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화 〉 다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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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다시 #3
실비를 도와 바위로 둑을 쌓다 보니 종아리를 적시던 수위가 무릎 높이까지 올라왔다.
물발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으니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자, 이제 이리 와 볼래?”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타린 약초를 물에 푸시는 겁니까?”
“그래, 물고기를 잡는 용도 외에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식물이니까 잘 봐둬. 타린 약초는 요렇게 끝이 톱니처럼 뾰족뾰족한 게 특징인데...”
나는 실비를 가까이 불러들이고는 로브 안쪽에서 타린 약초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킁...?”
향이 신기했는지, 실비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역시 수인은 수인인가...’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라디나 니아와 판박이다.
오뚝한 콧방울을 쫑긋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으며 실비에게 타린 약초를 들이밀었다.
한데
“으브븝─?!!”
돌연 실비가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평소의 실비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반응에 놀라 들여다보자 녀석이 붉어진 코를 부여잡고 외쳤다.
“그, 그게 대체 뭡니까?!”
“뭐긴... 내가 아까 말했던 타린 약초. 왜, 향이 너무 독한가?”
“도, 독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이건...”
“....미안, 혹시 뭔가 이상해? 일단 사람한테는 무해한 식물로 알고 있는데...”
“아, 아아.. 아닙니다!! 저, 전 머.. 멀쩡합니다! 주인님은 계속 일 보시길...!”
“정말 괜찮아...?”
“무, 물론입니댜!!”
“.....”
아무리 봐도 아닌데...
벌겋게 상기된 얼굴.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공. 갈피를 못 잡고 꿈틀거리는 꼬리.
한눈에 봐도 크게 동요하는 모습이다.
‘라디는 멀쩡해서 괜찮을 줄 알았다만...’
혹시 고양잇과 수인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뭔가가 있는 걸까?
나는 서둘러 약초를 물에 담갔다. 시간을 끌수록 실비가 곤란해할 테니 재빨리 이파리를 손에 쥐고 짓이기자 녹색 진액이 냇물에 퍼져나간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수면 위에 물고기가 동동 떠 오를 터.
다만,
“...실비야 너무 가까운 거 아냐?”
“네...?”
“으음... 이, 이렇게 딱 붙어있을 필요는 없는데...”
“진액이 퍼지는 모습을 더 잘 관찰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괘념치 마시길.”
“아니, 그래도...”
“괘념치 마시길.”
“....”
나는 내 팔에 꼬옥 달라붙어 있는 실비를 난처하게 쳐다보고는 작업에 열중했다.
독효가 잘 퍼져나갈 수 있도록 타린 약초를 물에 흔들다 보니 자그마한 민물고기들이 배를 까뒤집고 부상하기 시작한다.
나는 실비를 팔에서 떼어놓으며 외쳤다.
“됐다!! 실비야 빨리 건져!”
“아, 네 네...”
“말로만 그러지 말고 빨리 움직여! 조금만 지나면 독효가 풀려서 물고기들이 도망칠 거야!”
“.....”
황급히 기절한 물고기를 주워 담았다. 무릎까지 접어올린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포획한 생선을 물구덩이로 옮기다 보니 어느새 한 끼 먹을 분량이 쌓였다.
다급하게 냇물을 왕복한 후 나는 냇기슭에 걸터앉아 피로에 젖은 팔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실비야 괜찮아?”
“.....”
“혹시 뭐 몸이 안 좋다거나 하는 건...”
“괜찮습니다. ...아마도.”
“....”
...이거 진짜 심상치 않은데.
“...안 되겠다. 빨리 야영지로 돌아가자. 잡은 물고기는 내가 들 테니까 따라오기만 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손으로 물고기를 안고 돌아갈 수는 없는 바, 근처 나무에서 커다란 잎사귀를 잘라내 보자기처럼 물고기를 감쌌다.
황급히 물살을 막아두었던 둑을 걷어차 허물고 숲에 발을 들였지만, 실비는 나무를 짚으며 힘겹게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너 걸을 수 있겠어?”
“....”
“대답할 수 있으면 대답해봐 실비야. 걸을 수 있겠어?”
“....”
‘야단났네...’
실비가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이 새빨간 게 열이라도 나는 모양이다. 숨결도 감기몸살에 걸린 사람처럼 거칠고, 다리를 휘청거리는 꼴이 영 말이 아니고.
제 딴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까부터 내 몸을 힐끗거리는 것도 조금 불안하고.
