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 다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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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다시 #8
“솔직히 말해.”
“네...?”
“어제 너 라디랑 야한 짓 했지.”
“.....”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무 일 없었는데요?”
“거짓말!!! 그럼 라디는 왜 저렇게 피부가 빤질빤질한데?! 게다가 누가 봐도 상쾌한 표정이잖아!! 어제 뭔가 했지?!!”
“.....”
나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없었어요. 그보다 앞에 보고 걸으세요. 가뜩이나 주변에 모험가도 많은데 괜한 오해...”
“라디!!!!”
시치미 뚝 떼고 부정하자 이번엔 화살이 라디로 향했다.
라디가 뺨에 손을 짚더니 우아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머나, 무슨 일이시죠 니아 님?”
“어머나아? 무스으으은 일이시이이죠─?!! 야, 너 솔직히 말해!! 어제 소년이랑 했어 안 했어?!!”
“그야 당연히...”
라디가 날 힐끔 바라보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더니...
“...했죠. 골수까지 아주 쪽쪽 빨아먹었어요. 오랜만이라 어찌나 달던지... 평소에 과일을 많이 먹여둔 보람이 있었네요..”
“뭐, 뭣...?! 쪽쪽! 달아...?!”
“그리고 그거 아세요 니아 님?”
“....”
“도란님... 평소엔 부끄럼쟁이면서 한번 분위기 타면 완전히 야수로 돌변하거든요. 어제도 제 뒤통수를 붙잡고 얼마나 목구멍을 찔러대던지... 니아 님은 못 버티실 수도...?”
“우...! 우...!!”
라디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도발하자 니아가 복어처럼 잔뜩 뺨을 부풀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홱 나를 돌아보더니...
“소년!! 나랑도 섹스해!! 치사하게 라디랑만 하고...!! 나도 마구마구 박아달란 말야!! 라디보다 더 거칠게 해도 상관없으니까!!”
“무, 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주변에 다 듣잖아요!! 목소리 좀 낮춰요!!”
“섹스 섹스!! 나도 소년하고 무진장 교미하고 싶단 말야!! 엉망진창으로 따먹어서 임신할 때까지 꾹꾹...!”
“시끄러워요!! 그리고 저도 어제 라디랑 애무밖에 안 했다고요!! 차마 찔려서 본방은 안 했... 아악 아파!! 깨물지 마세요!!!”
“으읍!! 으흐으읍!!!”
“아, 안 되겠다. 실비야!! 니아 좀 떼어내 봐!!”
“네, 네?!”
“일단 좀 도와줘!!!”
“아, 알겠습니다!!”
실비가 황급히 달려와 니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녀석이 니아의 완력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는 바, 성난 소에 매달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는 실비를 보자 머릿속이 다급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덥석!
“크르릉!!”
“뭐, 뭐야 왜 안 먹혀?!!”
허공에 흩날리는 꼬리를 냅다 움켜쥐었지만 니아는 진정하기는커녕 더욱 길길이 날뛸 뿐.
이 짓도 몇 번 하다 보니 약발이 안 듣는 모양이다.
나는 집요하게 매달려 내 팔뚝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니아를 흘겨보고는
‘에라 모르겠다.’
쑤욱!
꺄악?!
“.....”
“자, 잠깐 소년...!! 거, 거긴?!”
“...내가 진정하랬지.”
“으흣... 윽..”
“조만간 알아서 덮쳐줄 테니까 성급하게 굴지 마세요. 그리고 라디 너.”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순식간에 얌전해진 니아로부터 시선을 떼고는 라디를 돌아보며 고했다.
“가뜩이나 비밀로 해도 모자랄 판에 부추기면 어쩌자는 거야. 이렇게 될 줄 뻔히 알고서.”
“으음... 재밌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해요.”
“그래, 다음부터는 자중 좀 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니아의 외설 발언을 듣고 주변에서 몰려드는 이목을 무시하며 고개를 들자 커다란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한데...
“으으... 소년.. 계속 만지고 있을 거야...? 나, 난 괜찮지만 이대로면 걷기가 조, 조오금 힘든데...”
“아, 죄송해요. 감촉이 좋아서 무심코.”
“아흣...♡”
천천히 손을 빼내자 니아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달뜬 숨을 들이쉬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주자 이번엔 아리엘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은근슬쩍 내 팔에 들러붙고는 속삭였다.
“저... 도란.”
“왜 아리엘?”
“그... 나도 좀... 슬슬 하고 싶은데... 이제 통증도 완전히 가셨고...”
