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 다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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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다시 #4
던전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우리는 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다만, 첫째 날의 시행착오를 통해 방침을 변경했다.
지금까지는 최단 거리로 2계층 입구를 향해 나아갔지만, 지금은 인적이 드문 외곽 루트를 이용해 전진하는 중이다.
덕분에 개미에게 짐을 떠넘기고 걸을 수 있어 이전보다 홀가분.. 했어야 할 테지만...
“실비야, 몸은 좀 괜찮니? 아니면 아직도 약효가 남아있다거나...”
“.....”
“...미안해.”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안색이 살짝 붉...”
“전 괜찮습니다.”
“.....”
난감하게 고개를 돌리고 앞길을 나아갔다.
날이 밝으니 실비의 증상도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여전히 호흡이 가쁘고 꼬리가 쉴 새 없이 방황한다.
일단 라디와 아리엘의 지시에 따라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걷고 있자니 니아가 내게 찰싹 달라붙으며 속삭였다.
“흐음... 소년 아무리 봐도 일부러 한 거지?”
“네? 뭐가...”
“타린 약초 말이야. 아무것도 모른 척 발정시킨 다음, 밤중에 제 발로 달아오른 몸을 이끌고 찾아오게 만드는 고단수...”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 그렇게 변태적인 취향은 없다고요! 저는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정상이라고요 도란님?”
“.....”
입을 싹 다물자 라디가 도끼눈을 뜬 채로 쏘아붙였다.
“정상이라는 분이 욕조에서 니아 님 가슴골에 초콜릿을 뿌리고 핥아드셨어요? 두 번 정상이었다간 아주 별의별 플레이가 다 나오겠네요.”
“그, 그러니까 그건 오해라고...!! 같이 야식을 주워 먹다 보니 니아가 실수로 흘린 거고 난 그냥 거기에 장난으로...!”
“핥은 건 맞잖아요.”
“.....”
“어제는 그냥 뽀뽀에 간단한 터치만 했다고 하더니...”
“....”
도무지 볼 낯이 없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자 아리엘이 힐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도란, 그런 걸 하고 싶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우리도 해줄 수 있는데.”
“.....”
아니, 지적하는 핀트가 조금 이상한데 말이죠.
“...나는 그런 매니악한 취향은 없고 어디까지나 우발적으로 일어났던 거야. 그 왜... 흘려서 닦긴 닦아야겠는데 주변에 마땅한 천이 없으니 홧김에... 칵테일을 마신 뒤라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초콜릿 양이 꽤 줄었던데. 그 해일이랑 메라? 라는 애들한테 주려고 아끼던 거 아니었어?”
“.....”
난처하게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본방을 치를지언정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재수 없을 정도로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후회하자 불현듯 니아가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그럼 다음번에는 다 같이 하면 되잖아!”
“네?”
“그게 무슨...”
“응? 그야 나도 하고 싶은 게 잔뜩 있는걸~? 있잖아, 저기 열대에는 바나나라는 길쭉한 과일이 있는데, 거기다가 설탕 코팅을 해서 핥아먹는 게 요즘 왕도에서 유행이래!”
“.....”
“아니면 꿀이나 연유 같은 걸 발라놓고는...”
니아가 말하는 도중에 내 쪽을 돌아보더니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동자에 오싹함을 느끼고 물러서자 아리엘과 라디도 이쪽을 쳐다보더니 한마디씩 했다.
“듣고 보니...”
“...저도 한번 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응, 나도... 조금 부끄럽지만 도란이 귀족 예복이나 고급 정장을 입고 안아주면 엄청나게 설렐 것 같은데...”
“하루는 날을 잡아서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고 저희가 원하는 대로 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 왜, 저도 일주일 넘게 쌓여서...”
“.....”
섬뜩!
라디의 동공의 서린 이채를 보자 나는 본능적으로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쥐는 초식이 아니라 육식도 즐겨 하는 무서운 동물이었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주춤주춤 발을 뒤로 빼고 있자니 니아가 덥석 내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어디 가 소년.”
“이, 이거 놓으세요! 순수한 청년의 정조를 짓밟...!”
“일단 밤까지는 봐줄 테니까 걱정 마. 그보다 빨리 지도나 꺼내. 이제 곧 습지에 도달할 때 되지 않았어?”
“아...”
로브 안쪽에서 지도를 꺼내자 니아가 내 팔 사이로 쏘옥 들어오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음... 정말 안 남았네.. 저 언덕만 넘으면 바로 보이겠어.”
“벌써요? 어째 물비린내가 나더라니...”
“물비린내라... 나는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사낭 쥐 수인은 코가 엄청 예민하구나?”
“전 사실상 후각이 전부니까요... 아, 그리고 보니 실비는 후각 대신 청각이 매우 발달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 신기하네!”
우리는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숲길을 나아갔다.
모험가들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지역이라 발을 내딛는 족족 무성한 덤불이 바지에 걸렸지만, 앞서나가 길을 터주는 사슴뿔 개미와 무거운 배낭을 대신 들고 졸래졸래 뒤따라오는 다섯 개미 덕분에 여유롭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아가길 잠시, 능선을 건너 내려오자 우리는 예정된 습지와 맞닥뜨렸다.
라디가 끄응 기지개를 켜더니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날 돌아보았다.
“여기도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그 왜, 기억나세요? 이전에 오필리아 상단에게서 빌린 뗏목을 타고 이 습지를 건너다가 그린 앨리게이터에게 습격당했잖아요.”
“...그랬지. 악어 가죽을 팔아서 짭짤한 부수입을 얻기도 했었고...”
