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 다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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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다시 #9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이자 발광 이끼의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준비해두었던 마석등을 켜고 앞으로 나아갔다.
영화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핵미사일의 발사로처럼 원통형으로 곧게 뻗은 통로는 어림잡아도 직경이 수십 미터는 넘어 보였으며,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람 형태의 바위나 주름진 석벽 등 여러 지형지물이 엿보였다.
통행로 좌우에는 등유 랜턴이 걸려 있었으나 워낙 규모가 큰 탓에 동굴을 전부 밝히는 건 불가능했고, 오히려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까닭에 음산한 기운을 물씬 풍긴다.
나는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실비야.”
“네, 주인님.”
“혹시라도 이 동굴 안에서 뭔가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면 바로 말해야 해. 알았지?”
“이상한... 감각 말씀이십니까?”
“그래, 사소한 거라도 빠짐없이 말해줘. 그리고... 라디.”
“네, 알고 있어요. ...다들 걸으면서 발밑을 주의 깊게 살펴주실 수 있으세요?”
“발밑? 발밑은 왜... 설마 좀전에 들은 귀신 이야기 때문에...? 하지만 그건 상인이 물건을 팔기 위해서 지어낸 게...”
“저희가 그 당사자거든요.”
“당사자라니 그게 무슨 말... 아.”
아리엘은 내 옆에 선 실비를 발견하고는 무언가 깨달은 듯 섬짓 숨을 들이켰다.
살며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발길을 옮기자 니아가 슬며시 달라붙어 속삭였다.
“저기... 아까 상인이 말했던 거 말야.”
“어떤 거요?”
“붉은 매 길드 보급대가 당했다는 이야기. 그거 예전에 보고서에서 봤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 한 마물이 나타나 우리 보급대원을 헤쳤는데 소년이 그 몬스터를 쓰러뜨렸다고 했던가?”
“네, 맞아요. 그 사건 때문에 아니스 님이 절 고평가해서 길드에 포섭하려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렇다면 그 습격자의 정체가 바로...”
“.....”
니아가 실비를 곁눈질했다.
나는 곤란하게 자세를 낮추며 대답했다.
“...네. 하지만 니아 님도 알아두셔야 할 게, 그건 엄연하게 실비라고 하기 힘든 데다가 어디까지나 사고...”
“걱정 마. 난 그런 걸로 쪼잔하게 앙심을 품고 그러지는 않으니까. 보급대원 중에 죽은 사람이 나왔다면 몰랐겠지만 목숨을 잃은 단원은 없기도 했고. ...우리 길드의 보급 부대를 무시하지 말라구!”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이어나갔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부지런히 나아가며 기괴하게 뒤틀린 암반, 유령처럼 흩날리는 거미줄, 마석등에 비친 모험가들의 창백한 면면 따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한데...
“왜, 라디야. 혹시 할 말 있어?”
라디가 무어라 전하고 싶은 기색이었기에 속도를 늦추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네... 도란님, 제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소환수를 불러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소환수를...?”
“네... 아무래도 실비가 그렇게 말했다면 뭔가 연관성이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능력은 개화하지 않았다지만 같은 축복의 소유자잖아요. 단순히 착각이었다고 하더라도 마물만 감지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고...”
“....”
“도란님이 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넘겨도 되지만...”
“....알았어. 소환해 볼게. 하지만 여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조금 떨어져서 소환하자. ....아이고, 힘드네! 우리 여기서 조금 쉬었다 갈까?”
“.....”
나는 어깨를 푸는 시늉을 하며 대열에서 벗어났다.
의아하게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은근슬쩍 눈짓하고는 통로 옆 바위 중 하나에 걸터앉자 눈앞으로 모험가 무리가 여럿 지나갔다.
수통을 나눠마시며 휴식하는 모습을 가장하고 있자니 아른거리는 횃불이 점차 멀어지고 인적이 뜸해지는 타이밍이 나왔다.
혼신의 연기에 만족하며 개미와 노래기를 소환하려는 차...
“...도란님의 연기는 한결같이 최악이네요.”
“그러게... 도란은 절대 배우 하면 안 될 것 같아.”
“으음... 나도 방금 건 좀...”
“시끄러. ...그럼 부른다?”
정신을 집중하자 발치에서 쪼꼬미 모드의 개미와 노래기가 튀어나왔다.
녀석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주변 분위기에 잠시 주춤했지만, 날 발견하곤 살갑게 더듬이를 흔들었다.
나는 곧바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곤 녀석들을 구석으로 잡아끌며 속삭였다.
“쉬잇...! 목소리 낮춰!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크샥?
“...모르겠다고? 혹시 너희랑 비슷한 소환수의 존재가 느껴진다거나...”
키킥? 크샤앗?
“....알았어. 일단은 너희를 계속 소환해둘 건데, 다른 모험가 눈에 띄지 않겠다고 약속해. 우리랑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오다가 뭔가 발견하면 바로 알려주고.”
....우옹.
“그래. 그럼 이제 우리는 가볼게.”
나는 개미와 노래기를 다독여주고는 발길을 돌렸다. 배낭끈을 고쳐매며 통로를 전진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이동하자 점점 지형에도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으스스하네...’
발을 내디디면 내디딜수록 점점 통로의 굴곡이 심해졌으며, 바닥에는 찰랑이는 물기가 고였고, 중앙의 통행로를 따라 늘어선 방풍 랜턴은 습기를 머금고 꺼져 있거나 하얀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라디가 수면 위로 일렁이는 마석등의 반사광을 응시하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뭔가가 나올까요?”