“....”
그러고 보니...
아리엘과 초야를 치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성 사건이 일어난 탓에 그녀와는 오붓하게 보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부드럽게 아리엘의 은발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나중에 시간 따로 내보자. 유적 탐사를 마치고 암시장에 도착하면 당분간 한가해질 테니까 그때 많이 하자, 알았지?”
“응... 알았어.”
“그래, 그때가 되면 오랜만에 마력 공급도 좀 받아볼까?”
“....”
살짝 짓궂게 목덜미를 주무르자 아리엘이 뺨을 붉히더니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 마력 공급도 좋지만... 이번엔 더한 것도 해줄 수 있는데...”
“더한 거?”
“으응... 그러니까... 이번에 챙겨온 여벌 옷 중에 내 이전 사제복도 있는데...”
아리엘이 주변을 곁눈질하더니 내 귀에 소곤거렸다.
나는 그녀의 황홀한 계획에 솔깃하고선...
번쩍!
“꺄읏?! 도, 도란? 왜 갑자기...”
“...당장 하자.”
“응...?”
“미안, 못 참겠다. 아무 데나 한적한 곳에서... 음? 왜 라디야?”
“...지금 저희가 어떤 상황인지 망각한 건 아니겠죠? 두 분의 마음이야 이해한다만... 이 능선만 넘어서면 바로 2계층 입구가 보일 거예요.”
“.....”
아쉬운 마음에 아리엘을 도로 내려놓았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지만 여전히 뺨을 붉히고 아랫도리를 어루만지는 니아, 왜인지는 모르겠다만 꼬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실비와 얌전히 내 손을 잡고 걷는 아리엘 등을 데리고 완만한 능선을 올랐다.
그렇게 언덕 위에 도달하자 우리의 눈앞에 웅장한 경관이 펼쳐졌다.
“이건...”
“다시 봐도 압도적이네...”
경사면 아래로 펄럭이는 무수한 텐트, 여름철 피서지만큼이나 붐비는 군중, 그 너머 이 공간의 모든 존재감을 압도해버릴 듯 아가리를 벌린 동굴.
직경이 백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동굴 입구에는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연상시키는 날카롭고 커다란 바위가 나선 형태로 돋아있었고, 지금도 수많은 인파가 횃불을 들고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 원대한 규모만 아니었더라면 마치 초대형 마물이 땅속에서 솟아오르다가 그대로 석화되었다고 믿어도 좋을 정도.
다시 한번 스케일에 감탄하며 옆을 돌아보자 입을 헤 벌리고 굳어버린 아리엘이 보였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때, 압도적이지?”
“서, 설마 저 마물이 2계층으로 가는 통로야...?”
“응, 저 주둥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완만하게 아래를 향해 뻗어있거든. 그렇게 쭉 가다가 꽁무니로 빠져나오는 거야.”
“세상에... 통로라길래 던전 입구에서 지나왔던 석회 동굴 같은 걸 상상했는데... 도란은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나도 처음 봤을 땐 엄청 놀랐어. 저런 거랑 당면하니까 진짜 던전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나더라고. ...대체 누가 저렇게 큰 마물을 돌덩어리로 바꿔버렸을지 궁금하지 않아? 적어도 수백 년은 됐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
아리엘이 멍하니 동굴을 바라보았다.
기대 이상의 반응에 나는 흡족하게 미소짓고는 실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실비야. 실비도 이런 건 처음 보지? 제법 장관... 실비야?”
“.....”
실비는 석화된 마물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녀석은 내 시선을 눈치채고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뭐야... 혹시 무슨 일 있어? 왜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고...”
“네, 주인님께 여쭐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말해봐.”
“....”
“...실비야?”
실비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어째서...”
“어째서 주인님의 노래기가 저곳에 있는 겁니까.”
“뭐...?”
실비가 석화된 마물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주인님의 노래기가 저곳에 봉인되어 있는 겁니까.”
“자,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저게 노래기라고?! 그럴 리가...!”
나는 황급히 전방을 돌아보았다. 그야 비슷하게 생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저건...
“아, 아냐... 잘 봐봐. 주둥이 모양이 다르잖아. 게다가 이빨 형태도 많이 다르고... 저건 노래기라기보단 데스웜 같은 생명체라고 보는 게...”
“...그렇습니까? 제가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럼 실비는 왜 저 마물이 내 소환수라고 생각한 건데...?”
