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화 〉 다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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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다시 #10
결국 나랑 같이 올라갈 사람으로 실비가 선정되었다.
선정 이유로는 나를 덮칠(?) 가능성이 가장 적다는 것이 첫째요, 둘째로는
이 동굴을 처음 봤을 때 주장한 것처럼 오감으로는 감지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기대감에서였다.
더 이상 지체하면 사람이 올 터, 서둘러 실비와 함께 거미 앞에 서니 부러운 눈길로 쳐다봐오는 세 쌍의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그야...
“저기... 꼭 이렇게 끌어안아야 하는 거야...?”
딸깍.
“...미안, 불편하지 실비야? 잠깐이면 되니까 조금만 참아줘.”
“저는 괜찮습니다. 부디 개의치 마시길.”
거미의 주문대로 실비와 부둥켜안고 있자니 불편한 심정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나야 라디나 아리엘 덕에 이런 스킨쉽이 익숙하다지만 실비는 아닐 테니까.
재빨리 거미에게 이제 됐다고 신호를 보내자
파스슷!
“윽?!”
“읏...?!”
녀석이 꽁무니의 방적돌기에서 투명한 실을 내뿜고는 포장 용기에 랩을 감싸듯 순식간에 나와 실비를 포박했다.
끈적이는 거미줄에 팔다리를 압박당해 옴짝달싹조차 못 하고 있자니 거미가 가느다란 다리로 나와 실비를 움켜쥐고는 천장에 거미줄을 발사해 빠르게 상승했다.
‘뭐, 뭐야...!’
뒤집힌 세상 속, 순식간에 멀어지는 지면을 올려다보자 순간 덜컥 겁이 치밀었지만 차마 다른 모험가들에게 들킬까 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앞의 실비를 꽉 끌어안다 보니 어느 순간 바람이 멎었다.
허공에서 대롱대롱 붙들린 채 당황스러운 눈길을 이리저리 굴리던 중, 거미가 우리를 천장 근처의 구멍으로 냅다 내던졌다.
휘익!!
“으악!!”
“으읏...!”
실비와 뒤엉켜 지면을 구르다 욱신거리는 고개를 드니 굴 밖으로 스윽 빠져나가는 거미가 보인다.
딸칵!
“뭐, 뭐야...?! 넌 어디가!?”
딸칵! 딸칵!
“아, 아니 잠깐만!! 이건 풀어주고 가야 할 것 아...!! 아악!!!”
콕!
거미가 뾰족한 발톱으로 내 이마를 콕! 찌르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어이를 상실한 채 멍하니 녀석이 사라진 굴 입구를 바라보자 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감촉이 전해져왔다.
“...미안 실비야, 아팠지? 지금 바로 풀어줄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줄 수 있겠어?”
“전... 괜찮습니다.”
“...고마워. 단도로 거미줄을 잘라낼 건데 다치면 안 되니까 움직이지 말고 있어.”
나는 실비가 위로 향하도록 몸을 뒤집은 뒤 손아귀에 단도를 소환했다.
혹시라도 녀석이 베이지 않게끔 조심조심 손목 근처부터 전신을 둘러싼 거미줄을 잘라나갔지만, 워낙 끈적거리고 질겨서 쉽지 않다.
“끄응... 이거 겁나 안 잘리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칭칭 감아서... 역시 맘에 안 든단 말이야..”
“...거미 말씀이십니까?”
“응, 걔는 내 소환수 중에서도 굉장히 늦게 발현한 편인데 도통 뭔 생각인지 알 수가 없거든. 내 명령에 복종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하고...”
“저도 솔직히 좀 꺼림칙합니다...”
“그래?”
“예... 그 거미를 본 순간 목덜미가 시큰거리고 굉장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개미나 노래기는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유독 저 거미만...”
“....”
미안, 그건 나 때문일걸.
순간 영주성 지하에서 거미를 시켜 실비의 목덜미에 마비독을 주입하게 시켰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서는 주인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조용히 묻고 가는 편이 낫겠지.
잠자코 손을 놀리다 보니 사지를 포박했던 거미줄이 어느 정도 잘려나갔다.
나는 자유를 되찾은 몸을 일으켜 실비를 부축해주었다.
“...괜찮아?”
“예... 감사합니다.”
“일단 칼로 베어내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야. 옷에 들러붙은 나머지 거미줄은 손으로 떼어내자. 그나저나 먼저 이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 공간은 뭐지...?
주변을 둘러보자 갱도처럼 안쪽으로 쭉 뻗은 통로가 보였다. 나와 실비 주변에는 깨진 돌조각이나 곡괭이 자국 등 굴착한 흔적으로 가득했고, 상처투성이 암반으로부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누가 보아도 인위적으로 굴을 만든 모습.
우선 거미가 우리를 내던졌던 입구로 향하자 까마득한 저 아래, 통행로를 따라 늘어선 등유등과 기름 랜턴 따위를 손에 쥐고 이동하는 모험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곳에 있으니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
어지간한 조명은 이곳까지 미치지 못할 터, 이렇게 천장 부근까지 자세히 둘러보는 사람은 몹시 드물 거다. 더군다나 입구가 주변과 동화되어 있어 식별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닐뿐더러, 설령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는 모험가가 흔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누가 대체 무슨 용도로 이런 곳에 갱도를 만들었을까.
