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 과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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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과거 #1
본 회차는 글자 크기 ‘가’ 기준 최소 사이즈, 줄간격 130%, 고급 설정의 뷰어 방식 ‘스크롤 방식’에 최적화된 회차입니다.
다소 번거로우시더라도 최적의 감상을 위해 위와 같이 설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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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야, 배낭에서 마석등 좀 꺼내줄 수 있겠어?”
“네, 여기 있어요.”
“고마워.”
끼릭.. 끼릭...
파앗!!
“....”
“...장관이네.”
나는 통로를 따라 쭉 늘어선 여덟 거상을 랜턴으로 비추며 경탄했다. 일련의 붉은 석재로 지어진 석상은 하나하나가 까마득하게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했고, 건물 최상단까지 이어져 기둥 대신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어째 외관부터 아부심벨 대신전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내부 구조도 똑 닮아있는 모습.
입구 안쪽으로 들이찬 모래 위를 거닐며 수천 년간 깊은 잠에 빠져있었을 고대 신전에 마석등의 백색광을 드리우고 있자니 나는 문뜩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멎은 걸 눈치챘다.
아리송하게 등 뒤를 돌아보자 어째선지 입구 부근에서 잔뜩 얼어붙은 일행이 보였다.
“...뭐야, 왜 다들 거기서 그러고 있어?”
“저... 그게...”
“....?”
“솔직히 좀 무서워서...”
“...무섭다고?”
끔찍한 독충이나 언데드가 튀어나와도 코웃음을 치며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고소공포증과 세금을 제외하고는 세상 두려울 것 없어 보이던 그 라디가?
순간 수인들만 감지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걸까 싶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아리엘도 많이 위축된 기색이다.
그나마 니아만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신전 내부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
그녀가 둥그스름한 귀를 쫑긋거리며 거상을 둘러보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상하네...”
“...뭐가요?”
“아니... 이 석상들 말야. 왜 전부 얼굴이 똑같지? 옷은 조금씩 다른 걸로 봐서 조각가가 실수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모두 한결같이 꼬부랑 막대기 같은 걸 들고 있고...”
“아하...”
그야 처음 보면 이상하게 느낄 만도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건 오시리스라고 불리는 죽음의 신이에요. 제가 있던 세계의 옛 문명에서는 파라오... 그러니까 왕이 죽으면 명계에서 역대 왕들과 함께 오시리스란 존재로 합쳐진다고 여겼어요. 그러니까 이 석상은 전부 한 신인 동시에 다른 인물인 셈이죠.”
내가 지닌 붉은 구슬이 호루스의 눈()으로 불리는 물건임과 동시에 현 파라오를 상징하는 물품이다.
반면 니아의 말대로 석상들이 가슴 앞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꼬부랑 막대기’는 오시리스를 상징하는 갈고리와 도리깨고.
즉, 요약하자면...
호루스 신 = 파라오
오시리스 신 = 사망한 현 파라오의 아버지 + 별세한 역대 파라오인 셈이다.
이 세계에는 안디라 님이 있으니 실제 종교적 효력이 있는 성상은 아닐 테지만, 나름 지구에서 명계의 신으로 추앙받던 존재들이니 라디 일행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만일 내부가 모래에 침식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을지 상상하며 거대한 석상을 둘러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한데...
“왜요 니아 님?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세요?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고...”
“으음... 그야 그렇잖아. 소년이 살았던 세계는 정말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곳이라며. 근데 이곳에서 그쪽 세계의 유적이 발견된다는 건... 이 유적을 만든 사람이 소년이라는 얘기 아냐?”
“....네?”
“네?는 무슨 시치미 떼긴... 똑똑한 소년이 내가 깨달은 걸 모를 리 없잖아. 소년은 예전에 이 세계에 들른 적이 있다며. 그럼 그때 소년이 이 유적을 건설한 게 아닐까? 다른 세계에서의 지식을 살려서.”
“.....”
제길...
나는 입가를 짚으며 니아의 시선을 피했다.
애써 외면하던 가능성을 정확히 짚어낸 그녀의 혜안에 진땀을 흘리며.
아니, 왜 하필 이럴 땐 예리하게 정곡을 찔러서...
‘...이전부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었지.’
내가 이 유적을 만든 장본인일 가능성은 실비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 세계의 문명과 비슷한 정도를 넘어선 유적, 내게 익숙한 형식의 함정과 기믹, 이상하리만치 날 환대하는 히드라와 키메라, 내게 단도를 전해주었던 빈 왕의 묘실 등.
이 유적의 주인인 그림자 여왕이 날 알아보고 반기는 데다가, 내 아버지가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덕에 내가 이집트 역사에 해박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포함해서.
