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 다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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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다시 #2
“어어...? 이 길이 아닌가...”
“....”
“그럼 이쪽인가?”
“....”
“뭐야, 저기였네. 괜히 지금까지 뱅뱅 돌았잖아.”
“...주인님.”
“아니, 저쪽 같기도 한데... 실비야, 우리 저기 한 번...”
“주인님, 외람되지만 혹시 지도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이번엔 틀림없어! 분명 저쪽...”
“주인님.”
“....”
“...보여주세요. 지도.”
“....자.”
고분고분 넘겨주자 실비가 유심히 지도를 들여다봤다.
녀석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고민하더니 숲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 냇가가 있는 곳입니다.”
“확실해?”
“...적어도 주인님이 말씀하시는 방향보단 정확할 겁니다.”
“흐음... 아무리 봐도 저기는 아닌데...”
“.....”
“좋아, 어디 한 번 가보자. 대신 틀리면 벌로 발바닥 맞기 어때?”
“....”
“커흐흠... 농담이야 농담. 어디 보자... 이대로 쭉 가다 보면...”
졸졸졸졸....
“.....”
“...제 말이 맞죠?”
숲에서 길을 헤매기를 한참, 실비가 가리킨 대로 나아가자 정말로 투명한 냇가와 맞닥뜨렸다.
등목하며 더위를 식히는 모험가와 물에 발을 담그고 담소를 나누는 커플. 한가롭게 흐르는 냇물은 들어가 놀기에 딱 좋아 보였고, 더없이 맑고 청아해 바닥에 깔린 조약돌이 훤하게 비쳐 보였다.
숲의 녹음을 품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자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청량감이 머리끝까지 뻗어나간다.
나는 무표정하지만 어쩐지 우쭐거리는 듯한 실비를 힐끗 쳐다보고는 중얼거렸다.
“바로 코앞에서 맴돌고 있었나 보네...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냐.”
“주제넘은 발언이지만, 주인님의 길 찾는 능력은 꽝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야... 그나저나 이대로라면 물고기를 잡는 건 힘들겠네...”
딱히 보는 눈이 있다고 해서 천렵을 못 할 건 없지만, 실비는 사람이 많은 곳이 거북할 테니까.
나는 제법 붐비는 인파를 뒤로하고 실비와 나란히 냇가를 거닐었다.
참방거리는 물소리, 높게 퍼져나가는 사람들의 웃음, 진짜와 거의 분간이 되지 않는 푸른 하늘 따위를 느긋하게 둘러보며 상류로 나아가자 인적이 뜸한 곳이 나왔다.
여기라면 녀석도 괜찮겠지.
“실비야, 여기 어때? 이곳이라면 사람도 없고 조용...”
“.....”
“...실비야?”
대답이 없어 돌아보자 실비는 냇물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수면 아래로 물고기라도 발견한 모양.
잠깐 이대로라면...!
순간 고양이의 습성이 떠올라 황급히 녀석을 막아세우려는 찰나ㅡ
풍덩!!!
실비가 시냇물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큼지막한 물보라를 일으킨 뒤, 동공을 세로로 좁히고 천천히 상체를 드는 녀석의 손에는 펄떡대는 송어 한 마리가 잡혀 있었다.
멍하게 응시하며 홀린 듯이 박수를 치자 실비는 무표정하게 송어를 내려다보다 핫! 하고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능이라...”
“괜찮아. 잘했어. 다 젖긴 했지만 뭐... 상관없나.”
텐트로 돌아가서 곧장 모닥불에 말리면 내일 아침까지는 어떻게든 될 테니까.
재차 고개를 숙이는 실비를 웃으며 제지하고 냇가를 둘러보고 있자니 녀석이 의기소침하게 물어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잡은 생선을 보관할 곳이 필요하니까 서둘러 둑을 만들어 놓자. 이쪽으로 와 줄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실비가 물살을 거슬러 다가왔다.
나는 녀석을 데리고 냇기슭으로 향했다. 뭍을 거닐며 유속이 느린 곳을 찾은 다음 실비와 함께 손으로 자갈을 덜어냈다.
냇물 바로 옆에 자그마한 구덩이를 파내자 스멀스멀 담수가 차오른다.
나는 사냥감이 탈출하지 못하게끔 바위를 높게 쌓아 둑을 만든 뒤 그 안에 실비가 잡은 물고기를 넣고 일어섰다.
“자, 됐다... 이걸로 한 건은 끝났고... 이다음엔 오늘 먹을 분량의 물고기를 구해야 하는데...”
“손으로 잡습니까?”
“아니... 그건 정말 원시적인 방법이고. 너도 이전에 그 부족민...? 하고 천렵했던 경험이 있다며. 그땐 어떻게 했는데?”