“글쎄다... 분위기만 봤을 땐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전혀 안 이상할 것 같기는 하다만... 라디는 귀신 믿어?”
“네? 고스트 계열 몬스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스켈레톤과 더불어 언데드의 대표 격 마물 중 하나잖아요. 사자의 혼이 현세에 잔류하는 경우도 종종 보고된 적이 있고.”
“.....”
세상이 다르면 이런 게 문제구먼..
‘그냥 무난하게 빠져나갈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발길을 옮겼다.
기적처럼 그림자 여왕이 다시 나타날 리도 없고, 이런 곳에 값진 보물 따위가 있을 리도 없으니 그저 무탈하게 지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간 어디 내 생각대로 일이 풀린 적이 있었던가.
따각!
“음...?”
따각! 따각!
“.....”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자 실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개미가 주인님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뭐...? 개미가? 어디...”
“...저쪽입니다.”
실비가 통로 외곽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대열에서 벗어나 실비가 가리킨 구석으로 향하자 그곳엔 개미가 노래기 옆에 서서 톱니를 딸칵거리고 있었다.
“왜, 뭔가 발견했어?”
“크샥!”
“어디 있는데?”
크샤샤샷!!
“.....”
나는 멍하니 개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 까마득한 동굴의 상단부를.
“...정말로 저기에 뭔가가 있다고?”
크샥!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간단 말인가.
망연히 머리 위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니아가 까치발을 들고 천장을 살피며 말했다.
“으음... 그러면 내가 가서 확인해보고 올까?”
“네? 니아 님이 어떻게...”
“쉬워! 파바박 벽을 박차면 높게 뛰어오를 수 있거든! 고양잇과 수인이 워낙 유연하잖아!”
“하지만... 여기는 너무 미끄럽잖아요. 공기가 너무 습해서 벽에 물기가 장난 아닌데... 게다가 저 위에 뭔가가 있다는 것만 알고 어디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발견할 때까지 계속 뛰어오를 수도 없고요.”
“우응... 그건 그렇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어두운 장소는 도적이나 변절한 모험가가 활개치기에 최적인 환경인 바, 습격에 대비해 지금처럼 통행량이 많은 낮 시간대에 사람들이 대거 몰리다 보니 주변 이목이 너무 많다.
니아 같은 미소녀가 주구장창 벽을 뛰어오르고 있으면 다들 궁금해서라도 한 번씩 보고 가겠지.
‘시선이 몰리는 건 곤란한데...’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도 신경쓰여 눈가를 짚으며 고민하자 아리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그 애를 소환해 보는 건 어때 도란?”
“그 애?”
“응, 최근 도란한테 소환할 수 있는 마물이 하나 더 늘었다며. 새까만 거미라고 했었나... 그 소환수의 능력을 이용하면 높은 곳도 오를 수 있지 않아? 식물을 소환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러면 너무 요란하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문제랄 것... 까지는 아닌데.”
솔직히 그 녀석은 좀 거북하다.
진돗개처럼 마냥 충성스러운 내 다른 소환수들과는 달리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안 오는 녀석이기도 하고, 거미란 생물 자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준 샌드위치에서 털북숭이 다리가 삐져나와 있는 걸 본 내게는 미약한 트라우마니까.
무엇보다 모험가가 된 직후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사냥을 위해 멀리 성밖으로 나섰다가 거미굴에 끌려가 고생고생하며 탈출했던 기억도 있고.
단검 자루를 매만지며 망설이고 있자니 라디가 조급한 어조로 채근했다.
“도란님...! 사람이 없는 지금이 적기에요.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탐색을 포기하고 나중에 다시 와야 할지도 몰라요. 너무 어물쩍거렸다간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대신 이놈은 사이즈가 좀 크니까 다들 물러서 있어. 마석등도 잠시 꺼두고.”
“네...!”
파스슥...
모두가 일제히 마석등을 소등하자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나는 저 멀리 통행로에서 비쳐오는 어렴풋한 횃불을 응시하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수면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퍼져나가더니 잠시 후, 거대한 형체가 소리 없이 눈앞에 도래했다.
철썩.
고개가 뻐근하도록 올려다볼 만치 커다란 칠흑의 거미가 아래턱을 까딱거리며 지면을 딛고 서자 라디 일행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도, 도란님 이 마물은...”
“그래, 얘가 바로 내 새로운 소환수야. 저번에 대충 들었지? 자세한 설명은 이따가 할게. 지금은 그보다 저 위로 올라가야 할 텐데... 개미랑 노래기 말로는 위에 뭔가 있다는데 혹시 너도 느껴져?”
.....
거미가 과묵하게 아래턱을 까딱거렸다.
...맞다는 거겠지?
“...그래, 그러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데 우리를 이 위까지 올려보내 줄 수 있겠어?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
딸칵.
“응? 안 된다고?”
딸칵 딸칵.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딸칵 딸칵 딸칵.
“.....”
거미가 시끄럽게 아래턱을 덜컥거리며 앞다리 두 개로 지면을 톡톡 두드렸다.
의미심장한 제스처에 녀석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으음... 혹시 두 명까지만 운반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런 거야?”
딸칵.
“....그런가 보네.”
한숨을 내쉬며 근처 바위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잠깐 확인만 하고 나올 셈이었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나는 일단 확정이고... 누가 나랑 같이 갈래?”
““““......””””
여성진 사이에 묘한 공기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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