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28화 (328/375)

〈 328화 〉 탐색 #4

* * *

[328] 탐색 #4

“뭐, 뭐야 도란...! 방금 그거 뭐였어...?”

“뭐긴 뭐야, 함정이지.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여기서 어물쩍거리고 있으니 바위가 굴러떨어지더라. ...라디야.”

“네, 잠시만요.”

라디가 태연하게 배낭에서 종이 뭉치와 깃펜, 잉크병을 꺼내더니 미로를 유심히 살피며 간단한 약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나는 덩굴을 조작해 바위를 완전히 떨쳐내고는 녀석과 나란히 섰다.

복잡한 미로를 관찰하며 기억 속의 모습과 달라진 모습은 없는지 둘러보자 니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왠지... 소년은 엄청 익숙해 보이네... 전혀 놀라지도 않고...”

“실제로 익숙하니까요. 이전에 이곳에서 얼마나 생고생을 했던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올 수는 없죠.”

“으음... 그럼 특별히 세워둔 계획이라도 있어?”

“네, 대충은요.”

혹시 모르니 라디를 통해 약도를 작성하고는 있지만 가능한 방법은 모두 동원해볼 예정이다.

노래기나 덩굴을 타고 미궁벽 위로 이동한다던가, 거미줄로 장벽을 기어오른다던가, 그것마저 안 되면 니아의 각력을 이용해 뛰어넘는다던가.

배낭을 들고 오느라 뻐근해진 어깨를 풀며 미궁 중심부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고 예상 소요 시간을 계산하고 있자니 라디가 깃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도 작성은 이걸로 대강 마쳤어요. 그리고 도란님, 잠시 의논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저기 좀 봐주시겠어요?”

“어디... 뭐 말하는 건데?”

“저기 저 회색빛이 감도는 건물이요. 저 유독 꼬여 있는 미로의 중심 부근... 보이세요?”

“으흠... 어렵네. 아...! 저기 저 네모난 건축물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나름 큰 건물이니 뭔가 있을 게 분명해요. 어쩌면 저번처럼 꿀이나 술 같은 식료품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술? 술이라 하면... 그 무화과랑 대추야자로 담근 와인 말이지... 흐흐...”

“네... 후후...”

“....?”

나와 라디가 얼굴을 맞대고 히죽히죽 입꼬리를 올리자 아리엘과 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나는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하고는 경사면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자! 유적에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하니 서두르는 편이 좋겠어. 일단 사나흘 안에 미궁을 통과하는 걸 목표로 움직이자.”

“네, 도란님.”

“응, 그럼 한번 가볼까?”

“아자아자 출발~!!”

“.....”

우리는 힘차게 전의를 불태우며 미궁에 입성했다.

*

유적에 발을 들이고 어느새 반나절 가량이 지난 상황.

그간 미궁을 전전하며 알아낸 사실이 있다.

우선 덩굴이나 노래기를 이용해 미궁벽을 기어올라 중심부로 향하는 건 불가능하다.

유적 전체에 걸려있는 왜곡 마법 탓에 장벽을 넘어서 이동하려고 하면 계속 원위치로 되돌아온 까닭.

더군다나 계속 꼼수를 시도하다 보니 정체불명의 석재로 된 미궁벽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열기가 뿜어나와 일찌감치 단념하고 자리를 떴다.

그래도 이전에 라디를 공중으로 던져올려 방향을 확인했던 것처럼 간간이 덩굴을 타고 올라 위치를 파악하는 건 가능했으니 망정이지...

‘그래도... 이 정도면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겠네...’

노래기는 한여름 뙤약볕에 방치된 차량처럼 외피가 뜨겁게 달아올라 탑승하기 곤란한 바, 노새를 부리듯 제각각 개미를 타고 느긋하게 미궁을 전전하고 있자니 니아가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은근슬쩍 내가 탄 사슴뿔 개미로 옮겨타는가 싶더니 다리 사이로 안착하며 등을 기댔다.

나는 살며시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더워요. 떨어지세요.”

“뭐 어때, 심심하단 말야. 벌써 몇 시간 동안은 주구장창 이동만 한 것 같은데...”

“미로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래도 이 정도면 엄청 빨리 지나온 편이에요. 원래 여기 바닥이 모래라서 발이 푹푹 빠지고 금방 지치거든요. 니아 님은 하이랭커니 하루종일 걷는 데도 익숙할 거 아녜요.”

“그건 그렇지마안~.”

니아가 귀여운 앙탈을 부리며 내 품에 꼬옥 안겨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고 있자니 등쪽에서 포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내 뒤로 나란히 걸터앉은 아리엘과 라디가 보였다.

“...왜?”

“으음... 그냥...”

“니아 언니가 붙어있는 걸 보니 저희도 뭔가 아쉬워서요. ...그보다 이거 진짜 편리하네요. 노래기뿐만 아니라 개미들도 덩달아 덩치가 커져서 저희가 올라타도 끄떡없으니...”

“그러게... 대신 이놈은 좀 빌빌대는 것 같긴 하지만.”

­크.. 크샤... 크샤아아앗...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비틀거리는 사슴뿔 개미가 보였다.

아무리 녀석이 다른 개미에 비해 덩치가 작은 만큼 완력이 약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야, 넌 명색이 개미가 우리 하나 못 업고 꼴이 그게 뭐냐? 너 원래 체중의 몇천 배까지 들 수 있는 거 아니었어?”

­크.. 크샥..!! 키샤아앗!!!

“뭐, 허릿심은 약하다고?”

­키킥!!

“내 알 바냐. 빨리 걷기나 해. 함정 해체조에 안 걸린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저기 앞에서 낙엽처럼 휘날리는 애들 보이지? 너도 쟤들처럼 되고 싶어?”

