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 여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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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여정 #4
“자, 됐어. 다들 들어와.”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문을 열고 일행을 불러들였다.
손바닥으로 수온을 체크하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라디와 아리엘, 란이가 차례로 입장해 저마다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와... 여기도 엄청 예쁘게 잘 꾸며놨네요... 꼭 말로만 듣던 휴양지에 온 것 같아요.”
“그치? 나도 처음에 보고 딱 그 생각했어! 하늘도 푸르고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으니 너무 근사하지 않아? 주변 풍경도 이국적이고...”
됴란...!
라디가 가려하게 해그늘 진 얼굴로 야외 공간을 살펴보았다. 아리엘은 머리끈을 손목에 걸고 은발을 말아올리며 산뜻하게 미소지었고, 우리의 귀여운 운디네 소녀는 비취색 눈동자로 열심히 인간 세상을 눈에 담고자 두리번거렸다.
이미 몇 번 본 적이 있음에도 반라 차림의 라디와 아리엘을 마주하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데...
“응? 근데 니아는 어디 갔어?”
“니아 님이요? 방금까지 저희랑 같이 있었는데... 아, 저기 들어오네요.”
끼익...
“니아 님? 어디 갔다가 이...”
“.....”
뒷말을 상실했다.
살포시 탈의실에서 걸어나온 니아의 나신을 보고 눈길을 빼앗겨버렸기에.
야생마처럼 늘씬하게 뻗은 다리. 매끈하면서도 건강함이 느껴지는 수인의 탄력적인 피부. 바람이 불자 살짝 움찔하는 동그란 귀와 수건 아래로 삐져나온 얼룩무늬 꼬리.
한낮의 태양이 새하얀 어깨에 닿아 아름답게 부서지고, 금발을 묶어서 올린 탓에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니아.
....두근.
평소의 장난기는 어디가고 몹시 어른스러운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자 그녀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때 소년, 반했어?”
“...네.”
“으흠... 그렇게 쉽게 긍정해버리면 나도 살짝 부끄러운데...”
니아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전신을 돌아보았다. 수줍게 웃음을 터트리며, 춤을 추듯 유연하게...
한데 이대로라면 수건 기장이 짧아서 위험...
...푸욱!
“응...? 왜 갑자기 코를 움켜쥐고 그래?”
“...니아 님, 혹시 속에 아무것도 안 입었어요?”
“응? 그야 당연하지! 원래 목욕할 땐 다 벗는 게 예의 아냐? 심지어 란이는 수건도 안 걸쳤는데?”
“란이는 어린애잖아요. 정령이고.”
“흐음...?”
니아가 란이를 돌아보고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란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망하게 눈망울을 끔뻑거릴 뿐이었지만.
“으흠... 얘 내가 보기에는 그냥 어린애가 아닌 것 같은데...?”
“란이가 뭐요.”
“아니, 내가 많이 연기해봐서 아는데 이거 암만 봐도 내숭...”
“착한 애한테 이상한 바람 불어넣지 마세요. 우리 란이가 얼마나 순수한데.”
“으흠... 아니, 저거 진짜 연기 같은데.. 지, 지금 봤어?! 방금 나한테 메롱 했잖아!! 너희들도 봤지!?”
“네네 알겠어요 니아 님.”
“정말이라니까!!”
나는 니아의 등을 다독이며 구석의 간이 샤워실로 데려갔다. 다행히 칸막이가 세워져 있었기에 눈치 볼 것 없이 빠르게 몸을 씻은 뒤 중앙으로 나오자 오아시스처럼 매혹적인 푸른 수면이 눈앞에 도래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은 뒤 동시에 욕조 안으로 뛰어들자
풍덩!!
“꺄앗...!”
“차, 차가워?!”
“차갑네...?! 온수가 나온다길래 당연히 뜨거울 줄 알았는데...”
“네, 그냥 물놀이도 할 겸 일부러 시원한 물로 받았어요. 온욕도 괜찮긴 한데 지금은 햇볕이 너무 쨍쨍하니까 그건 이따가 밤에 하는 게 어때요?”
“응! 난 좋아! 마침 덥던 참인데... 안 그래 아리엘?”
“네! 꼭 피서라도 나온 기분이에요.”
“.....”
‘피서라...’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어차피 던전에 입장해도 계층 깊숙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안전하게 탐사할 수 있을 터, 지금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오버 스펙이다.
그간 라디와의 연계도 더욱 긴밀해졌고, 나도 몰라보게 성장했다. 이제는 아리엘이 있으니 다쳐도 바로 회복할 수 있고, 실비는 영주성 지하에서 보았듯 상당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란이는 물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력을 발휘한다.
무엇보다도 니아가 있으니 평범한 마물이나 도적 따위는 상대도 안 될 테고.
이렇게 보면 참 완벽한 멤버인데...
“무슨 생각 하세요?”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그거 항상 차고 있네?”
나는 라디의 손목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소형 쇠뇌 말고도 라디의 팔에 추가된 한 가지 물체. 푸른 보석이 박힌 팔찌.
라디가 단아하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겨 팔찌를 어루만졌다.
“당연하죠. 무덤까지 가져갈 거예요. 도란님이 선물해주신 건데 다음 생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해야죠.”
“그래? 그렇게 아껴준다니 고맙네...”
“도란, 봐봐! 나도 도란이 선물해 준 목걸이 차고 있다? 어때, 이쁘지?”
“응, 진짜 잘 어울려. 엄청 예쁘다.”
푸르른 수면에 비쳐 보이는 하늘. 광활하게 뻗어나간 상공. 그 아래 늘씬하게 선 아리엘.
