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다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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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다시 #6
뗏목을 타고 습지를 건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니아가 몰래 스킨쉽을 시도하다가 다리를 삐끗하고 물에 빠질 뻔했던 일이나, 도중부터 악어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었던 거나, 흑도를 소환해 전투에 대비했는데 이상하게 녀석들이 멀뚱히 쳐다만 보더니 란이에게 인사하고 오히려 육지까지 우리를 수호해줬던 일 등.
뭍 인근에 도달해서는 물과 땅의 경계가 불분명해 느릿느릿하게 수풀을 헤치며 전진하다 보니 단단한 지면이 나왔다.
무사히 상륙을 마치자 라디가 기지개를 켜며 읊조렸다.
“으으...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네요. 중간부터는 졸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덕분에 무사히 건너와서 다행이네. 하루 걸을 분량은 족히 지나온 것 같은데.”
“다 란이 덕분이야! 정령의 마법은 진짜 편리하구나?”
“.....”
란이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우쭐거리자 나는 천천히 그 광경에서 시선을 돌리고 투덜거렸다.
“으음... 어떻게든 악어 기름을 구하고 싶었는데...”
“....”
“그렇게 졸래졸래 쫓아오는데 잡아다가 가죽을 벗길 수도 없고...”
종알거리며 배낭을 주워들자 라디가 내 귀를 꼬집었다.
“...란이 앞에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애가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동심은 못 지켜줄지언정.”
“아야얏!! 그, 그래서 일부러 못 듣게 조용히...!”
“으이구... 철 좀 드세요. 평소에는 그렇게나 듬직하면서 왜 가끔씩 이렇게 애처럼 굴고...”
“아아!! 귀, 귀 떨어져!! 내가 잘못했어!!!”
“.....”
라디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구석에 쪼그려 욱신거리는 귓불을 부여잡고 있자니 옆에서 톡톡 잡아당기는 기척이 전해져온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곳엔 란이가 다소곳이 내 옷깃을 붙잡고는...
됴란 오.. 빠!
“응, 왜 란이야? 그리고 오빠가 아니라 아빠야.”
오빠!
“....”
뭐, 괜찮으려나.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란이가 곰살궂게 안기며 어리숙한 발음으로 물었다.
나... 자랬.. 어?
“...응, 엄청 잘했어. 역시 우리 란이가 최고야.”
헤헤...
“혹시 상으로 받고 싶은 거 있어?”
샹...?
“그래, 란이가 바라는 건 아빠가 뭐든지 하나 들어줄게. 말해봐.”
.....
이에 란이는 우물쭈물 손가락을 맞대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더니...
뾰...
“뾰?”
뾰뾰...
“...뽀뽀 말하는 거야? 뽀뽀는 평소에도 자주 해주잖아. 란이는 누구랑 달리 욕심도 없구나?”
쪽!
나는 곧바로 란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었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은 불만족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재차 뽀뽀해주자 파흐흐 물거품이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살갑게 안겨들었지만.
녀석이 만족할 때까지 한껏 쓰다듬어주고 있자니 니아가 배낭을 짊어지며 말했다.
“으음... 걔 아무리 봐도 키스해달라고 조르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우리 란이는 아직 순수하다고요.”
“아니 쟤 나이도 우리보다 훨씬 많잖아. 물론 대부분은 호숫가에서 수영하거나 따분하게 물고기들이랑 대화하며 보냈을 테지만. ...알 건 다 알 텐데?”
“으음... 그래도 니아 님보다는 어릴지도...”
“야.”
“....”
“너 지금 뭐라 했어.”
“니, 니아 님...? 그, 그러니까 제 말은...”
“뭐라 했냐고 묻잖아.”
“...죄송합니다.”
“뭐라 했냐니깐?”
“....”
오싹!
나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감히 제가 주제넘은 발언을...!”
“.....”
“제, 제가 잘못했어요 니아 님. 진짜 진짜 죄송해요!!”
“.....”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
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더니 내 어깨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주었다.
“정말... 나 그렇게 나이 안 많다니까? 붉은 매 길드 전투원 중에서도 제일 어리다고 했잖아. 소년보다 고작 몇 살 더 많단 말이야.”
“그렇죠. 잠깐 잊고 있었어요.”
“...다음에도 그러면 진짜 진심으로 삐진다?”
“고마워요 니아 님. ...근데 왜 비밀로 하시는 건데요?”
“응, 뭐가?”
“나이 말이에요. 그냥 솔직히 말씀하셔도...”
“응? 그야 진짜 나이를 밝히면 소년이 싫어할 거 아냐. 소년은 연하 취향 아니었어?”
“.....”
그건 또 무슨...
“싫어하긴 왜 싫어해요. 저는 그냥 니아 님을 좋아하는 건데. 저보다 살짝 더 연상인 정도가 아니라 백 살 먹은 엘프였다고 하더라도 똑같았을걸요?”
“그, 그래?”
“당연하죠. 게다가 이렇게 귀엽고 항상 변함없이 절 좋아해 주는 이성을 싫어할 리가 있겠어요?”
“.....”
“반짝이는 금발도 너무 아름답고, 꼬리도 엄청 북슬북슬하고, 살결도 부드러운 데다가...”
“그, 그만...!”
“왜요? 아직 남은 매력이 가득...”
“으... 너 그거 엄청 부끄럽거든...?”
니아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며 중얼거렸다.
“...너 나중에 잘 때 두고 봐.”
“네? 방금 못 들었는데 다시...”
“됐네요.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지나 말해. 습지도 건너왔잖아.”
“음... 어차피 오늘 안에 2계층에 도달하는 건 무리고... 일단 최대한 이동해둘까 하는데...”
“그래? 그러면 이곳에서 어물쩍거리지 말고 바로 출발...”