원인 모를 불안감을 억누르며 묻자 실비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으음... 뭐라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보자마자 그런 직감이 들었습니다. 주인님의 소환수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한... 막연한 슬픔이 전해져서... 불확실한 추측으로 혼란을 끼쳐 죄송합니다.”
“.....”
나는 멍하니 라디를 돌아보았다.
라디 또한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주변을 둘러보고는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일단 여기서 내려가는 게 좋겠어요. 니아 님 외모가 워낙 눈에 띄다 보니 조금씩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서...”
“그, 그래...! 가만히 있기도 좀 그러니까...”
나는 배낭끈을 움켜쥐고는 서둘러 언덕을 내려갔다.
실비에 발언에 대해서는 차후에 천천히 고민해봐도 되는 바, 고개를 살짝 내리깔고 조용히 인파 중심으로 향하자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온다.
“자자!! 2계층에 앞서 같이 사냥하실 파티원을 구합니다!! 신원이 보장된 사람들만! 선착순 세 명!!”
“플래시 골렘의 서식지가 적힌 지도 팝니다!! 수량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15실링에 급처합니다!!”
“아무 장검이나 구한다!! 제발 싸게 팔아주실 분!!”
“너희들 그 소식 들었어?! 8계층에 고대 유적이 있다는 소문이 있데...!”
“에이... 벌써 거기까지 간 모험가가 어디 있다고 그래. 듣자 하니 붉은 매 길드도 지금은 계층 탐사를 쉬고 있다며.”
“아니...! 진짜라니까!!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그 유명 S랭크...”
“.....”
최대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지나치려는 찰나
“이봐, 거기 후드 쓴 일행. 이걸 사 가지 않겠나? 2계층으로 가려면 이게 꼭 필요하다고.”
“....?”
한 상인이 길쭉한 콧수염을 매만지며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상인들의 상술이야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하지만 순간 호기심이 동해 멈춰서자 그가 목에 매단 널빤지에서 마물의 발톱으로 보이는 한 목걸이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잘 생각했군. 사지 멀쩡하게 눈앞의 동굴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이걸 몸에 지녀야 할 거야.”
“...이게 뭔데요?”
“이건 지코린이라는 마물의 발톱을 뽑아서 가공한 걸세. 몸에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불러온다는 물건이지. 아,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도 잘 아네. 하지만 과연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
고개를 들어 상인이 가리킨 동굴 입구를 바라보자 그곳엔 이전에 없던 커다란 석제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라디가 내 옆에 서서 까치발을 들고 구조물을 확인하더니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저건... 비석...? 경고문 같기도 하고... 모험가들의 이름이 쓰여있는 걸 보니 위령비 같기도 한데...”
“...우리가 던전에서 빠져나올 때도 있었어?”
“글쎄요... 그때 저희가 이곳을 지날 때는 밤이었으니...”
라디와 함께 나란히 비석을 응시하고 있자니 상인이 말을 이었다.
“저건 석 달 전 즈음 이 동굴에서 죽은 모험가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놓은 비석이자 경고문이라네. C랭크 이상의 강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붉은 매 길드의 보급대도 크게 당했다고 하더군. 혹시 메다올리눔 던전의 그림자 귀신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나?”
“그림자 귀신...?”
“그래! 얼마 전까지 이 동굴 안에서 그림자처럼 시꺼먼 마물이 출몰해 무자비하게 모험가들을 습격했다네! 비록 그 몬스터는 투구를 쓴 정체불명의 모험가에게 격퇴당했지만, 몬스터의 시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 그러니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유행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발톱이라네!”
“그럼 그 발톱이...”
“그래, 사람들이 지코린의 발톱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 뒤부터 저 통로에서 사상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네. 자네들은 소문의 그림자 귀신이 두렵지 않은가?”
“.....”
그 소문의 귀신이 제 바로 옆에 있는데요.
나는 꼬리를 갸웃거리는 실비를 돌아보고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이 통로에서 여왕과의 전투를 벌였던 것이 그렇게 와전된 모양. 그야 모든 진상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지만.
다만 상인의 말도 완전히 꾸며낸 건 아닌 모양인지 주변에 비슷한 물건을 사서 목에 걸고 동굴로 입장하는 모험가들이 보인다.
한숨을 내쉬며 배낭을 고쳐매고는 동굴로 향하자 상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뭐야?! 자네들 안 살 겐가?!!”
“네, 저희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이러지 말게나!! 다 진심으로 자네를 위한 걸세!! 동굴 안에서 귀신과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나?!!”
“....”
그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너무 고맙지.”
우리는 동굴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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