그녀가 욕조 안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올려다보는 구도가 되었고, 아름다운 여체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선물해준 목걸이와 꼭 들어맞는 아쿠아마린 색 눈동자. 모성애의 상징인 부드럽고 유순한 가슴과, 허벅지를 타고 아찔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
젖은 수건이 피부에 들러붙어 뇌쇄적인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수건 끝에 고였던 물방울이 똑 떨어져 수면에 파문을 자아냈다. 이에 폭력적인 충동을 이끌어내는 수줍지만 관능적인 눈빛...
뇌리에 속삭이는..
“...만져볼래?”
“.....”
끄덕.
홀린 듯이 손을 뻗자ㅡ
탁!!
“안 돼 소년! 욕탕 안에서는 건전하게 놀기로 약속했잖아!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어겨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제길.”
설마설마 니아한테까지 꾸지람을 듣게 될 줄이야.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손을 거두자 그녀가 슬금슬금 내 팔 사이로 쏘옥 들어오더니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면... 그냥 마음 가는 데로 해도 되긴 하는데... 란이랑 실비는 방에서 쉬라고 하고 어른들끼리...”
“.....”
아니 그렇게 어린 외견으로 어른이라고 해도 좀 어색한데 말이죠...
“...안 돼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저도 최대한 참고 있으니까 더 이상 자극하지 마세요.”
“응? 일부러 자극하는 건데? 보고 꼴리라고.”
“그,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 좀 쓰지 마세요!! 란이랑 실비가 보고 뭘 배우겠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실비는 우리와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날 테고, 란이는 나보다도 훨씬 연상 아니, 어쩌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어린이는 어린이다.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안 그래도 힘든데...’
니아가 저택에 오고 난 뒤로 일주일 넘게 여러모로 자중하지 않았던가.
드넓은 들판을 뛰놀던 동물을 동물원에 옮겨놓으면 며칠 만에 폐사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여인들과 동거하며 마음껏 사랑을 나누다 돌연 강제로 금욕하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이러다 언젠가 정말 사고 칠지도 모르겠는데...
“어? 잠깐, 혹시 여기 있던 내 머리끈 못 봤어?”
“네? 머리끈이라면...”
“으응... 아무래도 실수로 물에 빠트린 모양인데...”
“아, 혹시 저거 아냐? 저기 반짝이는 거...”
니아가 내 품에서 일어나더니 욕조 바닥을 더듬었다.
당연히 내게서 뒤돌아선 채 허리를 굽히는 자세가 되었고...
꼴릿!
됴란...?
“나, 나는 슬슬 나가서 고기 굽고 있을게!! 다들 천천히 놀다가 와!”
“응?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괘, 괜찮아!!”
나는 엉거주춤 물 밖으로 나와 황급히 바비큐 그릴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등에 꽂히는 의아한 시선을 뒤로 한 채 허겁지겁 칸막이 뒤로 숨자 그제야 안도감이 몰려든다.
‘위험했어...’
안 들켜서 다행이다.
...란이는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감지한 모양이지만.
나는 차가운 냉수를 끼얹어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고는 점심 준비에 착수했다. 마차를 타고 오며 간단한 건량과 보존식으로 허기를 때울 때부터 이 순간을 고대했던 바, 던전에서 조리할 때 쓸려고 챙겨왔던 향신료와 치즈, 으깬 토마토와 양파 등을 배합한 특제 살사 소스를 꺼내들자 간이 탁자가 먹거리로 가득 찼다.
충분히 예열된 불판 위에 고기를 얹으니 표면의 기름기가 지글지글 끓으며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한데 한창 점심 준비에 몰두하던 도중, 뒤에서 나무 바닥재를 밟는 소음이 들려왔다.
“저도 돕겠습니다.”
“...실비?”
나는 내 등 뒤에 선 인물을 확인하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서 놀고 있어도 되는데... 아까 내 입으로 도와 달라고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어. 너도 마차를 타고 오면서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피곤할 텐데 쉬고 싶지 않아?”
“주인님을 돕는 것이 제 의무이고 기쁨입니다. 제 자의로 하는 것이니 개의치 마시길.”
“.....”
“....그리고 계속 탕 안에 있기가 좀 곤란해서..”
“응...?”
실비가 수건에 둘러싸인 제 흉부를 응시하고는 물끄러미 날 올려다봤다.
“안주인님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크더군요. 혹시 그쪽이 취향이십니까?”
“뭐, 뭐...?”
“취향이십니까?”
“....”
왠지 오한이...
나는 신중하게 대답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건 그냥 수많은 매력 중 하나일 뿐이야. 정말 중요한 건 내면이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야.”
솔직히 아예 안 중요하다고는 말 못 하지만, 나는 라디와 아리엘을 가슴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가요...”
그제야 실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니 현답이었던 걸까...?
“크흠... 그러면 여기 이 접시들 좀 저 테이블로 옮겨줄 수 있겠어? 그리고 고기도 거의 다 구워졌으니까 배고픈 사람 있으면 물 밖으로 나오라고도 전해주고.”
...꾸벅.
실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접시를 양손에 들고 파라솔로 향했다.
처음 영주성에서 구조했을 땐 어떻게 될까 걱정도 많았는데 빠르게 일상에 적응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아직 좀 딱딱한 감이 있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슬럼가에서 계속 자라온 것 치고는 묘하게 어휘가 유창하고 생각이 깊은데...’
혹시 어디선가 말을 배운 적이 있는 걸까?
나는 조용히 테이블에 그릇과 식기를 세팅하는 실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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