나는 우선 챙겨왔던 마석등을 점등하고 불빛을 깜빡거려 아래서 걱정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을 라디 일행에게 무사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돌아서며 말했다.
“실비야, 이제 이 안쪽을 탐사해볼 건데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내 뒤에 바짝 붙어있어. 혹시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든 바로 말해주고.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크샥!
우옹!
“너희가 길을 안내해. 여기서 뭔가 느꼈다고 했지?”
지상에서 대기하던 개미와 노래기를 재소환하자 녀석들이 반갑게 더듬이를 흔들었다.
쫄래쫄래 앞서나가는 녀석들을 뒤따르며 혹시 모를 위험에 온갖 주의를 기울이며 전진하다 보니 더욱 본격적으로 굴을 파낸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화약 탓에 거뭇거뭇하게 그슬린 발파의 흔적, 흙 속성 마법을 사용했는지 액체화되어 흘러내린 석벽과 굴을 파내며 고이는 물을 퍼내기 위한 나무 양동이 등...
실비가 갱도 구석, 낡아서 형체만 남은 수레를 응시하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체 이곳은... 언제 건설된 곳일까요...? 최근에 만들어진 공간 같지는 않은데...”
“이 던전은 서너 달쯤 전에 사람들에게 재발견되기 전까지는 수백 년간 잠들어 있었어. 누군가 그사이에 이런 굴을 파내기란 불가능할 테니 이곳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거라 보는 게 맞겠지.”
“수백 년 전... 엄청 오래전 일이군요... 하지만 대체 무슨 목적으로...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이런 위치에 만들 정도면 무언가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내 생각도 그래. 아마도 뭔가를 은닉하려는 목적이었거나 반대로 이 너머에 뭔가 있을...”
그때였다ㅡ.
크샤아아앗!!
협소한 갱도를 나아가던 중, 앞서 걷던 개미가 돌연 더듬이를 바짝 세우며 신호를 보냈다.
나는 즉각 대화를 중단하고 단도를 전방으로 겨누며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기척이 들려오지 않아 마석등을 불빛을 내세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자...
“이건...”
백골(白?).
뼈만 남은 채 아무렇게나 방치된 유골들, 날붙이에 당하기라도 한 듯 볼품없이 찢어진 옷조각과 수백 년은 족히 지난 듯 녹슬고 삭아버린 병기류 등.
통로 전체에 죽음의 기운이 팽배했다.
차마 직시하기 힘든 참상에 실비의 눈을 가리고 물러나게 시킨 뒤 가까이 다가가 살피자 더욱 적나라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에 젖어 검게 변색된 옷감과 고통스럽게 바닥을 기던 자세로 임종을 맞이한 송장, 단단한 물체에 가격당하기라도 한 듯 정수리가 깨져나간 두개골, 도끼날에 깔끔하게 잘려나간 상반신이나 상처로 가득한 뼈다귀 등.
나는 그중 한 시체 옆에 놓여있는 한 물체를 주워들며 중얼거렸다.
“곡괭이... 그 밖에도 온갖 굴착 도구를 가지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 사람들이 굴을 파낸 게 맞는 모양인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참혹한 주검으로 변해버린 걸까?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겨있자니 등 뒤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뒤돌아보니 깨진 두개골 파편을 주워들고 유심히 살피는 실비가 보였다.
“뭐, 뭐야...! 여긴 왜 왔어?!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깐...!”
“주인님을 혼자 둘 수는 없습니다. 안주인님들이 주인님을 홀로 두면 항상 사건에 휘말린다고 꼭 잘 감시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
아니, 그건 그렇지만...
“...실비는 시체를 봐도 상관없는 거야? 이미 수백 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처음 보면 많이 무서울 텐데...”
“괜찮습니다. 슬럼가에서 살다 보면 종종 머리 없는 변사체나 아사한 시체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또 하루는 폐가인 줄 알고 들어갔던 주택의 지하실에서 시체 수십 구를 한 번에 목격한 적도 있습니다.”
“....”
담담하게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게다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인님. 그보다 이건...”
실비가 손에 든 두개골 조각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무언가에게 쫓기던 걸까요...?”
“쫓기다니... 어째서?”
“...저 통로 안쪽에 부식된 칼과 방패가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아마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로부터 급하게 도망치다가 흘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워낙 오래전 사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 ...실은 나도 같은 의견이야.”
눈앞의 사체들을 둘러보며 사고했다.
사체에 전투 흔적이 존재하는 걸로 보아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가설로는 이 굴을 파던 중 동료끼리 불화가 생겨 서로를 헤쳤다거나,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로부터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던 중 기력이 다해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거나 정도가 되겠지.
어느 쪽이든 이 너머에 뭔가가 있다는 소리가 된다.
‘혹시 이 앞에 보물이 있나...?’
아니, 어쩌면 우리가 전에 방문했던 고대 유적과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번거롭게 갱도까지 건설해가며 추구할 정도의 대상이라면 고대 유적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한데...
“...야, 너 지금 입에 물고 있는 거 뭐야. 이리 내.”
크샥...!
“어쭈, 반항해?”
....
개미가 푹 고개를 떨구더니 마지못해 다가왔다.
녀석의 주둥이에 낀 둥그스름한 물체를 압수해 들여다보자
“이건...”
가면?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디자인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헤집던 중 문뜩 뒤돌아보자 내 눈에 들어온 건ㅡ
“뭐...?! 위험해 실비!!!”
실비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의 한 해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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