“아, 그래서 말인데 잠깐 기다려 보시겠어요?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
“우와 소년!! 이거 진짜 장난 아냐!!!”
“들뜬 건 알겠는데 일어서지 마세요!! 자칫하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야호!! 신난다~!!”
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더니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거친 풍압에 건조해진 안구로 전방을 주시하고자 애쓰며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내렸다.
불도저처럼 맹렬히 질주하는 노래기의 등에 탄 채 던전을 가로지르다 보니 점점 지형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싱그러운 목초와 관목은 단단한 지각으로 뒤바뀌었고, 푸르렀던 하늘은 흙먼지가 뒤섞여 공장 지대를 연상시키는 황색으로 변했으며, 곳곳에는 커다란 바위와 기괴하게 뒤틀린 암반이 솟구쳤다.
라디가 주변 지형을 유심히 둘러보고는 소리쳤다.
“도란님!! 지도 좀 주실 수 있어요?!”
“그래! 여기!!”
펄럭펄럭펄럭!!
“으윽...”
라디가 바람에 흩날리는 지도 낱장을 힘겹게 부여잡고 들여다보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제 곧 병목 지점에 도달해요!!! 슬슬 노래기를 역소환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 알았어!!! 야, 들었지?!!”
우오오오옹!!
끼이이익─!!!
노래기가 급제동하자 어마어마한 관성이 신체를 덮쳤다.
순간 실비가 손을 놓치고 튕겨나갔지만, 니아가 날렵하게 뛰어올라 허공에서 붙들어준 덕분에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라디와 아리엘을 도와 무사히 노래기에서 내려오고는 녀석의 외골격을 두드리며 읊조렸다.
“...흥분한 건 알겠는데 다음번부터 멈추라고 할 때는 천천히 속도를 늦춰. 알겠지?”
우옹...
“그렇게 주눅 들지는 말고. 잘했어. 다음번에 또 부탁할게.”
노래기를 도로 어둠 속으로 물리고 옷매무새를 다듬자 아리엘이 신난 기색으로 내 팔을 껴안고 외쳤다.
“도란!! 너무 재밌었어!!! 대체 어떻게 노래기를 타고 올 생각을 한 거야?!”
“.....”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나는 전투할 때 종종 노래기에 올라타서 싸우곤 했거든. 평소에는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자중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없는 구역이라고는 해도 여기까지 오면서 한두 명쯤은 우리를 목격했을 텐데...”
“뭐... 그럼 신종 마물 같은 거로 착각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백부장 하킴을 포함해 베라스틴의 기사들은 내 능력을 알고 있으니 조만간 이 힘에 관한 것도 퍼져나가지 않을까 싶다.
이제 안디라 님도 날 헤치지 않는 걸 확인했고, 혹여나 정치적으로 곤란한 일이 생기더라도 아리엘의 가문이 뒷배를 봐줄 테니 이전만큼 내 능력이 알려질까 봐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아리엘과 어깨를 맞대고 있자니 라디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다음부터는 노래기한테 속도 좀 늦춰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제대로 타려면 안장이라도 따로 마련해두는 편이 좋겠고요.”
“알았어. 또 뭐 필요한 게 있을까?”
“중간중간 머리 들지 말라고도 전해주세요. 갑자기 땅에서 멀어져서 얼마나 식겁했는지 아세요? 게다가 그런 걸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밧줄 하나에만 의지해서 타다니...! 도란님은 좀 더 위기의식이라는 걸...!!”
“알았어 알았어.”
피식 웃으며 라디의 머리를 헝클어주자 저만치서 니아와 실비가 다가왔다.
니아가 금빛 눈동자를 눈부시게 빛내며 외쳤다.
“소년 엄청 짜릿했어!! 우리 한 번 더 타자!!”
“이제 사람이 많아서 안 돼요. 나중에 던전 깊숙이 들어가서 인적이 드문 곳이 나오면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니아 님 각력이면 방금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요?”
“그래도 내 발로 직접 달리는 거랑 마물을 타고 던전을 횡단하는 건 완전 다르잖아!! 후자가 훨씬 훠~얼씬 더 멋진걸?!! 그 왜, 머리를 쓰다듬을 때도 혼자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데 누군가가 대신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좋은 거랑 마찬가지야!!”
“그래요?”
“응!!”
“...이리 와 봐요.”
나는 니아를 끌어당겨 그녀의 말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중얼거렸다.
“약았어 정말...”
“히히... 그리고 그거도 알아?”
“....?”
“수인의 꼬리도 혼자서 만질 때는 그냥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만져줄 땐 가슴이 두둥실거리고 엄청 기분이 좋다?”
“....”
“소년이 만져줄래...?”
니아가 내 가슴팍을 붙잡고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듯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더니 호피 무늬 꼬리로 톡톡 하반신을 자극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니아는 까르르 맑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아핫...! 간지러 소년~! 드디어 날 안을 생각이 든 거야? 빨리 둘만 있는 곳으로...”
“....”
“소년...?”
“.....”
나는 그녀의 의문에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발치에서 노래기를 소환하고는ㅡ
“야, 빨리 이 취객 좀 모셔다드려. 너랑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우옹!
“소, 소년!! 안 돼!! 이럴 순 없어어어어──!!!”
탁탁 손을 털고는 노래기의 무수한 다리에 안겨 저 멀리 황야로 사라져가는 니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이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지.”
내 평판이 나빠지는 데 적어도 한 획 정도는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뇌까리며 시선을 돌리자 벙찐 실비와 란이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다정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저런 거 보고 배우면 안 된다? 지지야 지지. 알았지?”
“....” ....
“어...?”
“...알겠습니다.”
됴란.
실비와 란이가 차례로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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