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화 〉 탐색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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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탐색 #8
“어어...? 이놈 왜 진짜로 멈췄냐...?”
툭툭!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
라디의 말대로 문구를 외치자 정말로 골렘이 거동을 멈췄다.
그뿐만 아니라 요동치던 장벽 또한 잠잠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잠에 빠진 미궁을 어안이 벙벙한 눈길로 돌아보고 있자니 라디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도란님은...”
“라디야!”
“네, 네?! 무슨 일...”
“이거 이제 멈췄잖아. 그러니까 다시 움직이기 전에 확실하게 처리해둘까 하는데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으음... 앞으로 다시 기동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 왜... 방금 전 일을 보고 제가 확신한 게 있...”
쿠구구궁!!
“뭐, 뭐야?!”
찰나, 골렘 쪽에서 뿌연 모래 먼지와 함께 커다란 소음이 울려퍼졌다.
설마 하는 심정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뭐, 뭐야, 쟤 왜 저 혼자서 부서져...? 쟤 물리 공격에 면역 아니었어?”
해변가의 모래성처럼 덧없이 무너져내리는 고대 골렘을 멍하게 쳐다보자 라디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까 도란님의 명령 때문이 아닐까요. 골렘의 생명 활동이 정지하다 보니 몸체를 구성하던 마법도 덩달아 기능을 정지해서... 그 왜, 미궁도 이제 잠잠하잖아요.”
“아니, 그까짓 게 뭐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고전할 필요도 없었잖아. ...그럼 이 골렘은 이제 완전히 못 쓰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다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형체가 무너져내린 뒤니까 누군가가 처음부터 다시 조형하는 게 아닌 이상... 오히려 지금까지 멀쩡히 작동해온 게 신기할 정도예요.”
“그래? 진짜 고대 마법이 대단하긴 하나 보네... 저런 돌덩어리를 그렇게 강력한 존재로 바꿔놓을 정도니...”
“네, 그리고...”
라디가 성큼성큼 골렘에게 다가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제지했지만 녀석은 가뿐히 웃어넘기고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멈춰버린 장벽을 둘러보던 니아를 불러들였다.
라디가 골렘의 심장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니아 님, 혹시 저랑 같이 여길 파헤쳐주실 수 있으세요? 도중에 무너뜨리지 않도록 신중하게요.”
“아, 혹시 핵 때문에?”
“네, 맞아요. 이왕이면 다른 분들도 도와주셨으면 하는데...”
“응! 여기 있는 바위를 들어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저도 돕겠습니다.”
“....”
나는 적당히 눈치를 보고 발치에서 개미를 여럿 소환해 다가갔다.
“...비켜봐. 얘네한테 시키면 되니까.”
“아, 고마워요. 하지만 이건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수작업으로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큰일이거든요.”
“...그 핵이란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맞아요. 골렘의 핵이 어떤 건지는 알고 계시죠?”
“....”
그야 대충은...
이전에 2계층에서 플래시 골렘을 사냥할 때 설명을 들었으니까.
골렘을 구성하는 핵심 부위. 수정 골렘이나 전설 속의 오리하르콘 골렘 등 몸체의 재질 자체가 상당한 가치를 띄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골렘에서 제일 값비싸고 귀중한 소재이자, 사냥 의의 그 자체.
더군다나 종종 특수한 성질을 지니다 보니 7계층 설원에서 생존하던 당시 플래시 골렘의 핵을 섬광탄 대용으로 사용해 위기를 모면했던 경험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자 라디가 말을 이었다.
“이건 고대 골렘의 핵인 만큼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거예요. 이렇게 거대한 병기를 움직일 정도의 마력과 술식이 담긴 물건이니... 게다가 만약 마법과 물리 공격을 무효화 하는 비밀이 담겨 있기라도 하면...”
“.....”