그렇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이전부터 두루뭉술하게 흩어져 있던 퍼즐이 머릿속에서 확고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걸 실감하고 있자니 라디가 천천히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이상하긴 했었죠... 언데드, 그러니까 미라의 제작 과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거나, 미지의 유적에 관한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다거나... 이곳에 처음 들렀을 때 빛을 이용한 퍼즐이나 홍옥을 이용해 관문을 돌파한 것도 도란님이었고...”
“...그런 일이 있었어?”
“네, 언니. 게다가 여왕의 안치실 옆에 왕의 묘실로 추정되는 방이 있었는데 그곳은 도란님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거기에서 단도를 발견하신 거고요. 하지만 그 공간은 왕의 시신을 안치한 곳 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한 데다가 부장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빈 석관만 있었고...”
“잠깐...! 묘실은 있는데 시체는 없고, 부장품조차 없다는 건... 애초에 왕은 죽지 않았다는 거 아냐...? 그렇다면 혹시 그 왕이...”
“.....”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겸연쩍게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뭐... 그런가 보네...”
왕의 묘실 내부에는 귀퉁이가 깨져나간 빈 석관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쿠푸 왕의 미스터리를 그대로 빼다 박은 듯.
만약 왕이 서거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으로 여왕의 시신 옆에 묘실을 만든 거라면 구태여 크게 제작할 필요도, 부장품을 묻을 필요도 없었을 테고, 시체가 없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니, 그래도 난 그냥 건설 조력자A 정도일 줄 알았지...’
이렇게 거대하고 번영한 유적을 이륙한 존재가 나라고 한들 어찌 믿겠는가? 더군다나 난 얼마 전까지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이 세계에서 활동한 전적이 있다는 것도 고작 며칠 전에야 알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유적에 입장하고 망자들의 목소리를 따라 미로를 돌파할 때 놈들이 나를 왕이라 불렀지.
당장 골렘만 하더라도 내 명령을 받들어 행동을 멈췄고.
한데...
“저... 주인님의 이전 세계...? 유적을 건설...? 게다가 왕..이라니... 혹시 어떻게 된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나는 난처하게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고는 실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으음... 일단 실비한테는 조금 나중에 설명해 줄게. 조금 긴 이야기라서... 지금은 일단 그런 게 있다고만 알아둬.”
“아... 알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나중에 꼭 다 설명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이 유적의 끝에 도달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실비도 모든 전말을 깨닫게 될 테니까.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도래하자 아리엘이 손뼉을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과거의 도란은 단순히 이 유적을 건설한 것뿐만 아니라 왕직도 겸했다는 거네?”
“뭐... 그렇게 되겠지...?”
“으음... 도란님이 고대 문명의 왕족이었다니... 조금 복잡한 심경이네요. 그리고 그렇다면 여왕에 얽힌 비밀 외에도 도란님이 왜 이 유적을 건설했는지도 알아내야겠어요... 어쩌면 둘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지도...”
“아마... 그럴 확률이 높겠지...”
“...잠깐, 그렇다면 지나쳐오면서 봤던 미라는 여왕뿐만 아니라 도란의 백성이기도 했다는 얘기네...?”
“...그러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묘한데...
아니 근데 잠깐만.
“...니아 님은 거기서 뭐 하세요?”
어째 한 명이 비는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니 니아는 오시리스의 석상 앞에서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생뚱맞은 기행에 다 같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니아는 내 쪽을 돌아보며 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응? 그야 이 석상은 왕의 조상이라며. 그리고 소년이 왕이었으니까 이 중에 시아버님이 계시다는 말 아냐? 그러니까 며느리로서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지. 너희도 빨리 절 안 하고 뭐 해?”
“으음...?”
“그, 그러고 보니 니아 언니 말이 맞는 것 같기도...”
라디와 아리엘이 허를 찔렀다는 듯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내 그녀들이 쭈뼛거리며 석상 앞으로 다가가 정말로 인사를 올리려 하기에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막아세웠다.
“...너희들까지 뭐해. 저걸 진짜로 믿냐.”
“응...? 하지만 아까 도란이 제 입으로 말했잖아. 이 석상들은 왕의 아버지를 본뜬 거라고...”
“그렇긴 하지만... 아니, 애초에 울 아버지 아직 안 죽었거든? 게다가 떡대도 무슨 멧돼지마냥 득글득글한 근육 마초라 이렇게 곱상한 석상 중에 있으면 바로 티가 날...”
어...?
기분 탓인지 거상 중에 유독 하나 우람한 게 있는 것 같은데...
팍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니 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며 말했다.
“그래서, 이 건물은 무슨 용도로 건설한 거야? 그냥 신전?”
“음...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요? 뭔가를 기리기 위해서였다거나... 일단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함께 이 공간부터 자세히 살펴봐요.”
