잖아...! 아리엘이라던가! 왜 굳이 네가...”
“나머지 세 분이 도란님과 단둘이 있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상의 끝에 차선책으로 저를 보낸 것입니다. 또 주인님의 일을 돕는 건 노예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
뒷말을 삼켰다. 제법 그럴싸한 이유. 실비도 묘한 고집이 있다 보니 이렇게 되면 어지간해서는 안 물러나려 할 텐데...
만반의 준비까지 하고 왔는데 이대로 다시 돌려보내기도 곤란하고...
“...알았어. 그러면 이 숯에 불 지피는 것 좀 도와줄래? 이대로 부채를 흔들면서 불씨를 키워주기만 하면 돼. 나는 저기 사우나 좀 확인하고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왜,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그게... 욕조에는 물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아, 그건 따로 시킬 애들이 있어서. 잠시만.”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물러났다.
이내 바닥을 짚으며 정신을 집중하자 사방에서 칠흑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검게 물든 발치를 돌아보며 당황하는 실비를 귀엽게 쳐다보고는 손을 떼자 쪼꼬미 모드의 노래기와 개미가 나란히 튀어나와 날 올려다봤다.
우옹?
크샤아앗...!
“그래, 왔냐? 별건 아니고 저기 저 은색 막대기 보이지? 저거 위아래로 당기면 물이 나오니까 둘이서 여기 이 욕조 좀 가득 채워놔.”
.....
“뭐야, 둘 다 표정이 왜 그래. 밥값 해야지. 특히 개미 너는 너무 쓸데없이 많이 먹어서 탈이야. 빨리 일해.”
크샥...
우옹...
개미와 노래기가 꾸물꾸물 욕조 쪽으로 다가가더니 양쪽에서 펌프 레버를 붙잡고 위아래로 왕복하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이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에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래기입니까?”
“아, 맞아. 용케도 한눈에 알아봤네? 다들 지네로 착각하던데.”
“이전에 너무 굶주린 나머지 주워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맛도 역하고 배탈이 나서...”
“응, 얘네는 독이 있거든. 그래서 함부로 먹으면 안 돼. ...나도 배고파서 잡아먹은 적이 있었는데 은근히 공통점이 많네?”
“.....”
실비는 천천히 내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열심히 꾸물거리는 개미와 노래기를 빤히 응시했다.
잠시 후, 연분홍색 입술을 비집고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응? 뭐가?”
“...제가 슬럼가에서 지낼 동안 돌보아주셨던 분이 있지 않습니까. 주인님께서 그분의 지인이라고 하셨을 때, 단순히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지어내신 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힘을 쓰시는 걸 보니...”
“아...”
그러고 보니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지.
안디라 님이 그림자를 조종해 슬럼가의 불량배를 해치워줬다고.
내 능력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은 건, 그때 안디라 님이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목격해서 그랬던 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니 실비가 쪼그리고 앉아 노래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섭지 않아?”
“예... 어째선지 친숙한 느낌이 듭니다. 꼭 오랜 친구처럼 반갑고... 기쁘고... 어째선지 가슴이 먹먹합니다.”
“.....”
“...제가 왜 이러는지 혹시 알고 계신가요?”
“.....”
나는 실비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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