“고기를 굽고 난 기름을 모아두었다가 도란님이 피부 미용에 좋다는 핑계로 스킨쉽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고요. 결국 유적에서 미라를 상대하는 용도로 써버렸지만...”
“...그거 거짓말 아니라 진짜 피부 미용에 좋다니까? 내가 있던 곳에서는 고급 화장품 재료로도 쓰...”
“네네, 알았어요. 나중에 원하는 대로 만지게 해 드릴게요. 그보다 이 습지를 건널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라디가 끝이 안 보일 만큼 광활한 습지를 둘러보았다. 이대로 수영해서 건넜다간 짐을 모두 잃는 건 물론이고 순식간에 악어밥이 되어버리고 말 터.
니아가 뺨에 손가락을 짚고 갸웃거리며 말했다.
“으음...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중앙 길목으로 돌아가야 하나... 거기에 다리가 놓여있잖아! 두 달쯤 전에 발텐 길드에서 공사를 마쳤으니까.”
“뭐... 그것도 괜찮지만...”
나는 슬쩍 우리가 빠져나온 잡목림을 곁눈질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뗏목 만들어서 건널래요?”
“뗏목? 그거 직접 만들면 엄청 번거롭지 않아? 게다가 우리는 사람 수도 제법 되는데...”
“그렇긴 하지만 제 지식이랑 흑도가 있으면 쉽게 제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리가 있는 던전 중앙으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하잖아요. 무엇보다 대충 물에 뜨기만 하면...”
됴란!
“...저희에겐 란이가 있으니까요.”
수통에서 운디네 소녀가 반짝 고개를 내밀자 니아의 금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리엘이 손뼉을 치더니 화색하며 말했다.
“맞다! 우리한테는 란이가 있었지?! 그럼 안전하게 습지를 건널 수 있겠네!”
“그래, 오히려 모험가로 북적거리는 다리를 이용하는 것보다 안전할걸? 굳이 뗏목을 제작하지 않고 영주성에서 해자를 건넜을 때처럼 수면 아래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이곳은 깊이도 모르고 반대편까지 꽤 오래 걸릴 테니까.”
란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뗏목을 타고 습지를 건너는 방향으로 노선이 굳어지자 나는 장검을 소환해 어깨에 걸머지며 말했다.
“그럼 내가 개미들이랑 숲속에서 나무를 베어 올 테니까 다들 편히 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같이 가실래요?”
“아냐 됐어. 뭐 번거로운 일이라고. 어차피 힘든 건 전부 개미한테 시킬 거니까.”
나는 손을 흔들며 뒤돌아섰다. 이전에는 나무 하나 베는 것조차 적잖은 시간과 수고가 들어갔지만 이제 이 정도면 가뿐하다.
한데 막 숲에 발을 들이려는 차,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요!”
“으음...?”
“실비?”
“안 된다니... 뭐가?”
됴란?
“저... 그게...”
다들 동시에 돌아보자 실비가 당황하더니 푹 고개를 숙이며 털어놓았다.
“...주인님 혼자 보냈다가는 분명 돌아오지 못하고 미아가 되실 겁니다. 어제도 냇가로 가던 도중 주인님께서 길을 잃는 바람에...”
“응? 뭐라고? 도란이 숲에서 길을 잃었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아리엘 님.”
“그럴 리가 없는데... 도란이 딴 건 둘째치더라도 숲에서만큼은 장난 아냐. 숲에만 들어갔다 하면 이상하게 생기가 넘치고 귀신같이 감각이 날카로워지거든.”
“네...? 그게 정말입니까...?”
“응, 아마 우리 중에서 제일 숲에 능통한 게 도란일걸?”
“맞아 실비야. 도란님은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산에서 일 년 동안 홀로 생존했던 경험도 있거든. 그 덕에 은근 동식물도 많이 알고. ...타린 약초는 예외지만.”
“.....”
라디가 덧붙이자 실비의 눈동자가 보기 드물게 휘둥그레졌다.
녀석이 내 쪽을 돌아보더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어제 주인님이 저와 숲을 방황했던 건...”
“.....”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자 아리엘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응... 아마 실비랑 조금 더 단둘이 있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면서 친해지려고.”
“그래, 도란님도 은근 무시 못 해. 평소에는 둔감한 척하면서 사실 다 보고 있거든. 그러다가 가끔 정말 세심하게 잘 챙겨 줄 때가 있는데 이때 속아 넘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해. 이 사람이 날 그런 식으로 꼬셨거든. 엄청 영악하지 않아?”
“그, 그런가요? 라디 님을 그렇게...”
“아니, 어쩌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고!”
“....?”
니아가 발랄하게 외치자 잠시 말소리가 멎었다.
다들 의아하게 돌아보자 그녀는 실실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야 실비처럼 예쁜 애가 노예라면 누구나 눈이 돌아갈걸? 내가 도란이었다면 어마낫 길을 잃은 척 으슥한 숲으로 데려간 다음, 스르륵 휘릭 옷을 벗기고 알몸으로 실비를 나무에 기대서 번쩍! 들어올린 다음...”
“그, 그만...!!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니아 님!!!”
“응? 아니야?”
“당연하죠!! 그렇게 오해할까 봐 일부러 냇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만 맴돌...!”
“흐응...?”
“아...”
유도 신문에 멋지게 걸려들었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자 멍하니 날 응시하는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실비는 아차 싶은 듯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시선을 피하더니...
“그... 감사합니다 주인님...?”
“.....”
기분 탓인지 살랑이는 녀석의 꼬리 끝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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