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 탐색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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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탐색 #6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왔다는 말이에요?”
“으응... 소년이 뽀뽀해주고 안아주고 이곳저곳 만져주기는 했지만...”
“키스도 안 했어요?”
“응...? 어... 혀는 안 넣었는데?”
“....줘도 못 먹네.”
“.....”
엇흠. 헛기침을 뱉으며 끼어들었다.
“으음... 그게 무슨 말일까 라디야. 줘도 못 먹는다니 그런...”
“그렇잖아요. 니아 님이 많이 아쉬워하니까 잠깐 놀다 오라고 둘이서 보낸 건데 막상 아무 일도 없었다니... 본방까지는 무리여도 입으로 애무 정도는 하다 오실 줄 알았는데.”
“입으로라니...! 아, 아니 라디 너도 발언이 요즘 너무 세졌어! 실비도 있고, 란이도 있는데...!”
나는 귀를 붉히며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어째 니아가 합류한 이후 주변 인물도 덩달아 수위가 올라간 기분이다.
아리엘과 라디의 배려 덕에 이제는 여러 연인과의 교류에도 익숙해졌다지만 가끔 꼿꼿한 유교 사상이 머리에 들락거리는 나로선 모두의 앞에서 니아와의 애정 행각을 과시하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보통은 질투할 법도 하지 않나?’
아니면 곤란해할 날 배려해 일부러 태연하게 군다던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개미를 조작해 후덥지근한 미로를 나아갔다.
니아와의 미궁 데이트가 있고, 예상외로 무난하게 흘러갔던 밤이 지나고 난 지금, 약도를 유심히 살피며 통로를 전전하고 있자니 묘하게 낯이 익은 지형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라디야, 혹시 여기가 바로 어제 유적 입구에서 봤던 건축물 근처야?”
“네, 맞아요. 용케도 알아보셨네요... 이제 곧 도달할 거예요.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다들 대비하고 계세요.”
“그래.”
개미의 등딱지를 두드려 속도를 늦추고 나아가자 뜨거운 기온에 땀이 스며나오다가도 곧바로 증발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미로 중에서도 유독 꼬인 구조가 반복되는 지형을 거닐다 보니 갯벌에 대나무를 꽂아 물고기를 사로잡는 죽방렴(???)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장소를 맴도는 것만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그렇게 십여 분가량을 더 나아갔을 즈음...
“...도란님, 이제 이 모퉁이만 돌면 돼요.”
“그래? 이번엔 좀 대단한 게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혹시 막 건물에 들어갔더니 보물로 가득한 거 아냐?”
“끝까지 긴장 풀지 마세요. 중요하면 중요한 장소일수록 치명적인 함정을 비치해놨을 거예요.”
“나도 알아. 그래도 함정 따위야 개미를 시켜서 해체하면 그만이니까. ...어떤 보물이 있을까나~.”
“소년! 난 먹을 거로!! 그 술이란 게 어떤 건지 너무 궁금해!!”
“네, 이번엔 니아 님도 꼭 같이 마셨으면 좋겠네요.”
유적의 입구에서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을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이다. 나와 라디에게 상당한 부를 안겨주었던 미궁산 와인과 꿀이 출토되었던 곳이 허름한 창고 건물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분명 가치 있는 물건이 잠들어 있을 테지.
설령 술이나 보물이 아니더라도 고대 문명이나 실비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을 법한 벽화나 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고.
기대에 부푼 가슴을 끌어안고 막 모퉁이를 돈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ㅡ
“...장관이네.”
아부심벨 대신전.
말 그대로, 지구에 존재하는 아부심벨 대신전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흡사한 모습.
작은 언덕이라 해도 무방할 초대형 암석을 통째로 깎아 건설한 구조물은 시시각각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내뿜었고, 건물 입구의 양옆으로는 미로의 드높은 장벽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좌상 두 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경외감을 품을 정도로 장중하고 압도적인 광경.
하지만 차차 흥분이 가라앉고, 통로를 배회하던 모래바람이 잦아들자 심상치 않은 흔적이 시야 언저리에 내비쳤다.
“도란... 혹시 저거 뼈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갑주를 입고 있는 걸로 봐서는 미라는 아니야. ...플루토 교단인가 봐.”
“플루토 교단이 이곳까지... 하지만 뭔가...”
“처참하네...”
모래에 파묻힌 시체들.
곤죽이 되고, 바스라지고, 육중한 건설 크레인에 짓눌린 맥주 박스처럼 무참하게 깨져나간 병구류와 유골.