은근슬쩍 묻자 실비가 난감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으음... 끈이 촘촘하게 달린 막대기 같은 걸 써서 잡았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거나 해서...”
“소란...? 그렇다면 낚시는 아닐 텐데... 아, 뭔지 알 것 같네. 족대질 말하는 거구나?”
“족대 말입니까?”
“그래, 그물망이 달린 막대기로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거야. 방금 전에 실비가 말했던 소란은 물고기를 족대가 있는 곳으로 유도하는 거고.”
“아...! 듣고 보니 주인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물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정령님도 지금은 안주인님들과 함께 있고...”
“음...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이용할 거야. 혹시 타린 약초라고 들어봤어?”
“타린... 말씀이십니까...?”
무표정한 실비의 꼬리가 물음표 모양으로 휘었다.
나는 쓰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타린이라고 해서 미약한 독성을 띠는 풀이 있거든? 그걸 물에다가 넣으면 물고기들이 기절해서 둥둥 뜨게 돼. 우린 그 방식을 쓸 거야.”
“네? 하지만 독을 쓰면 저희도 먹을 수 없는 게...”
“괜찮아. 인간한테는 무해하거든. 나랑 라디가 이 던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이렇게 해서 물고기를 잡았어. 은근히 자주 쓰이는 풀이니까 알아두는 게 좋아.”
실제로 타린 약초를 모닥불에 태워 모기를 쫓거나, 강을 건너던 중 피라냐를 쫓는 용도로 쓰기도 했었다.
그때는 말톤도 곁에 있었는데...
잠시 아련한 향수에 젖어있자니 실비가 살며시 내 호주머니 쪽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그 타린? 약초를 지금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당장은 없는데 이 숲속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니 내가 숲에서 약초를 찾아올 동안 여기 물길 좀 막아줄 수 있겠어?”
“물길...?”
“그래, 아까 잡은 물고기를 가둬놓을 때 했던 것처럼 바위를 가져다가 냇물 중간을 막는 거야. 타린 약초로 물고기를 잡으려면 유속이 느릴수록 좋거든. 물살이 너무 빠르면 독효가 들기도 전에 흩어져 버릴 테니까.”
“그렇군요... 하나 배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난 가서 약초를 구해 올 테니까...”
덥석.
“....?”
막 뒤돌아서서 숲 쪽으로 향하려는 찰나, 손목을 붙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실비는 스스로 놀란 듯 손을 떼더니 짐짓 헛기침하며 말했다.
“...혼자서 어딜 가시는 겁니까. 길도 못 찾으시는 분이..”
“괜찮아. 요 근처에서만 돌아다닐 거니까. 멀리 안 가.”
“그래도... 분명히 길을 잃으실 겁니다. 아까도 냇가를 찾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리지 않았습니까.”
“으흠... 그러면...”
숲을 바라보며 난감하게 볼을 긁적였다. 어떻게 하면 안심시킬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다 보니 문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돌아보고는
“그럼 실비가 날 찾으면 되잖아.”
“...네?”
“내가 너무 늦게까지 안 돌아온다 싶으면 실비가 날 찾으러 와. 실비는 귀가 밝으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제가... 주인님을 말입니까.”
“그래.”
“....”
실비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에 뭔가를 다짐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알겠습니다. 저, 도란님의 충실한 종 실비가 당신을 찾아내겠습니다. 설령 넋을 잃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 으응...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데...”
뭐... 서먹서먹하게 구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숲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
“...찾았다.”
한적한 잡목림을 배회한 지 십여 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 바위 뒤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타린 약초를 발견했다.
타린 약초는 모기를 쫓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바, 소싯적 약초 채집 의뢰로 연명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 뿌리까지 상하지 않게 뽑아내자 어느새 바닥에 약초가 가득 쌓였다.
근데 이건 약초보단 독초에 가깝지 않나?
“...이제 슬슬 돌아가면 되겠지.”
실없는 생각을 뇌까리며 털레털레 왔던 길을 되짚어가다 보니 머잖아 실비와 헤어졌던 냇가가 나왔다.
하지만 지금의 실비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이, 거기 너. 오빠들이랑 같이 안 놀래?”
“몇 살이야? 혹시 동료랑 헤어졌니? 이렇게 귀여운 애를 위험하게 혼자 놔두고 가다니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
“우리 보기보다 엄청 실력 있는 모험가거든? 얼마 전에 E랭크로 승급도 했단 말야. 재밌는 거 가르쳐줄 테니까 우리랑 같이 가자.”
“우효~!! 대장! 얘 얼굴 엄청 예쁜데?! 차가운 인상에 눈매도 도도한 게 딱 내 스타일이야! 가슴이 작은 게 좀 흠이기는 하지만...”
