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 다시 #5
* * *
[319] 다시 #5
“자, 이제 여길 이렇게 묶으면... 됐다.”
“...다 끝난 거예요?”
“그래, 이제 물에 띄우기만 하면 돼. 오랜만에 만들어 본 거라 조금 허술한 부분도 있긴 한데 괜찮을 거야. 우리가 반대편 육지에 도달할 때까지만 버텨주면 되니까.”
유사시엔 노래기를 소환해 구명정 대용으로 쓰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나는 개미를 시켜 뗏목을 물가로 운반했다. 굵직한 통나무를 여럿 엮어 만든 임시 보트가 물 위에 뜨자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퍼져나갔다.
나는 풀쩍 뗏목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다들 타. 여차하면 란이가 지켜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 그래도 엉덩이 정도는 젖을 수 있으니까 젖는 게 싫은 사람은 방수포를 깔고... 왜, 무슨 일 있어요?”
“.....”
말을 하던 도중 문뜩 옆을 돌아보니 니아가 미적지근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장난기 다분한 표정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야 엉덩이가 젖을 수 있다니 표현이 너무 야하잖아. 이런 대낮에 보트 위에서 할 셈이야?”
“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전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뗏목 틈새로 물이 차면...”
“당황할 거 없어 소년~! 나는 소년이 원한다면 어떤 플레이도 받아줄 수 있으니까!”
슬쩍.
니아가 살며시 뒤돌더니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유혹했다.
이에 도발적으로 치뜬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손자국이 날 때까지 마구마구 주물러도 되는데...”
“.....”
“...바지 내릴까?”
“....”
나는 순간 속에서 울컥 치밀은 충동을 삭히고는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푹 누르며 말했다.
“...얌전히 뗏목에 올라타기나 해요. 꼬맹이 같은 얼굴에 발랑 까지기나 해가지고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란이가 이상하게 보잖아요.”
“그럼 단둘이 있을 땐 상관없다는 거야?”
“.....”
“흐응~ 알았어! 그럼 이따가 다시 보는 걸로~.”
니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배낭을 메고 폴짝 뗏목 위에 올라탔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나머지 인원을 도와 짐을 뗏목에 실으며 말했다.
“자, 그럼 슬슬 출발하자. 한번 건너면 당분간 못 돌아오니 빠트린 거 없나 확인하고 급한 볼일도 미리 봐 둬.”
“저는 다 챙겼어요.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돼요.”
“나도! 준비 만반이야!”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래? 그럼...”
됴란!
부드럽게 눈짓하자 란이가 발랄하게 외치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노를 저은 것도 아닌데 물살이 일더니 뗏목이 빠른 속도로 전방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터를 단 돛단배처럼 순항하는 임시 보트.
배낭을 중심에 밀어넣고 시시덕거리며 다 함께 선두에 걸터앉자 수려한 습지의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뿌옇게 피어오른 물안개. 새벽의 숨결처럼 촉촉한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날개를 파닥거리는 물새의 음영. 오묘한 향수를 자극하는 물의 향기와 풀 내음. 부글거리는 진흙더미와 구불구불하게 수면 아래서 일렁이는 초록색 수생 식물.
반짝거리며 수풀을 배회하는 빛과 유유히 흐르는 물길. 그 모든 것을 양분 삼아 무성하게 자라난 녹음.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경관, 습지에서만 볼 수 있는 저만의 광경에 넋을 빼앗기자 푸른 물포나비 한 마리가 홀연히 날아와 아리엘의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아리엘은 제 눈동자를 닮은 색깔의 나비를 멍하니 응시하더니 꿈결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쁘다...”
“....”
나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아주며 속삭였다.
“...아리엘은 던전에 들어와 보고 싶다고 했지. 어때, 마음에 들어?”
“응... 꼭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환상적이야. 이렇게나 깊은 지하에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자라고,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른다니... 더군다나 이 생물들은... 다들 너무 신비로워..”
“...앞으로 더 놀랄걸?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예를 들어 암시장이 위치한 3계층에는 눈꽃 호수라는 명물이 있는데...”
“눈꽃...? 추운 곳이야?”
“아니, 파릇파릇한 들판이 펼쳐진 아름다운 장소야. 그 동쪽에 있는 커다란 호수에는 연꽃처럼 희고 고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이게 꼭 눈이 꽃을 피운 것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어. ...어때, 꼭 보고 싶지 않아?”
“.....”
아리엘이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로 전방을 돌아보며 던전을 눈에 담았다.
보글거리는 기포. 뗏목이 갈대숲을 스칠 때면 후다닥 흩어지는 개구리. 영화의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질 때면 잔잔하게 깔리는 배경음악처럼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그녀가 탄식하더니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마워 도란. 나한테 이런 멋진 선물을 선사해줘서.”
“.....”
나는 웃으며 고운 은발을 쓸어주었다.
“나야말로 고마워. 너한테는 항상 받기만 하고 있으니까. 내가 너한테 받은 마음을 다 합치면 이 습지를 모두 메꾸고도 남을 거야.”
“도란이 받기만 하다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나야말로 도란 덕분에 매일매일이 너무나 행복한걸? 날마다 곤히 잠든 네 옆얼굴을 보며 침대에서 일어나고, 매 순간 널 생각하며 웃고, 함께 사랑을 속삭이며 잠에 드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데...”