골렘을 두어서까지 지키게 한 장소니 뭔가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분명 이 여덟 거상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자 거대한 오시리스의 석상이 시야에 한가득 올려다보였다.
원대한 규모에 살짝 압도되어 마른 숨을 들이쉬자 라디가 나직하게 침음하며 중얼거렸다.
“으... 진짜 음산하네요... 외계 문명, 그중에서도 명계의 신이라고 생각하니... 그러니까 이분들 중에 아버님이 계시다는 거죠?”
“내 아빠 멋대로 신으로 만들지 마.”
“으음... 어떻게 인사를 올려야 하지? 제사라도 지내면 좋을 텐데... 혹시 아버님은 고기 드셔?”
“내 아빠 멋대로 고인으로 만들지 마.”
“...안녕하세요 아버님. 도란의 새 아내인 니아 아르제라고 하옵니다. 곧 서방님과 아이를 낳을 텐데 혹시 손주나 손자 중 어느 쪽을 먼저 보고 싶으...”
“절 멋대로 임신시키지... 아니, 이건 좀 이상한데... 아무튼, 다들 집중 좀 해. 이게 내 아버지라는 보장도 없고 그냥 상징으로 세워놓은 걸 수도 있잖아. 예를 들면 저 갈고리랑 도리깨라던가... 오시리스의 상징이지만 우리 아버지가 저런 걸 쓰는 건 본 적이 없거든.”
“아, 맞아. 저건 대체 뭐야? 석상마다 하나씩 들고 있어서 의아했는데...”
아리엘이 거상의 가슴 앞에서 교차한 두 도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좀전에 니아가 ‘꼬부랑 막대기’라고 지칭했던 그 물건.
나는 예전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음... 우선 저 도리깨는 풍요와 풍작을 형상화한 거야. 오시리스는 명계의 신이지만, 그 배경에는 죽음에서 부활했던 스토리가 있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오시리스에겐 그가 했던 것처럼 불모의 땅에서도 풍요롭게 작물을 키워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어.”
“신기하네... 그럼 저 갈고리는?”
“으음... 이쪽은 좀 더 명계의 신과 가까운데... 저건 미라를 제작할 때 써. 저 끝을 코와 항문으로 집어넣어 부패하기 쉬운 뇌와 내장을 적출하는 거지. 즉,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죽음의 도구라는 거야.”
“그렇구나... 뭔가 기묘하네... 지금껏 계속 신학을 공부해왔는데 다른 세계의 신에 관련된 내용을 들으니 엄청 흥미로워!”
“그래? 재밌으면 나중에 더 얘기해 줄게. 너무 깊게 들어가면 복잡해지니까. ...라디도 궁금한 거 있어?”
나는 은근히 미소지으며 라디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진중한 표정으로 턱을 짚고 숙고하더니...
“풍요와 풍작... 도리깨... 죽음을 상징... 갈고리...”
“.....”
“티바르 님과 안디라 님...?”
“어...?”
순간, 낯익은 성함이 라디의 입에서 흘러나와 당황하자 녀석이 날 돌아보며 말했다.
“...맞죠? 이 세계에서 풍요와 풍작을 기원하는 신, 그러니까 농업 쪽 최상위 신은 티바르 님이시고... 죽음에 관련된 분야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안디라 님... 혹시 아버님과 두 분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래서 두 분이 도란님을 찾아오신 거고...”
“아, 아니 잠깐...!”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혹시 세 분이서 친구였다거나... 그 왜, 티바르 님을 목장에서 뵈었을 땐 누가 봐도 도란한테 호의적이었잖아.”
“으음... 그러고 보니...”
“아, 아니 갑자기 그건 너무 비약이지...!! 나로도 모자라 내 아버지까지 이쪽 세계와 연관이 있다는 건...!”
“...오히려 도란님이 두 번이나 이쪽 세계에 왔었고, 이런 유적을 건설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끼쳤는데 아버님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게 어불성설이지 않나요...?”
“그, 그건 그렇지만...”
딱밤만으로 멧돼지를 기절시키거나 곰 일가족과 레슬링을 겨뤄서 이기는 둥 평범과는 오백 광년 정도 떨어진 사람이긴 하지만...
...아니, 그보다.
“...니아 님은 거기서 또 뭐해요.”
시선을 돌리니 니아가 내게 반절을 올리고 있었다.
니아는 내 물음에 살짝 고개를 들고 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갸웃거리더니
“응? 그야 소년의 아버지는 명계의 신이라며. 그럼 소년도 절반은 신이라는 얘기 아냐? 그러니까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지! 너희도 빨리 절 안 하고 뭐 해.”
““.....””
라디와 아리엘이 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반절을 올릴 기세기에 한숨을 내쉬며 막아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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