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화 〉 여정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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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여정 #6
“흐응~♪”
“.....”
“으흐흥~~♬ 아, 입장 티켓을 구해야 하는구나... 내가 받아올 테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어!”
쪽!
“....”
던전 앞 마을 여관에서 푹 쉬고 일어난 다음 날.
니아가 내 볼에 뽀뽀하더니 던전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대열에서 벗어나 매표소로 향했다.
라디가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그녀의 걸음걸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했어요?”
“뭐, 뭘...”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아, 아니 알긴 아는데...”
“아무리 봐도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은데... 니아 님 얼굴에 반질반질한 윤기가 흐르는 걸 보니...”
“.....”
“더군다나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콧노래까지 부르고... 정말 아무 일 없었어요?”
“.....”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저 그게... 솔직히 말하자면 좀 뭐가 있긴 했어.”
“무슨 일인데요?”
“그... 어젯밤에 하려고 했거든...?”
“잠자리요?”
“....”
무언으로 긍정하자 라디가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리엘이 난감하게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려고 했다는 건... 결국 미수로 그쳤다는 소리네?”
“.....”
끄덕.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겠어?”
“그러니까 그게 실은...”
나는 한차례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힘겹게 대답했다.
“...내가 어제 잠에서 깨어나고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사우나에 들어가 있었거든. 그러다가 니아가 들어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평소에 스킨쉽을 거절하다 보니까 불안해하는 눈치더라고.”
“...그래서요?”
“그래서 잘 다독이고, 솔직한 얘기도 좀 털어놓다 보니...”
“설마 도란님 과거도 이야기했어요?”
“응...”
“그렇구나... 그렇다면 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어떻게 되긴 뭐... 속에 있는 걸 전부 까놓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렇고 그런 분위기로 넘어가고... 니아가 날 먼저 덮쳤는데... 아, 일단 앞으로 좀 가자.”
던전 입장을 위해 기다란 줄을 서 있던 중 대열에 공백이 생겼다.
나는 명절날 귀성길 고속도로처럼 찔끔 앞으로 이동하고는 도로 배낭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그렇게 니아가 날 바닥에 눕히고는 거의 삽입 직전까지 갔었는데... 너무 더운 거야. 계속 사우나 안에 들어가 있었고 장작도 거의 다 탈 때까지 지펴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같이 밖으로 나왔어.”
“...나왔는데요?”
“아니, 어차피 급할 필요도 없고 나왔으니까 뭐라도 좀 마시자 해서 점심에 남겨두었던 칵테일이랑 소시지랑 이것저것 좀 주워 먹었지. 마을 야경도 좀 구경하고 썬배드에 누워서 손도 잡고 이런저런 얘기도 좀 더 하고...”
“...거기까지 갔는데 안 했다고요?”
“응... 그게...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막판에 란이가 들어오는 바람에...”
악몽이라도 꾼 건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 들기에 몹시 곤란했었다.
나중에 놀아주겠다며 간곡히 종용해봤는데도 소용없었고.
라디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정말로 그게 전부...?”
“그래, 그래도 완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고 아쉬우니까 같이 온탕에 들어가서 있었어. 란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니까 키스까지는 좀 그래도 이곳저곳 뽀뽀하고 주위 좀 만져주고...”
“.....”
“암튼 그렇게 됐어. 아직 정식으로 고백한 건 아니지만 조만간 같이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아둬.”
나는 겸연쩍게 헛기침하며 말을 마쳤다.
슬쩍 눈을 굴려 쳐다보자 라디와 아리엘은...
“뭐...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니아 님이 저희에게 합류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니...”
“시간 문제... 그 정도였어...?”
“응, 니아 언니가 너 보러 베라스틴에 왔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어. 니아 언니는 심성도 착하고 우리랑도 잘 어울리니까 언제든 환영이지만... 일단 축하해... 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한가?”
“...고마워.”
따지고 보면 정말 쓰레기가 따로 없는 발언이었지만, 너그럽게 용인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미 같은 침대에서 자고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시점부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새삼 나는 정말 복 받은 남자구나.
하해와 같은 자애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라디와 아리엘을 꼬옥 끌어안자 니아가 저만치서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소년!! 표 구해왔어!!”
“뭐야, 벌써요? 한 십 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응, 길드 패 보여주니까 굽신거리면서 바로 건네주던데? 아, 그리고 우리는 입장하는 데 줄 설 필요 없데! 앞으로 오면 바로 들여보내 준다더라!”
“정말요?”
“응!! 이 던전은 우리 붉은 매 길드가 꽉 잡고 있잖아!! 우리 길드 단장인 아니스 쪽 가문이 암시장을 통치 중이기도 하고! 그리고 원래 A랭크쯤 되면 이런 건 보통 면제해주거든!”
“...하이랭커는 참 편리하네요. 그럼 바로 들어가죠.”
“응!”
우리는 묵직한 배낭을 주워들고 대열에서 벗어났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쾌청하게 갠 하늘 아래를 거닐자 여느 때처럼 호객 행위를 멈추지 않는 상인들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성큼성큼 던전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자니 주위에서 미심쩍은 시선이 날아와 뒤통수에 꽂혔다.
“뭐야? 저 사람들은 뭔데 줄도 무시하고 앞으로 가는 건데?”
“뭐, 귀하디 귀한~ 귀족 자제 파티거나 고위 관료... 자, 잠깐...! 저거 니아 아니야?!”
“니아?! 붉은 매 길드 전위 말이야?! 어디 어디!?!”
