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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315화 (315/375)

〈 315화 〉 다시 #1

* * *

[315] 다시 #1

나는 바닥을 향해 힘차게 주저앉았다.

“아, 안 되겠다...! 좀만 쉬었다 가자.”

“응...? 그야 꽤 걸어오긴 했지만...”

“도란이 먼저 힘들다고 하는 건 처음 보네... 역시 배낭이 너무 무거웠나...?”

“응, 진짜 뒤질 것 같아. 내가 웬만해서는 이렇게 우는 소리 안 하는데... 좀만 쉬자. 오 분이라도 좋으니까.”

듬성듬성한 잡목림을 거닐던 중 공터가 나오자 나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구렁이가 허물 벗듯 배낭을 탈피하고 잔디 위에 드러누워 헉헉대자 실비가 공손히 수통을 따서 건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아, 고마워. 마침 목말랐는데. ....크흐 진짜 시원하다.”

“.....”

내가 간과했던 문제점 한 가지.

짐이 지나치게 많다.

해일, 메라, 울시와 스승님, 네눈박이 늑대들과의 재회를 위해 온갖 간식을 챙겨왔을 뿐만 아니라, 고기를 구울 때 쓸 향신료와 해일이가 좋아하는 꿀, 울시를 위한 특별식 등으로 배낭이 터질 지경이니까.

더군다나 이제 던전 1층에는 마물의 씨가 말라 더 이상 사냥만으로 식량을 조달하기가 어려운 바, 안 그래도 잔뜩 먹거리를 챙겨왔는데 마차를 타고 오며 고기와 술을 잔뜩 받기까지 했다.

개미더러 짐을 들게 시키기엔 주변 이목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라디나 아리엘에게 떠넘길 수도 없으니 니아와 나눠서 부담하는 식으로 하고 있긴 한데...

“...고생 많으셨어요. 그럼 아예 이쯤에서 텐트를 칠까요? 오늘 하루 동안 제법 많이 이동하기도 했고, 던전 시차를 생각하면 조만간 해가 질 텐데 지금부터 밤에 대비하는 게 오히려 적당할 수도...”

“응, 그러자! 발광 이끼가 내뿜는 빛이 슬금슬금 줄어들고 있으니 앞으로 서너 시간이면 어두워질 거야!”

“그럼 우리 여기서 텐트 치는 거야? 잘됐다! 나는 항상 이런 벽지에서 숙영해보는 게 꿈이었거든! 뭔가 진짜 모험가가 된 기분이야.”

“...그래? 이리 와 아리엘.”

아리엘이 머뭇거리며 다가오자 나는 어깨를 끌어당겨 한껏 포옹했다.

마음껏 귀여워해 준 뒤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떼어주며 말했다.

“...그럼 역할 분담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할래?”

“음... 그러면 저랑 언니가 텐트를 치고 있을게요. 니아 님은 근처에 위험 요소나 모험가가 있는지 확인해주실 수 있으세요? ...도란님은 좀 쉬고 계시고요.”

“아냐 괜찮아. 나도 도울게.”

“괜찮아 도란. 우리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푹 쉬고 있어. 도란이 어제 그랬잖아. 잘 쉬어주는 것도 전력 보충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그래도...”

이대로 느긋하게 구경만 하고 있기도 좀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문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럼... 나는 주변에서 저녁거리 좀 찾아올게. 아무리 배낭이 무거워도 던전에서 식량은 아끼면 아낄수록 좋으니까.”

“...방금까지 다 죽어가던 사람이 어딜 간다는 거예요. 게다가 1계층에는 이제 사냥감도 거의 없다면서요.”

“괜찮아. 다 생각이 있거든. 배낭만 없으면 아직 거뜬하고.”

“뭐... 정 그렇다면 동행이라도 한 명 데리고 가세요. ...실비야, 가서 도란님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맡겨주십시오.”

“나 혼자서도 괜찮은데...”

“혼자 보냈다간 또 사고 칠 거 아녜요.”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취급이 너무 각별한 것 아닌가.

한숨을 내쉬며 훌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수풀 쪽으로 발길을 돌리던 찰나ㅡ

­화악─!!

니아가 내 옷깃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묘한 이채가 남실거리는 눈으로 날 들여다보더니...

“흐응~♪ 소년.”

“니, 니아 님...? 갑자기 왜...”

“이따 밤에 또 ‘그거’ 하자 그거.”

“그, 그거라니 설마...”