“...업힐래?”
“네...?”
“지금 힘들잖아. 그러지 말고 나한테 업혀.”
“하, 하지만 주인님께 그런 누를 범할 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거든? 잔말 말고 빨리 업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하지만... 저는 몸도 물에 젖었고...”
“명령이야. 업혀.”
“...네.”
뒤돌아서서 자세를 낮추자 실비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여전히 망설이는 실비의 허벅지를 붙잡고 번쩍 들어올리자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실비는 다급히 내 목덜미에 팔을 두르더니 노심초사하며 물었다.
“저, 저... 혹시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아니, 솜털처럼 가벼운데? 너무 가벼워서 업힌 줄도 몰랐다 야. 넌 밥 좀 더 먹어.”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사양 말고 제대로 업혀. 어중간하면 오히려 더 균형잡기 힘드니까.”
“....네.”
실비가 나지막이 대답하며 팔에 힘을 실었다.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나는 웃으며 녀석을 받쳐주고 오솔길을 나아갔다.
모험가들이 숱하게 왕래하며 생겨난 숲속의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자 다양한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자이언트 웜이 파 놓은 점액질의 흙무더기와 멧돼지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코뉴어 앵무새, 머리가 두 개 달린 쌍두 뱀이나 낮아진 일조량에 뿌리를 들고 단체로 이동하는 이름 모를 식물 등...
도무지 지하 수백 미터 아래의 공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주홍빛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너머, 희미하게 비치는 던전 벽을 이정표 삼아 길을 찾아가고 있자니 목덜미 부근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민폐를 끼쳐서..”
“괜찮아. 뭘 이 정도로 그래. 다 동료끼리 상부상조하는 거지. 이게 민폐라면 나는 라디랑 아리엘한테 사흘 밤낮을 석고대죄해도 모자랄걸?”
“그래도... 저는 주인님의 노예인데...”
“괜찮다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내 잘못도 있으니까.”
정숙하고 똑 부러지던 실비가 갑자기 이렇게 흐트러질 만한 계기라면 타린 약초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부드럽게 다독이자 실비도 조금 안심했는지 내게 기대왔다.
집요하고, 조금 강하게...
“으응...?”
실비가 밀착하며 속삭였다.
“...주인님의 등은 참 넓군요. 또 좋은 향기가 납니다.”
꽈악...
“어... 실비야. 숨을 못 쉬겠는데...”
“주인님... 주인님.. 후후훗...”
“.....”
큰일 났다.
실비가 팔을 강하게 옥죄어오더니 급기야 취객처럼 내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점점 더 심해지는 이상 증세에 녀석을 업은 채 서둘러 달리다 보니 머잖아 야영지가 나왔다.
나는 모닥불 근처에 모여앉은 라디와 아리엘을 바라보며 외쳤다.
“애들아!! 큰일 났어!! 얘 상태가 좀 이상해!! 다들 도와...! 어라...?”
어쩐지 싸늘한 반응에 망설이자 아리엘이 조용히 돌아보고는
“도란 너 다 들었어!! 어젯밤 여관에서 니아 언니 가슴 위에 초콜릿 뿌리고ㅡ”
“우와아아악!!!”
나는 황급히 달려가 아리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
일단 실비를 텐트 안에 눕혔다.
신음을 흘리며 끙끙 앓는 녀석에게 모포를 덮어주고 나오자 아리엘이 날카로운 눈매로 채근해왔다.
“도란, 대체 실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멀쩡했던 애를 어떻게 이 지경까지... 혹시.. 건드렸어?”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왜 실비를...!”
“.....”
“커흐흠...”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하자 라디가 턱을 짚고 중얼거렸다.
“몸에 손을 댄 것도 아니라면... 독에 당한 걸까요? 숲에서 독사에 물렸다던가... 혹시 짐작 가는 거 없으세요 언니?”
“일단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었어. 타란툴라처럼 자그마한 생물에 당했다면 이빨 자국을 찾기 어려우니 또 모르겠지만...”
“하지만... 1계층에서 맹독성 마물은 보고된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호흡이 가쁘긴 하지만 근육 경직이나 경련 증상도 없었으니 중독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라디와 아리엘이 실비가 있는 텐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이실직고했다.
“저... 사실 짐작 가는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그... 그게... 실비랑 물고기를 잡으면서 타린 약초를 썼거든? 근데 약초를 실비한테 들이댄 이후로...”