“....”
묵묵히 냇물에 둑을 쌓는 실비를 둘러싸고 치근덕대는 네 남성. 장비도 볼품없고, 거동도 경박한 게 딱 봐도 초짜 모험가다.
한숨을 내쉬며 개입하려는 차
“성가셔.”
실비의 윤곽이 흐릿해졌다.
녀석이 순간 모험가들에게 달려든 까닭.
실비는 손아귀에 든 돌멩이로 사내의 무릎을 내려찍고, 정강이를 걷어차 물 위로 자빠뜨리더니 손톱을 세워 안면을 할퀴었다.
“뭐, 뭐야?! 이 년이 돌았나...?!”
즉각 모험가가 눈가에서 피를 흘리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고함을 지르며 실비의 안면을 가격했다.
하지만 실비는 날렵하게 상체를 젖혀 피하고 반격했다. 기민하게 공격을 빗겨내며 미끄러지더니 사내의 고간을 걷어차고 손가락을 깨물었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짐승처럼 거칠고 사나운 전투 방식. 기교도 없고 동작에 군더더기가 많아 파훼하기 쉽지만, 그를 상회하는 스피드로 상대를 찍어누른다.
하지만 나름 명색이 모험가인 이들이 두 눈 뜨고 당하고만 있을 리도 없는 바.
“크윽...! 이 계집년이...!”
한 사내가 실비의 후방으로 접근해 뺨을 때리고자 높게 손을 치켜든 순간
턱.
“거기까지 해.”
나는 순식간에 육박해 남자의 팔목을 붙들었다.
놈은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팔을 빼내려 했지만 내 악력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는 버럭 소리쳤다.
“씨발!! 넌 또 뭐야!!!”
“얘 보호자인데?”
“주, 주인님? 주인님이 어떻게 벌서 여기에...”
“뭐, 주인님?”
남자는 나와 실비를 곁눈질하더니 팍 인상을 쓰며 외쳤다.
“뭐야! 이 놈년들이 쌍으로...! 네가 주인이면 주인답게 개새끼 목줄 관리를 똑바로 해야 할 것 아냐?!”
“그쪽이 먼저 건드렸잖아. 마지막엔 강제로 데려가려 했고. 이 애는 단순히 자기방어를 한 것뿐이야.”
“뭐? 자기방어는 개뿔! 내 부하 얼굴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은 건 어떻게 보상할 건데?! 원래도 흉측했는데 더 끔찍해졌잖아!!”
“맞아맞아.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는데. 사람을 때려놨으니 치료비를 내놓아야지? 거기다 정신적 손해 배상에 합의금, 젖은 옷 세탁비까지. 가진 걸 모두 넘기고 가거나 아니면 이 노예한테 몸으로 갚게 시키거나 해.”
“그래, 너도 이렇게 이쁜 노예를 앉혀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조금만 나눠 쓰자! 우리가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 테니까!”
“....”
사내들이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시시덕거렸다. 한 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
‘...아무래도 살짝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 같네.’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등 뒤에 개미와 노래기를 소환하자
“으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 괴물이다!!”
“처, 처음 보는 마물인데...! 어, 엄청 강해 보여!! 이런 게 왜 1계층에...!”
“다들 멀뚱히 보고만 있고 뭐해?!! 당장 도망쳐!!”
“너, 넌 나중에 두고 보자!! 으히히히힉!!”
나타났던 기세만큼이나 모험가들이 꽁무니가 빠져라 줄행랑쳤다.
나는 더듬이를 까딱거리며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는 노래기와 개미를 쓰다듬어주고는 모험가들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했다.
놈들이 되돌아오지 않는 걸 확인한 뒤 여전히 의아하게 날 올려다보는 소환수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자 실비가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주인님께 흉한 모습을 보인 걸로도 모자라 직접 손을 쓰게 하시다니...”
“응? 괜찮아. 다치지만 않았으면 된 거지. 그나저나 실비도 은근 한 성깔 하는구나? 제법 잘 싸우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주인님이 나서주시지 않으셨다면 분명 큰 화를 입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깡다구가 제법이야. 막상 상황이 닥치면 바짝 얼어붙어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사람도 많거든. 실비는 강한 모험가가 되겠네.”
그러고 보니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노예 거래소에서 실비를 처음 본 날. 녀석이 철창 나사를 풀어내 숨겨두었다가 내 손등을 찌르고 단도를 강탈했던 걸.
그때의 실비는 지금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지.
집요하고, 눈에 독기가 풀풀 날렸으며, 깨져나간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렇게 타인에게 매정한 녀석이 왜 내게는 이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걸까?
‘설마 나한테 반했다거나...’
나는 피식 웃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집어치우곤 냇가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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