“응!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야 해~?”

“.....”

목 위로 열기가 오르는 걸 자각하며 물러서자 라디가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그거라니... 뭐 말씀하시는 거예요?”

“.....”

“...혹시 어젯밤에 뭐 있었어요? 아까는 별일 아니라더니...”

“지, 진짜 별일 아니었어!! 니아가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상하게 말...!”

“그러면 왜 그렇게 당황해?”

“그, 그거야...”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자 라디와 아리엘의 시선에 짙은 의심이 내리깔렸다.

그러자 니아가 성큼 다가오더니 앙증맞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뭐야, 둘한테 제대로 얘기 안 했어?”

“....”

“으흥~ 소년도 은근 부끄럼쟁이구나?”

“아, 아니 그건 부끄러움 그런 게 아...으으으.”

니아가 귀엽다는 듯이 내 볼때기를 잡아당기고는 라디와 아리엘을 돌아보며 자랑했다.

“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소년 어젯밤에 엄청 귀여웠다? 나한테 막 안겨서는...”

“니, 니아 님!!”

“왜?”

“아, 아니 그거 진짜 부끄럽거든요?! 분명 어제는 비밀로 하자고...!”

““도란.”님.”

“.....”

“...조용히 하고 가서 사냥이나 해 와.”

“맞아요. 식량을 아끼기로 하셨잖아요.”

“.....”

“안 갈 거야?”

“그, 그게 말이지... 마음이 바뀌었어!! 난 여기서 얌전히 휴식이나 하고...”

“실비야 도란 좀 데리고 가. 최대한 먼 곳으로. 가서 먹을 것 구해 올 때까지는 절대 돌아올 생각 말라고도 전해주고.”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자, 잠깐...! 내 말도 좀...!! 시, 실비야?! 이, 이것 좀 놓아...”

“.....”

나는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숲속으로 질질 끌려갔다.

*

“아니, 분명히 비밀로 해준다고 했으면서...”

“....”

“모두 앞에서 신나게 다 까발리기나 하고...”

“....”

“...안 그래 실비야? 어떻게 생각해?”

“.....”

쫑알쫑알. 꿍시렁꿍시렁. 잔뜩 심술이 난 표정으로 발치의 돌멩이를 차며 걷다 보니 조용히 뒤따라오는 실비가 눈에 들어왔다.

실비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하긴... 다짜고짜 물어도 곤란하겠지... 미안, 내가 너무....”

“...생각해 보니 니아 님이 조금 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거 봐! 그렇지?!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

“....”

어쩐지 피곤한 기색의 실비를 등 뒤에 달고 오솔길을 거닐자 짙푸른 녹음에 마음이 치유되어 간다.

폴짝폴짝 날개를 펼치고 앞길을 뛰어다니는 화려한 길앞잡이와 살랑이는 나뭇잎 사이로 비쳐오는 따스한 불빛 등을 감상하며 미소짓자 실비가 정중한 어조로 물어왔다.

“...주인님, 실례지만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뭔데? 뭐든 편하게 물어봐.”

“어디로 향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분명 저희가 들은 바로는 이곳에선 더 이상 사냥을 하기가 여의치 않다고... 전국에서 모험가들이 너무 많이 몰려 마물이 전부 깊숙한 곳으로 도망가버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럼 대체 어떻게...”

“우리는 마물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낚을 거거든.”

“물고기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마침 이 근처에 냇가가 있거든. 어차피 모험가 대부분은 마물을 사냥해서 부산물을 얻는 게 목적이니까 이곳은 후딱 건너뛰고 본격적으로 몬스터가 출몰하는 2계층으로 넘어갔을 거야. 그러면 물고기도 아직 남아있을 테고. ...생선 먹어봤어?”

“생선 말입니까...?”

“그래.”

“...유년 시절에 부족민들과 천렵으로 종종 잡아먹었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후로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

부족민...?

“...그럼 못 먹는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네? 생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저는 편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잘 됐...”

“잠시만...!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실비가 돌연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 멈춰섰다.

녀석은 후드를 젖혀 귀를 드러내고 집중하더니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뜨며 읊조렸다.

“이건... 덤불 스치는 소리? 뭔가를 사각거리는 듯한... 자연적인 소음은 아닙니다.”

“앞에서 들렸어?”

“그렇습니다.”

“1계층 초입에서 그런 소리를 내는 동물이라면... 아, 뭔지 알 것 같네. 잠시만...”