“타린 약초?! 타린 약초를 실비 앞에서 썼다고요?!!”
“애들아 무슨 일...”
“니아 님!! 떨어지세요!!!”
찰나ㅡ
소란을 듣고 온 니아가 내게 다가오다 말고 라디에게 제지당했다.
장작을 손에 든 채로 총성을 들은 새처럼 바짝 굳어버린 니아, 눈가를 짚으며 피로 짙은 한숨을 내쉬는 라디, 곤란한 기색의 아리엘, 화들짝 놀라 수통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란이 등...
당황하며 그녀들의 면면을 둘러보자 라디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타린 약초를 썼다고요?”
“으, 으응... 혹시 위험한 거였어...? 미안해... 내가 지금 바로 지상에 가서 해독제를...!”
“아뇨, 괜찮아요. 타린 약초가 원인이라면 위독한 상황은 아닐 테니까요. 단지...”
“단지...?”
아리엘이 말을 이어받았다.
“...도란, 타린은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약초지만 딱 한 가지 부작용이 있어.”
“부작용...?”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뒷말을 기다리자 아리엘이 조곤조곤하게 고했다.
“...바로 고양잇과 수인이 냄새를 맡았을 때 이상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야. ...지금까지 써오면서 몰랐어?”
“그, 그야 내가 알 턱이 없지...! 지금까지 라디나 말톤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험가랑 파티를 맺어본 적이 진짜 손에 꼽을 정도인데...! 게, 게다가 고양이 수인한테만 부작용이 있다니, 무슨 그런 제멋대로인 풀이 어디...!!”
아니, 있다.
‘개, 개다래나무...?’
불현듯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지구에도 유독 고양잇과 동물에게만 특이한 행동을 유발하는 식물이 있다는 것.
고양이가 개다래나무를 마주하면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헤롱헤롱대거나 비틀거리고, 몸을 배배 꼬다가 축 처지더니 침을 줄줄 흘리는 등 이상 증상을 보인다.
‘그, 그럼 타린 약초의 벌레를 쫓는 성분도...’
개다래나무에는 모기와 해충을 쫓는 액티니딘이란 성분이 들어있다고 했었지.
고양이가 이상 증상을 보이며 해당 식물에 몸을 비비는 행위도 털에 액티니딘 성분을 묻혀 모기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진화한 거고.
이 세계의 약초는 때죽나무처럼 물고기를 기절시키는 효능이 있는 등 지구의 개다래나무와 완전히 같지는 않을 테지만, 그럭저럭 일맥상통하는 식물이라 할 수 있을 거다.
망연하게 약초를 만졌던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니아가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뭐야 소년, 혹시 실비한테 타린 멕였어~?”
“아, 아뇨...! 먹인 건 아니고 그냥 냄새만... 아, 아니 니아 님도 타린 약초의 부작용을 알고 계세요...?!”
“응? 그야 당연하지. 표범도 고양잇과 맹수잖아. 나도 전국을 떠돌던 시기에 청승맞게 주점에 혼자 앉아 있으면 술에 타린 약초를 몰래 타서 건네는 사람이 있었어! 물론 바로 눈치채고 곤죽을 내줬지만!”
“네...? 하지만 뭣하러 그런 짓을...”
“음...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타린 약초를 흡입하면 발정이나 최음 증상을 겪는 수인도 있거든! 나는 저항이 강한 편이기는 한데... 실비는 처음 겪어봐서 면역이 없었나 보네. 뭐, 건강에 해가 되는 건 아니니 푹 자고 나면 나을 거야!”
“뭐, 뭐 발정!? 최음?! 그, 그럼 지금 실비가 이상한 이유가...”
식겁하며 텐트를 쳐다보자 라디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냇가에서 여기까지 계속 업고 오셨죠? 수인의 발정기는 평범한 사람 성욕의 배 이상인데... 실비가 엄청 힘들었겠네요. 지금까지 도란님의 체취를 직방으로 맡았으니...”
“윽...! 그럼 빨리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아니, 도란은 오늘 하루 동안 텐트에 얼씬도 하지 마. 괜히 얼굴을 보였다간 더 힘들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한테 해명해야 할 게 하나 더 있을 텐데?”
“응...? 해명이라니 뭐...”
아.
지면을 탁탁거리는 시끄러운 소음에 옆을 돌아보자, 잔뜩 심통이 난 듯한 라디와 녀석의 꼬리 끝에 걸린 액체 초콜릿 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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