꿀꺽.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횡재라는 건가.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발굴 작업에 동참하고는 중요한 발견을 앞둔 고고학자의 심정으로 골렘 무더기를 파헤치다 보니 구슬 같은 비지땀이 송골송골 관자놀이를 적시고 흘러내린다.
그렇게 일련의 작업을 십여 분 정도 반복했을 무렵, 불현듯 아리엘이 자그마한 탄성을 흘리더니 함몰된 골렘의 가슴팍에서 사람 머리통만 한 수정을 들어올렸다.
주위에서 연이은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이게 바로...”
“고대 골렘의 핵...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크네요...”
“엄청 크다... 지금까지 많은 골렘을 쓰러뜨려 봤지만 이것처럼 커다랗고 순도 높은 마석은 처음이야... 내부에 저장된 마력은 거의 다 소진된 것 같지만 기본 마나 용적도 장난 아닌 것 같고...”
“저... 아리엘 님.. 외람되지만 혹시 이 물건은 가격이 얼마인지 알 수 있습니까...?”
“응? 이거? 아마 빈 마석만 해도 수백 골드는 할걸?”
“네, 네?! 수, 수백 골드 말입니까...!? 수, 수백 골드면... 보리 빵이 대체 몇 개...”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마석 자체만을 두고 봤을 때 얘기야. 이건 고대 유적에서 나온 물건이니 가격이 몇 배로 불어나는 데다가 골렘의 작동 회로가 새겨진 유물이잖아! 게다가 앞서 말한 대로 무효화의 마법 술식이 적혀 있기라도 하면...”
“성 하나쯤은 충분히 사고도 남겠죠.”
“그, 그럴 수가... 아무리 고대 유물이라고 해도 고작 이런 물건 하나로...”
“.....”
나는 호들갑을 떠는 여성진에게서 시선을 떼고 멍하니 골렘의 핵을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빙하처럼 은은한 푸른 빛을 발하는 수정. 수려하게 테두리에 둘러진 금테. 적색의 사막과 푸른 하늘이 각진 표면으로 비쳐 들어와 오묘한 색채를 머금고, 그 중심 안쪽에는...
반투명한 녹색으로 빛나는 마법 회로가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마법진을 목도하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실비의 목덜미에 새겨진 낙인을 봤을 때와 비슷한 감각. 어쩌면 내가 이 술식에 담긴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도란님!”
“어, 어... 왜? 혹시 나 불렀어?”
“네, 아무리 유물이 좋다고 해도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어떡해요. 몇 번이나 불렀는데. ...그래서 도란님은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이 수정의 처우를 논의 중이었어요.”
“음...”
고개를 들자 기대에 찬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일행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킵해둘까?”
“킵... 말이에요?”
“그래, 솔직히 우린 당장 금전이 급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나중에 돈이 필요한 순간이 올 때까지 가지고 있는 거지. 어차피 이걸 팔려면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그럼 이 유적의 존재도 알려야 할 테니까. 그리고...”
부드럽게 아리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관심 있지?”
“응...? 뭐, 뭘...”
“골렘의 핵 말이야. 너도 명색이 마법사잖아. 후작 가문이라고 해도 고대 유물을 탐구해볼 기회는 흔치 않을 테고.”
게다가 만약 무효화 마법을 익혀서 아리엘의 보호막에 응용하기라도 하는 날엔 그만큼 든든할 수가 없을 거다.
놀라움으로 천천히 벌어지는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 보며 머리칼을 쓸어주자 주변에도 따스한 미소가 번져나가더니...
“응! 난 소년의 말에 찬성!! 아리엘이라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돈이라면 나도 저축해놓은 게 잔뜩 있으니까!”
“그러게요... 도란님의 말씀대로 여윳돈은 충분하고, 갑자기 그런 거액이 생긴다고 한들 저희만으로는 관리하기가 벅차니까요... 또 이 수정에 담긴 술식을 조금이라도 해석할 수만 있다면 전력에 큰 보탬이 될 테고요.”
“...저도 주인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아리엘 님의 재능이라면 이 유물을 가지고 원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 정말로...? 다들 어떻게...”