나는 피식 웃으며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흑안을 빛내며 나무 위를 주시하다 보니...

“찾았다.”

­끼이이이익!!!

신속하게 단도를 투척하자 멀찌감치 나뭇가지 위에서 큼지막한 살덩어리가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 형체를 발끝으로 툭 밀치니 큼지막한 애벌레가 징그럽게 몸부림치며 녹색 진액을 내뿜었다.

실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이, 이건 대체... 주둥이에 이빨이 가득한데...”

“이건 그린 모스라는 마물의 유충이야. 원래 주변 나무 색상에 동화되어서 찾기 어려운 녀석인데 실비는 귀가 밝구나?”

“그, 그런... 칭찬 감사합니다. 서, 설마 이것도 먹습니까...?”

“아니, 이건 잘못 먹었다간 구토나 메스꺼움을 유발할 수 있어서 식용으로 쓰긴 곤란해. 안타깝게도 돈이 될 만한 부위도 없고. 그래서 다른 모험가들도 사냥하지 않고 일부러 놔둔 모양인데... 숨통만 끊어놓고 가자.”

“...그렇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아. 내가 할게. 별 수고스러운 일도 아니니까.”

“제게 맡겨주십시오. 주인님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또 이런 경험을 쌓아두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정 직접 해보고 싶다면 이 단도로 할래? 요 마물은 체액이 끈끈해서 일반 단검으로 벴다간 날이 금방 무뎌질 수가 있거든.”

“...알겠습니다.”

나는 애벌레에 꽂힌 단도를 뽑아 실비에게 건네주었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반발 작용 없이 자연스럽게 단도를 받아드는 실비를 내심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자 녀석이 의아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이런 애벌레형 마물의 숨통을 깔끔하게 끊기 위해서는 여기 두 번째 마디 사이를 푹 찌르면 돼. 그곳에 신경절이라는 급소가 있거든.”

“...여기 말입니까?”

“아니, 거기보다 조금 더 위... 그래 거기. 수직으로 날을 집어넣어 봐.”

“이, 이렇게...”

­푹!

“그래, 잘했어. 그리고 이렇게 마물을 사냥하고 나서는 사체 주변에 나뭇가지를 꽂아둬서 죽은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표시해두는 게 좋아. 이대로 방치했다간 혹시라도 뒤따라오는 모험가가 살아있는 마물로 착각해서 놀랄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한데 그렇다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풀숲 구석으로 옮겨두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통행에도 방해되지 않을 텐데...”

“음... 그래도 되긴 하는데 그랬다간 마물이 사각에서 기습하려는 걸로 오인할 수 있으니까 권장하지 않아. 예를 들어 호랑이나 표범 같은 맹수는 불시에 뒤에서 먹잇감을 덮치니까 모험가들이 치를 떨거든. ...실비도 종종 앞뿐만 아니라 뒤에도 눈구멍이 나 있는 이상한 투구를 본 적이 있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게 다 뒤에도 눈이 달려 있는 것처럼 속여서 맹수의 기습을 방지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만 해둬도 실제로 효과가 있거든. 일정 지능 이상을 지닌 마물은 보자마자 가짜라는 걸 눈치채니까 효력이 없을 때도 있지만...”

또 통풍이 잘된다는 사소한 장점이 있긴 하나, 구멍 사이로 머리색이 비쳐 보인다는 점 때문에 내가 착용하지 못했던 투구 종류 중 하나다.

‘이젠 딱히 필요 없지만.’

시야 언저리로 비치는 흑발을 올려다보며 내게 굴레와도 같았던 갑갑한 투구에서 해방된 것에 대해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고 있자니 실비가 마물 주위에 나뭇가지를 꽂으며 말했다.

“...다 꽂았습니다. 마물을 사냥할 땐 항상 이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 그냥 어디까지나 그런 게 있다고만 알아둬. 모험가 길드에 처음 가입하면 말해주는 기본 중 하나거든. 막상 잘 지키는 사람은 보기 드물지만... 사실 나도 거의 안 해.”

“...주인님은 참 유식하시군요. 마물의 습성과 급소도 꿰뚫고 계시고...”

“나도 다 주워들은 거야.”

그 말대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들었던 걸 그대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니 라디와 함께 던전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사냥했던 마물도 이 애벌레였지.

그때 라디에게 배웠던 지식을 이렇게 써먹게 되다니...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지우고 실비와 함께 냇가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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