마지막으로 거센 돌풍이 미로를 휩쓸고 나자 통로 곳곳에 즐비한 송장이 사면 위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서서히 웅크렸던 거체를 일으키는ㅡ
“고, 골렘...? 어, 엄청 큰데?”
“...몸을 구성하는 바위가 매끈한 걸로 봐서는 인조 골렘인가 봐요. 언뜻 봐도 도란님 신장의 세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데...”
“저 골렘이 바로 이 신전의 파수병인가... 뭐, 알기 쉬워서 좋네.”
이미 오버 스펙인 우리로선 머리 아프게 패턴을 파훼하거나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전투로 넘길 수만 있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훌쩍 개미의 등에서 하차하고는 흑도를 소환해 삐딱하게 짊어지고 전방으로 향하자 실비가 걱정스럽게 외쳤다.
“주인님...! 안 됩니다!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저렇게 거대한 적에 함부로 맞서는 건...!”
“괜찮으니까 그냥 보고 있어.”
“하지만...!”
“괜찮다니까.”
저딴 골렘 따위보다 영주성 지하에서 너랑 맞설 때가 더 무서웠거든.
나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발치에서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며 골렘에게 다가갔다.
눈앞의 석재 골렘이 아무리 거대하고 튼튼하다지만, 그를 웃도는 파괴력과 스피드를 지닌 내 앞에선 그저 내구성 테스트용 샌드백일 뿐.
골렘이 무감각한 수정 안구를 들어 쳐다보자 나는 순식간에 모랫바닥을 박차며 상공으로 드높게 뛰쳐오르고는ㅡ
“파(?)!!!!”
일순간 사방에서 덩굴을 솟구쳐 골렘에게 육박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광대한 진동이 골을 흔들었다. 육중한 소음이 고막을 뒤덮는다. 수십 가닥의 줄기가 일제히 골렘에게 착탄하자 뿌옇게 피어오른 모래 먼지 탓에 입안 가득 텁텁한 맛이 느껴진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압도적인 힘에 스스로 전율을 느끼며 탁탁 모래를 털고 일어나자 다분한 성취감이 몰려들었다.
충격파에 움푹 파인 구덩이를 등지고 시원스레 웃으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
“응! 단김에 해치웠...”
“조심해 도란─!!!!”
찰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콰아아아아아앙──────!!!!!!
“쿨럭...!”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강습했다.
골렘의 주먹이 대지를 강타하고 원대한 파동이 지상을 휩쓴 후, 날 모래 위로 잡아끄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고개를 들자 살짝 화난 듯하면서도 걱정스럽게 쳐다봐오는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내가 방심하지 말랬지.”
“니, 니아 님 이게 어떻게 된...”
“어떻게 됐긴. 내가 널 구한 거지.”
“그게 무슨.... 아.”
쿠구구구구궁....
충격의 여파로 뿌옇게 피어올랐던 모래 먼지가 가라앉자 상처 없이 멀쩡한 골렘의 거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상처 없이 멀쩡한’ 골렘의 거체가.
“뭐, 뭐...?! 어, 어떻게 그걸 맞고도 저렇게...!”
“그냥 덩굴이 생각보다 흐물럭~ 했던 거 아냐? 소년 잠잘 때 꼬추처럼.”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쓸 수 있는 기술 중에서 파괴력만큼은 단연코 제일인 기술인데...!! 그리고 잠잘 때 저 추행하지 마세요!”
“뭐, 어때~ 소년도 나 잠들었을 때 마음껏 만져. ...근데 좀 이상하긴 하네. 나도 방금 그 일격이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니아가 진지하게 눈매를 좁히고 골렘을 응시했다.
이내 그녀는 나직하게 설마 하고 중얼거리더니 날 내버려 두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니, 니아 님?! 어디 가세요!! 이렇게 된 거 함께 협공...!”
“잠깐 확인해보고 올 테니 소년은 거기 있어. 끼어들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절대 오지 말고.”
“그, 그게 무슨...”
“잠깐이면 돼.”
니아가 호흡을 고르고 자세를 잡자 순간 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쾅────!!!
“으헉...!”
소닉붐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충격파와 함께 골렘에게 작렬했다.
나는 잘게 조각난 골렘의 모습을 상상하고 벌떡 일어나 환호했지만
“아얏─!!”
“응...?”