아리엘이 입을 틀어막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감정에 벅차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라디와 니아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상냥히 포옹해주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아리엘은 손을 맞잡아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내 쪽을 돌아보며 난연하게 미소짓더니
──!
진하게 입술을 맞추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길었던 입맞춤이 끝나고 천천히 입술을 떼자 살풋 상기된 아리엘의 고운 얼굴이 들여다보였다.
그녀가 와락 내 품에 안겨들며 속삭였다.
“...너무 좋아 도란.”
“나도...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말할 걸 그랬네. 어디, 지금 바로 살펴볼래?”
“아니... 지금은 그런 것보다... 도란한테 보답을 하고 싶어...”
“으응? 자, 잠깐...?”
어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녀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자 내 팔뚝을 부여잡은 손바닥의 뜨거운 체온, 달뜬 호흡과 안절부절못하는 하체, 무언가를 은밀히 암시하면서도 갈구하는 듯한 시선이 보였다.
아뿔싸, 주변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떼어놓으려는 찰나
“어휴... 정말로 조상 중에 악마가 섞인 거 아니에요? 인큐버스라던가... 어쩜 이렇게 눈만 감았다 뜨면 자연스레...”
“크흠...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뭐... 하긴, 이런 상황이면 누구나 감동할 법도 하니까요. 그래도 찐득하게 사랑을 나누는 건 이따가 란이가 없는 곳에서 둘이 하시고...”
“그건 안 돼!! 이번엔 내가 먼저야!! 양보 못 해!”
“...그럼 셋이서 하시고, 지금은 일단...”
라디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신전을 응시했다.
머쓱하게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수정을 모포에 고이 감싸 배낭 깊숙이 넣은 뒤, 발길을 옮기자 멀리서 보이던 구조물의 윤곽이 점차 뚜렷해졌다.
미궁 벽이 움직이느라 이젠 개활지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넓게 확장된 통로를 지나 신전 앞에 도달하자 입구 양옆으로 장엄하게 늘어선 두 좌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눈에 올려다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웅장한 규모는 경외심을 넘어서 거룩함까지 느껴질 정도.
한데...
“...두 조각상 모두 얼굴이 닳아있네요. 모래바람 때문에 풍화됐나 봐요.”
“그러게... 굉장히 중요한 단서였는데...”
신들의 식물로 여겨지는 연꽃이 좌상의 발치를 수놓고 있다는 점. 우라에우스라 불리는 코브라와 독수리가 파라오 특유의 왕관 위를 수호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왕과 왕비가 틀림없는데...
공교롭게도 오랜 세월로 침식된 탓에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만약 여기서 실비의 얼굴이 묘사되어 있었더라면 녀석이 여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거의 확정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을 달래며 막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차
“으음... 저거 도란님 아니에요?”
“뭐? 나 말이야?”
“네, 왼쪽 조각상 말이에요. 묘하게 닮지 않았어요?”
“아니... 얼굴도 안 보이는데 무슨..”
회의적으로 좌상을 올려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갔지.
하지만 라디뿐만 아니라 아리엘과 니아도 라디의 말에 동의했다.
“어? 듣고 보니...”
“묘하게 분위기가 닮은 것 같기도...”
“그럴 리가. 나랑은 완전히 딴 사람이잖아.”
“아냐, 진짜 닮았어. 그 왜 살짝 삐딱하게 앉아있는 자세라던가, 전체적인 근육의 모양새라던가.”
“...알았어.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럼 뭐라도 나오겠지.”
왕과 왕비의 조각상이나 그림이 딸랑 하나만 존재할 리도 없을 테니.
한데...
“...실비야?”
“.....”
“실비야, 거기서 뭐 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비가 황급히 신전 내부로 들어서는 우리를 뒤따라왔다.
녀석의 짙은 모래색 눈동자는 조금 전까지 여왕에게 안겨 있던 토끼 모양의 조각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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