“금발에 작은 키... 표범 귀와 꼬리... 소동물처럼 귀여운 얼굴.. 맞는 것 같은데...? 잠깐, 그보다 옆의 저 남자는 대체 누구야?!”
“주변 여자들도 다들 하나같이 외모가 장난 아닌데... 혹시 왕도의 유망 귀족 중 하나일까...?”
“....”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발길을 옮겼다.
분명 비좁은 바위 굴이 고작이던 던전 입구에는 신전을 방불케 하는 석제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고, 삐까번쩍한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들이 화려한 장창을 걸머지고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옛날엔 기사 하면 무서운 이미지였는데...’
이젠 콧대에 헛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게 우스워 보일 지경이다.
나는 기사를 보고 잔뜩 심통이 난 라디의 손을 맞잡아주며 입구를 통과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는 파리조차도 스케이트를 탈 듯한 대리석 복도를 지나 안내원에게 던전 티켓과 길드 패를 보여주자 프리패스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겹기까지 한 종유석 동굴에 발을 디디고, 좁다란 계단을 통해 아래로 향하고 있노라니 니아가 앞서나가 날 돌아보며 두 팔 벌려 외쳤다.
“봐봐 소년! 너무 이쁘지 않아?!”
“...위험하니까 계단에서는 뛰지 마세요.”
“그러지 말구~ 저기 저 천장 좀 봐! 꼭 금가루를 뿌려놓은 모래사장 같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니아의 손길에 이끌려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연 석회 동굴. 기다란 종유관과 종유석은 계단 곳곳에 비치된 석유등의 불빛을 반사해 황금빛으로 반짝였고, 구석의 거미줄에는 여름철 빗방울 맺힌 창가의 빨랫줄처럼 치렁치렁한 물방울이 아롱거렸다.
니아의 소명한 눈동자가 세상을 눈에 담았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풍등처럼 수천 수만의 광채가 금빛 눈동자 표면에 빠져들어 물결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녀가 천장을 올려다보다 문뜩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쁘지?”
“네... 정말 아름답네요.”
“응응, 꼭 소년하고 이걸 보고 싶었어. 마치 던전에 들어온 걸 환영해주는 것 같아 설레지 않아?”
“그러네요... 그래도 위험하니까 뒤로 걷지 마세요. 또 저희 말고 다른 사람도 통행하니까 줄 맞추시고요.”
“피~ 깐깐해 소년~.”
니아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얌전히 배낭끈을 움켜쥐고 아래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던전 1계층은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에도 다시 왔네요 도란님...”
“그러게...”
지하임에도 전혀 체감이 안 될 정도로 밝게 빛나는 던전 이끼, 초원처럼 끝이 안 보이게 뻗어나간 들판, 파릇파릇한 목초를 부드럽게 흩날리는 바람.
풀밭 위에 드러누워 휴식하는 남녀와 아직 때도 안 탄 장비를 몸에 걸치고 기운차게 달려가는 신출내기 모험가...
변함없는 풍경과 변함없이 내 옆에 서 있는...
“이곳은 정말 그대로네요...”
“.....”
나는 라디를 잠깐 내려다봤다가 추억 어린 눈동자로 저만치 잡목림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게... 우리 둘이 들어왔을 때도 이랬는데... 여기서 물고기도 잡아다가 구워 먹고, 밤에 단둘이 반딧불도 구경하고 그랬지...”
“그리고 그것도 기억나세요? 저랑 도란님이 처음 손을 잡은 것도 이때였잖아요. 제가 던전 입구에서 기사들을 보고 동요할 때 손을 맞잡고 위로해주셨는데...”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여전히 라디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맞잡은 손에 부드럽게 깍지를 끼며 녀석의 뺨에 난 문양을 어루만졌다.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 손에 피가 흘러서 내가 연고까지 쥐여줬잖아. 당시에는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당연하죠. 그때 도란님은 절 여자로 보지 않으셨으니까요.”
“커, 커흠...!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 거, 것보다 저기 좀 봐!! 저기 저거 마물 아냐?!”
“눈이 삔 것뿐만 아니라 곤란하면 어색하게 말을 돌리시는 것도 여전하네요.”
“.....”
“그보다... 괜찮으세요 언니? 아까부터 말이 없으신데...”
라디가 의아한 눈초리로 아리엘을 돌아보았다.
아리엘은 그제야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며 대답했다.
“아, 으응... 조금 놀라서... 던전에 들어오는 건 처음인데 이런 곳일 줄은 몰랐거든. 하늘도 파랗고, 생각보다 훨씬 넓고.. 바람도 불어서...”
“어? 처음이었어? 당연히 한 번쯤은 들어와 봤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영지라던가...”
“응... 에르티넬라 영지에도 던전이 있긴 하지만 위험하다면서 가신들이 얼씬도 못 하게 했어. 이렇게까지 크지도 않고. ...신기하다.”
아리엘이 연파랑색 눈동자를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그녀의 새하얀 로브를 흩트려놓는 산들바람과 눈부신 은발을 맴도는 한 쌍의 벌새를 보니 꼭 화폭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나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아리엘의 주위를 비행하던 벌새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더 놀랄걸? 여기 진짜 장난 아니거든.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자. 1층 통과부터 유적 재탐사, 7계층의 울시까지 갈 길이 멀어.”
“그래!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이러니 꼭 옛날 생각이 나네요... 그럼 한번 가볼까요?”
“난 소년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아!!”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
나는 전방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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