“아, 아파! 우씨...!”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니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깨갱거리더니 사냥에 실패하고 호저에게 쫓긴 표범처럼 순식간에 내 옆으로 돌아왔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가 분하다는 듯이 읊조렸다.
“저거 절대로 그냥 골렘 아니야...! 전력으로 찼는데...”
“하, 하지만 니아 님마저 안 통한다면 어떻게...”
“완력으로 안 된다면 마법으로 부딪혀 봐야지. ...아리엘!!”
“네!!”
니아가 외치자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리엘이 영창을 준비했다.
이윽고 눈부시게 번뜩거리는 빛의 창이 상공에서 형체를 갖추고 골렘에게 쇄도했지만
파창창!!!
“뭐, 뭣...!”
골렘의 바위 표면에 닿기가 무섭게 내부 인장력이 불균형해진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아리엘이 크게 낙심하며 읊조렸다.
“이럴 수가... 매일 연습했던 새로운 마법인데... 흠집조차 없어...”
“마법마저 안 통하다니... 잠깐...! 골렘의 머리 위로 뭔가가 떠올랐는데...?”
“저건... 마법진...? 상형문자로 쓰여 있어요!”
“실비! 실비야! 읽을 수 있겠어?!”
“.....”
다급하게 채근하자 실비는 골렘의 거체 위로 나타난 문양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면역.”
“응...? 지금 뭐라고...”
“그게... 그러니까...
물리 완전 면역.
마법 완전 면역.
...라고 쓰여 있네요.”
““뭐...?””
잠시 정적이 내려앉고, 모두가 벙찐 채 실비를 돌아보았다.
나는 떨리는 입을 열어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로...?”
“예... 그렇습니다.”
“씨발...!! 진짜 무슨 그딴 게 다 있어!!!”
물리 공격과 마법 둘 다 무용지물이라면 대체 어떻게 쓰러뜨리란 말인가.
머리를 싸매며 절망하자 니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물리 면역에 마법 면역이라... 납득이 가네...”
“네...? 납득? 납드윽?! 아니, 상식적으로 그런 게 널렸으면 인간이 마물한테 고전할 필요가...!”
“이곳은 고대 유적이잖아. 이 정도 난관쯤은 예상했어야지.”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니아의 말대로 원래 고대 유적이란 현대의 기술로도 재현 불가능한 오파츠 투성이의 마굴이다. 지금까지는 쉽게 미로를 돌파해 온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건 내 사기적인 소환수의 능력과 사전 지식 덕뿐이니까.
이전에 우리가 여왕의 방까지 도달했을 때도 원래라면 히드라와 키메라, 과거에는 더 강력했을 언데드 무리와 전투를 벌여야만 했을 테고.
‘제길...’
나는 저만치서 서서히 다가오는 골렘을 올려다보며 고뇌했다. 눈앞의 신전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골렘을 쓰러뜨려야만 할 터, 무턱대고 강행 돌파한다면 어찌어찌 내부로 들어서는 것까진 가능할지 몰라도 이후에 빠져나올 때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보물이나 실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위험성 따위를 저울질하고 있자니 라디가 입을 열었다.
“으음... 아니면 혹시 저기에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요?”
“...어디 말이야?”
“골렘의 전신에 새겨진 상형문자 말이에요. 아무런 의미 없이 새겨넣었을 것 같지는 않고 작동을 정지하는 방법이나 힌트 같은 게 적혀져 있을 수도...”
“...좋은 생각이야! 실비야! 저거 읽을 수 있겠어?!”
“.....”
실비가 고개를 들어 골렘을 응시했다.
녀석은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짚고 커다란 몸체 곳곳에 적힌 히에로글리프를 유심히 살피는가 싶더니...
“신... 지다... 진... 짊어지다...?”
“....”
“아니... 짊어지다가 아니라... 진... 진... 저버렸다...?”
“실비야...! 골렘이 오고 있어! 조금만 더 서둘러서...!”
“그, 그게... 신은 우리를 저버렸다!! 왼쪽 어깨에 쓰인 문자열은 그런 뜻입니다!!”
신은 우리를 저버렸다.
“잘했어!! 반대편 어깨에 적힌 문양도 읽을 수 있겠어?!!”
“네...! 그러니까... 고렘... 골렘...은.. 우리의 친구...?”
“골렘은 우리의 친구?”
“네!! 골렘은 우리의 친구!!”
골렘은 우리의 친구.
“.....”
알 것 같다.
이 골렘의 파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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