­.....

육탄 돌격으로 함정을 해체하는 다른 개미들을 가리키자 녀석이 몸서리를 치더니 묵묵히 앞으로 향했다. 그야 녀석이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개미가 무거운 물체를 들 수 있는 건 가슴과 목 근육이 발달했기 때문이니까...’

여섯 다리로 무게를 분산할 수는 있다고는 하나, 우리를 등에 태우고 걷는 건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을 요구하는 만큼 가뜩 힘에 부칠 터.

더군다나 덩치가 커지면 단순히 들 수 있는 힘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몸무게도 제곱으로 불어나게 된다. 예컨대 2mm이던 개미가 2m로 1000배 성장했다면 체중은 그의 세제곱만큼 늘어나 부담해야 할 하중도 곱절로 증가했다는 뜻.

녀석들은 육체가 그림자로 구성이 되어 있는 만큼 실제 생물과는 차이가 있긴 할 테지만...

나름 대견한 마음을 담아 개미의 등딱지를 두드려주려는 찰나­

­캭!!

개미가 김빠지는 소음을 내며 풀썩 모래 위로 엎어졌다.

녀석은 백기를 흔드는 시늉이라도 하듯이 더듬이를 까딱거리곤 스스스 어둠 속으로 되돌아갔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일행들과 마주 보고 있자니 라디가 난처하게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으음... 아무래도 너무 혹사했던 걸까요? 반나절 동안 더위 속에서 쉬지 않고 걸어온 데다가 지금은 네 명이 동시에 올라탔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럼 어디 다른 개미를...”

“으음... 그것도 괜찮긴 한데 이쯤에서 휴식을 취해주는 것도 좋지 않겠어?”

“휴식?”

“응... 아까부터 점점 주위도 어둑해지고 있잖아. 곧 밤이 될 것 같은데...”

“그러게... 근데 신기하네? 보통 이런 때라면 소년이 먼저 쉬자고 제안했을 텐데 말이야.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

이유야 당연히 있다.

밤이 되면 그들이 몰려올 테니까.

미라가 우리를 방해한다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사지를 찢어놓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나중에 실비가 모든 전말을 깨달았을 때 받을 충격도 커지게 될 거다.

미궁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를 짚으며 고민하자니 라디가 다정하게 내 손을 맞잡으며 고했다.

“괜찮을 거예요.”

“...라디야?”

“도란님이 걱정하시는 상황은 안 일어날 거예요. 저희 함께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요. 게다가 저 사람들도 스스로의 손으로 실.. 소중한 존재를 해칠 바에 도란님이 가차 없이 자신들을 처리해주길 바랄걸요.”

“그건 그렇지만...”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자니 라디가 총명한 눈동자로 날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니면... 그걸 써보는 건 어때요?”

“...그거라니?”

“이 유적에서 탈출할 때 빼내 온 구슬말이에요. 이전에 분명 호룰룰루...? 의 눈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태양과 왕권을 상징한다는... 어쩌면 그 보석을 보고 선뜻 다가오지 못할 수도...”

“...호룰룰루가 아니라 호루스.”

신격화된 파라오의 왕권이자 수호의 상징. 찬란한 태양을 나타내는 보석이며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문양이기도 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고, 이 유적의 최심부에서 구한 물건인 만큼 어쩌면 미라의 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수도 있겠지만...

“...알았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자. 밤새 덩굴로 통로를 틀어막고 농성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게.”

어차피 땔감을 구하기 힘든 이곳에서 장작 대용으로 홍옥을 사용할 예정이긴 했다. 해당 보석은 열기를 담아두었다가 방출하는 성질이 있어 평소 저택에서 목욕물을 데우는 용도로 쓰기도 했고, 이 미궁은 일교차가 커서 밤만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니까.

나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길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보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다 위급 상황 시 언제든 도주할 수 있도록 네 갈래 갈림길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이리저리 흩어져서 따라오던 개미들을 불러들였다.

이내 덩굴을 빽빽하게 소환해 통로를 틀어막고 텐트를 친 뒤, 배낭에서 식재료를 꺼내 취사 준비를 마치자 불현듯 수통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수통 마개가 열리더니 란이가 활기차게 튀어나와 내게 안겨들었다.

­됴란!!

“...뭐야, 이제 나와도 괜찮은 거야? 아까는 덥고 건조하다고 싫어했잖아.”

­됴란! 됴오란!!

“그래, 알았어. 밥할 건데 란이도 먹을 거지?”

­됴란? 됴란 됴란!!

“뭐, 마력 공급? 안 돼. 아리엘의 가슴은 아빠 거...”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딱콩!

아리엘이 얼굴을 붉히며 달려와 꿀밤을 날렸다.

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내 거 아니었어?”

“그, 그야 도란 거긴 하지만... 란이 앞에선 자중해야지...!!”

“그냥 마력 공급일 뿐인데?”

“도란은 마력도 쓸 줄 모르잖아!!”

아리엘이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뭐...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능청스럽게 웃으며 끌어안아 허리를 어루만지자 아리엘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한데...

은근슬쩍 니아가 다가오더니 내 뇌리에 속삭였다.

“저기 소년~ 나도 마력 공급해 줄 수 있는데... 혹시 관심 있어~?”

“니아 님도요? 하긴... 니아 님도 마나를 다룰 줄 아시니...”

“응응, 뭣하면 저기 텐트에서 바로...”

“안 돼요. 일단 저녁을 먹는 게 우선이니까요. 나중에라면 몰라도...”

“피~ 방금 전까지는 할 생각 만땅이었으면서.”

“그냥 장난치려고 꺼낸 말이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나는 덩굴로 둘러싸인 미로를 응시하고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요리하기 전에 잠시 해야할 게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

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