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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321화 (321/375)

〈 321화 〉 다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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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다시 #7

“으음... 이곳은 그래도 마물이 아직 좀 남아있네...”

느지막한 저녁, 등 뒤로 붉은 황혼이 기울자 피로 물든 지면이 내려다보였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눈앞에는 대형 도마뱀이나 아르마딜로 등 마물의 살점이 널려있었으며, 흥건한 혈흔이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능선 아래로 흘려간다.

노래기를 타고 던전을 횡단해온 지 조금 더 흘렀을 무렵, 야영 준비를 위해 주변 지형 정찰에 나선 것이 지금.

바위에 걸터앉아 흑도와 단도를 역소환하고 고블린 석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어떻게...”

“응?”

“...주인님은 정말로 강하시군요. 이렇게나 많은 마물은 힘도 들이시지 않고 단숨에...”

“.....”

나는 피식 웃고는 단검 날을 유심히 살피며 읊조렸다.

“그거 알아?”

“무얼 말씀이십니까?”

“석 달 전, 이 던전에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나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어.”

“네...? 하지만 겨우 석 달 만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인을 만났거든.”

“기인.. 말입니까...?”

등 뒤로부터 드리운 실비의 그림자가 한걸음 다가왔다.

나는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과거를 반추하며 말했다.

“그래,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 난 비약적으로 발전했어. 전투 방식도 많이 참고했고, 덕분에 강력한 무기도 얻었고, 술을 팔아 떼돈도 벌었고, 목숨을 구원받은 적도 여러 번 있어.”

“주인님의 목숨을 구해주셨다니... 정말 감사하신 분이군요. 혹시 어떤 인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도 몰라.”

“네...?”

실비의 아름다운 음색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나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나도 잘 몰라. 그래서 이번 여정을 떠나온 거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려고.”

“.....”

“...실비는 누군지 알겠어?”

천천히 뒤돌아보자 실비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나는 바위에서 일어나 고블린 석검을 허리춤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자, 그럼 주변에 위협적인 마물이 없는 것도 확인했고 이곳도 정리했으니 슬슬 돌아가자. 혹시 뭐 빠트린 거 없지?”

“예... 하지만...”

“왜 실비야?”

“이 마물들은 소재를 덜어내지 않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저 도마뱀의 이빨이나 콩벌레처럼 생긴 몬스터의 갑각은 쓸모가 있어 보이는데...”

“아...”

나는 참혹하게 도륙 난 마물 사체를 흘겨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이놈들이 보기에는 값져 보여도 1층에서 등장하는 놈들이라 희소성이 없거든. 이전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가격이 나갔지만 지금은 챙겨가느니만 못할 거야.”

“그런... 가요?”

“왜, 아쉬워?”

“그... 솔직히 조금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격이 덜하다고는 하나 소재를 팔면 보리빵 다섯 개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을 텐데...”

“보리빵? 그래?”

실비가 미련이 남는 눈길로 사체를 응시하자 나는 쿡쿡 실소했다.

그도 그럴 게, 비유하는 방식이 내 예전 모습과 판박이 아닌가?

나는 으레 라디나 란이를 대할 때처럼 녀석의 머리로 손을 뻗다가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우리가 갈 곳에 고대 유적도 있다는 건 실비도 알고 있지?”

“예...”

“거기에서 잘만 하면 무화과로 담근 술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무려 한 독에 금화 몇 파운드씩이나 하는 거거든.”

“그, 금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구하면 우리끼리 좀 나눠 마시고 몇 독은 내다 팔자. 실비도 한번 맛보고. 저번에 저택에서 술을 마실 때는 실비 혼자 우유로 대신했잖아.”

그간 지켜본 실비는 몹시 정숙하고 신중한 성격이니, 니아도 아니고 알코올이 들어가자마자 돌변해서 날 덮치거나 하지는 않겠지.

웃으며 돌아보자 녀석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하, 하지만 그렇게 귀한 술을 노예인 제가 마실 수는...”

“괜찮아. 다 같이 마실 거거든. 게다가 사실 그 유적에서 나온 건 전부 네 거기도 하고.”

“....?”

“자, 그보다 이제 빨리 돌아가자. 너무 늦었다.”

나는 꼬리를 갸웃거리는 실비를 데리고 야영지로 향했다. 흙먼지 자욱한 황무지를 가로질러 일행과 헤어졌던 곳에 도달하자 커다란 바위굴 안쪽에서 따스한 불빛이 비쳐오고 있었다.

굴 안쪽으로 발을 들이니 모닥불을 쬐던 니아가 살갑게 달려들어 맞이해주었다.

“왔어 소년? 정찰 결과는 어때? 아, 로브는 나한테 맡겨!”

“고마워요... 예상대로 별거 없었어요. 마물이 몇 마리 있긴 했는데 후딱 처리했고, 모험가들은 중심지에 모여서 다 같이 야영하나 봐요. 저 멀리서 불빛이 아른거리는 걸 봤거든요.”

“그래, 수고했어. 혹시 다른 건 없었고?”

“네, 그 외에 딱히 특별할 건... 아, 하늘에 구름이 많이 낀 걸로 봐서 곧 비가 내릴 수도 있으니 다들 어서 계곡에서 씻고 오세요. 이따가 수위가 불어나면 위험하니까요.”

“그래? 그러면 소년도 같이 씻으러 가자!”

“네? 저는 짐을 지키고 있어야죠.”

“그러지 말고 응? 짐 지키는 건 개미한테 시켜도 되잖아~ 말마따나 계곡물이 불어나면 소년도 씻기 곤란할 테고.”