“그래, 그럼 둘 다 비긴 걸로.”
선선하게 웃으며 어깨를 끌어당기자 아리엘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순순히 내게 체중을 실었다.
이에 질세라 내 등을 꼭 끌어안는 니아, 도도하게 습지를 구경하며 꼬리를 살랑이는 실비, 내 품에 꼬옥 안긴 란이,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는 라디 등...
아리엘이 행복에 겨운 한숨을 내쉬더니 습지를 돌아보며 어렴풋이 중얼거렸다.
“...카렌이 이 광경을 봤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응? 카렌이 왜?”
“어...? 나 방금 뭐라 했어?”
“응, 카렌이 이 광경을 보면 좋아할 거라고 했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야?”
“아... 무심코 입 밖으로 나왔나 보네...”
아리엘이 난처하게 웃더니 습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야 카렌이 바닷가 마을 출신이잖아. 여기는 바다가 아니긴 하지만 조금이나마 대리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야 걔 베라스틴에 오고 나서는 일이 바빠서 한 번도 고향에 돌아간 적이 없었거든.”
“뭐...? 카렌이 해안 지방 출신이라고?”
“응? 몰랐구나?”
“으음... 그야 카렌이 부 길드장이랑 같이 고향에서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건 들었지만...”
녀석이 부 길드장 할아버지랑 허물없이 지내는 것도 고향에서부터 가족처럼 친했기 때문이니...
바닷사람 하면 으레 떠올리는 구릿빛 피부나 거친 억양 등과는 전혀 다른 카렌의 모습에 실소하자 아리엘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리고 카렌의 고향 하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뭔데?”
“카렌의 아버지와 주변인이 굉장히 유명한 사람인가 봐.”
“...그래?”
“응, 이전에 카렌의 개인실에 방문했을 때 서신에서 얼핏 이름을 봤는데 나도 한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거든. 아마 내 아빠 영주성에서 오가며 들었던 것 같은데... 성씨가 분명 드레... 드레이...”
“...이 세계에서 성씨는 귀족들만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음... 그게 말이지...”
아리엘이 손가락으로 뺨을 짚으며 고민하더니 천천히 말문을 뗐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예외도 있어. 내 성씨인 에르티넬라가 원래 영지 이름인 건 알고 있지?”
“응, 귀족의 성씨는 대부분 소유한 토지 명칭에 따라 정해진다며. 반대로 땅이 없는 귀족 중에는 드물게 성씨가 없는 사람도 있고.”
“맞아! 하지만 반대로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무인이나 상당한 부를 축적한 대상인 중에는 평민인데도 넓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있어. 이런 경우에는 왕궁에 거액을 지불하고 성씨를 사는 경우도 종종 있곤 해.”
“으음... 성씨를 돈 주고 산다라... 그러고 보니 귀족 중에는 세습되지 않고 1대에 그치는 작위도 있다고 했었나?”
“응! 이해가 빠른데 도란? 그런 건 일대귀족이라고 해서 왕으로부터 작위를 수여 받은 본인 당대에만 지위를 유지하는 거야. 보통 유공자를 대우하거나 귀족 가문 수를 불필요하게 늘리지 않으면서도 왕실의 관리로 요인을 임명할 때 쓰는 꼼수 중 하나고.”
“그래...?”
그렇다면 카렌은 성씨를 가지고는 있지만 막상 귀족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아니, 근데 아리엘이 본가에서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귀족이면 그저 일대귀족으로 그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기자 불현듯 아리엘이 탄식하며 손가락을 울렸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아리엘이 소명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렌의 고향에 관련된 소동이 하나 더 있었어! 엄청 흥미로운데 어디 한번 들어볼래?”
“뭔데 그래?”
“응, 다름이 아니라 하루는 내가 카렌네 집에서 같이 자고 나왔는데 현관 앞에 웬 마차 세 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거야. 엄청나게 커다랗고 중후한 짐마차였는데 글쎄, 안에서 뭐가 나왔는지 알아?”
“....뭐가 나왔는데?”
사뭇 다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묻자 아리엘이 툭 내뱉었다.
“금.”
“...뭐?”
“셀 수도 없이 막대한 금덩어리였어. 우리 가문이 좀 검소하기는 하지만 내 아빠의 영주성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의 금이 아무렇게나 짐칸에 실려있더라고!”
“...그게 정말이야?”
“응,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냐. 이어서 다른 마차를 열어보니 번쩍번쩍 빛이 나는 크리스탈 촛대부터 비단, 옥, 도자기, 최고급 위스키와 코냑 등으로 가득했어.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금화도 한가득 있었고!”
“.....”
꿀꺽.
“...카렌은 뭐라 했는데?”
“음? 응... 글쎄...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왠지 엄청 당황하면서 수취인이 잘못된 것 같다고 돌려보냈어. 아, 그러고 보니 이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나도 카렌이랑 친한데 뭐 어때. 좀 더 얘기해줄 수 있겠어?”
“으음...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야. 아, 그리고 혹시라도 카렌한테는 절대로 고향이나 부모님에 관해서 묻지 마. 그러면 정색하면서 엄청나게 진절머리를 내거든.”
“.....”
나는 망양한 습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뗏목은 제각각 다채로운 소망을 싣고 순조롭게 나아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