“.....”

그건 그렇지만...

“씻는 동안 덮치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으세요?”

“아니? 마구마구 비비고 만질 건데?”

“...저는 나중에 따로 씻을게요.”

“아 왜~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아뇨,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고.. 개미들한테만 맡기고 있기엔 조금 불안한데다 여러모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생각할 거?”

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이제 내일이면 2계층에 돌입하잖아요. 그러니 지도를 보며 지형을 미리 파악해둬야죠. 그 외에도 경로나 식량 조절도 계산해놔야 하고... 무엇보다 유적 입구가 분명하지가 않아서...”

“그래? 그러면 그냥 씻고 와서 해도 되지 않아?”

“그렇긴 한데... 미리 계산해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요. 이건 제 습관 같은 거라... 저는 나중에 알아서 따로 씻을 테니 걱정 마시고 먼저 다녀오세요. 실비도 같이 따라가고.”

“...아쉽네.”

살짝 등을 떠밀어주자 니아가 쩝 입맛을 다시더니 내 볼에 뽀뽀하고는 손을 흔들며 나머지 일행과 함께 바위굴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간 찾아온 평화에 느긋한 심정으로 모닥불에 지도를 비춰보고 있자니...

“잘 돼가요?”

“어? 왜 다시 돌아왔어 라디야... 니아랑 같이 씻으러 간 거 아니었어?”

“도란님 혼자만 남겨두고 가기는 좀 그렇잖아요. 가위바위보로 정해서 제가 남기로 했죠.”

“하하... 그래? 진 거야?”

“아뇨? 이겼는데요?”

라디가 싱그럽게 웃더니 내 옆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녀석이 살며시 내 어깨에 기대며 속삭였다.

“그래서... 말씀하신 건 어때요?”

“음... 솔직히 조금 곤란한 상황이야. 얼추 유적의 위치를 알긴 하지만 확실하게 입구를 특정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2계층은 워낙 방대하고 넓은데다가 형세가 비슷비슷하니까요. 더군다나 지형의 고저차도 심해서 지도상의 위치를 알더라도 찾아가기 힘들고요...”

“그러니까 말이야...”

당시 나는 비를 피하고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동굴에서 머물던 중, 이상한 감각에 이끌려 굴 안쪽으로 나아가다가 유적의 입구를 발견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적을 발견했던 지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그 많은 동굴을 일일이 확인해보고 다니다간 너무 오래 걸리고 말 텐데...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그 왜, 우리가 나왔던 출구로 들어가는 건 힘든가? 2계층 끝에 있어서 많이 돌아가야 하기는 하지만 그쪽은 조금 더 확실하잖아. 내 기억으로는 높은 바위산 꼭데기였던 것 같은데...”

“으음... 하지만 그곳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통로를 이용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고대 유적의 최심부인 여왕의 안치실까지 직통으로 연결된 길인데 그냥 놔뒀을 리 없잖아요. 나올 땐 괜찮지만 역으로 들어갈 땐 함정이 발동된다거나 하지 않을까요? 저희가 그간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함정 말이에요.”

“으음... 어쩌면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있을 수도 있겠네... 그 왜, 아무리 걸어도 끝에 도달할 수 없다던가...”

붉은색 암석 위에 지어진 고대 도시에 입성할 때만 하더라도 공간 왜곡 때문에 한참을 미로에서 방황하다가 간신히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나는 턱을 매만지며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그럼 일단 유적 입구를 발견했던 곳에 가보고 결정하자. 근처에만 도달하면 저번처럼 감이 올지도 모르니까. 또...”

나는 근처의 배낭에서 한 물체를 꺼내들었다. 붉은 기운을 내포한 홍옥. 고대 이집트 역사에 등장하는 호루스의 눈과 동일한 물건으로 추정되는 보석.

유적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의문도 포함해 이 보석의 진짜 용도도 밝혀낼 수 있을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바위에 등을 기댔다. 조만간 중요한 진실을 앞두고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올 리 없는 바,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니아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지도를 머릿속에 암기해두려는 차...

“...너 지금 뭐 해.”

“네? 생각 마치신 거 아니셨어요?”

“아니,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 윽.”

“헤헤... 이게 말랑말랑해서 만지는 재미가... 아, 딱딱해졌다.”

라디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손바닥을 주물거리더니 불현듯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모닥불의 불길이 옆얼굴에 드리워 묘하게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라디의 머리칼을 쓸어넘겨주며 속삭였다.

“...쌓였어?”

“네? 그야 당연하죠.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도란님이 금욕하니까 저희도 일주일 넘게 강제로 참고 있다고요. 저뿐만 아니라 언니도 꽤 쌓였을걸요?”

“....”

“게다가 니아 언니가 도란님을 꼬시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웃음이 새어나오던지...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하고. 그야 도란님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단...”

­슬쩍!

“....이렇게 은근슬쩍 내비치는 걸 더 좋아하는 변태잖아요.”

라디가 꼬리로 귀여운 동물 이미지가 그려진 파자마를 젖히자 순수한 미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발칙한 무언가가 들여다보였다.

나는 황급히 두 눈을 가리며 물러났다.

“너, 너 왜 안 입었어...?!”

“이따가 씻고 오기로 했잖아요. 속옷은 미리 벗어뒀죠.”

“그, 그런...”

“그리고 언니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자, 잠깐 나도 아직 안 씻어서 땀 냄새가 조금...”

“...새삼스럽게요? 그냥 가만히만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라디가 부드럽게 내 어깨를 바위에 젖히고는 살며시 수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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