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35화 (335/375)

〈 335화 〉 과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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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과거 #3

하릴없이 벽화를 뜯어보던 중, 진전이 없던 해독 작업이 변화의 국면을 맞이한 건 실비의 작은 탄성으로부터였다.

“어...! 잠깐만요! 방금 뭔가...”

“...왜, 실비야? 무슨 일 있어?”

“으음... 방금 벽화에서 뭔가 보였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봅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나는 잠시 라디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정하게 실비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실비는 뭘 봤는데?”

“그게... 벽화에서 검은 글씨 같은 걸... 근데 정말 찰나에 사라져서...”

“검은 글씨라... 니아 님은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까부터 계속 살펴보고 계셨잖아요.”

“우음...? 난 못 봤는데... 어디쯤이였어 실비야?”

“음... 분명 여기였습니다.”

“.....”

실비가 부조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천사의 날개가 구부러지고 눈알이 돌출된 부위.

도무지 이 세상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상망측한 그림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데...

혹시나 싶어 손을 뻗어 만져봤지만, 울퉁불퉁한 굴곡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 부조니까 벽이 파여 있는 건 당연...

아니 잠깐.

“...라디야.”

“네, 말씀하세요.”

“우리가 처음 말톤이랑 같이 이 유적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해?”

“네?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지금...”

“한번 말해봐.”

“.....”

라디가 뺨을 매만지며 과거를 반추하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도란님이 입구를 발견했었죠. 처음은 동굴 안의 좁은 바위틈이었고... 협소한 통로를 지나쳐 유적에 도달하고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함정을 가까스로 모면한 뒤로는 도란님의 감각에 의지해 미로를 돌파...”

“아니, 중간에 하나 빼먹었잖아. 유적에 입장하기 전에 뭔가 있지 않았어?”

“유적에 입장하기 전에? 전... 전이라... 아...! 그림자!!”

“그래.”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벽화를 돌아보았다.

당시 우리는 유적 입성을 목전에 두고 커다란 바위에 가로막혔다. 바위는 상형문자가 빼곡하게 들이차 있었고, 몹시 단단해 말톤의 메이스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돌파할지 막막했지만, 랜턴을 특정한 위치에서 비춘 결과 양각된 문자에서 기울어진 그림자로 검은 고양이 형상이 만들어지고 바위가 저절로 움직였다.

더군다나...

‘지구의 아부심벨 신전은 빛을 이용한 건축물로도 유명했지...’

일 년에 두 번. 아부심벨 신전을 건설한 람세스 2세의 즉위일인 2월 21일과 생일인 10월 21일에 맞춰 건물 가장 안쪽 성소에 태양빛이 드리운다.

즉, 원래라면 이곳은 빛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장소라는 뜻.

일행에게 손짓해 모든 불을 소등하게 시킨 뒤 홀로 조용히 랜턴을 들어올리자ㅡ

“찾았다.”

대전쟁.

실비가 가리켰던 천사의 날개보다 조금 더 아래 부근. 툭 튀어나온 부조의 일부분이 절묘하게 음영을 일궈내며 문자열을 형성했다.

유적의 입구에서 이미 비슷한 장애물을 겪은 데다가, 원조 아부심벨 신전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 내가 아니었다면 열에 아홉을 그냥 지나쳤을 기믹.

그렇다면 다음 단어는...

“도란...! 이쪽에도 방금 뭔가 보였어!”

“어디 보자...”

학살.

“좋아...”

이제 슬슬 윤곽이 잡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세 번째 문자열은...

십자가로 악령을 퇴치하는 신부처럼 마석등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그림자를 찾던 중, 라디가 눈썹을 움찔하며 외쳤다.

“바닥!! 방금 도란님이 딛고 서신 곳에...!”

“바닥...? 이야... 이거 절묘하게 숨겨놨네.”

신.

“신... 전쟁... 학살이라... 이 정도면 대충 무슨 일이 있었을지 예상이 가네...”

하지만 아직 이 단서들만으로 정확히 과거를 밝혀내기엔 무리가 있다.

분명 이 모든 실마리를 하나로 묶어줄 단어가 하나 더 있을 텐데...

어디 있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에 불을 켜고 글자를 찾았다. 두 팔을 걷고 부조를 매만지다 급기야 랜턴을 라디에게 맡기고 의심이 가는 벽이란 벽은 전부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둘러보아도 네 번째 단어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점차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다.

보다 못한 아리엘이 나서서 말렸다.

“도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나 찾았는데 안 나오는 거면 아마 세 번째가 마지막인 게...”

“...아니, 반드시 네 번째가 있을 거야.”

고대 이집트에서 숫자 넷은 카노푸스의 단지가 의인화된 호루스의 네 아들, 지구의 4분, 그리고 중요한 네 끝을 가리킨다.

골렘의 수수께끼를 파훼했던 키워드도 네 개였을뿐더러 무엇보다...

‘...원래 이 장소는 벽화 대신 네 개의 신상이 있는 곳이니까.’

원래 아부심벨 신전의 최심부, 가장 깊은 성소엔 천사의 벽화가 아니라 프타하만, 아몬­라, 람세스 2세, 라 호라크티의 석상이 차례로 모셔져 있다.

그리고 이 중 제일 왼쪽, 오시리스와는 또 다른 죽음의 신으로 알려진 프타하만의 경우 일 년에 두 번 태양빛이 성소까지 들어올 때도 유일하게 어둠 속에 잠겨 있...

잠깐.

어둠...?

“...라디야, 불 꺼.”

“네...?”

“불 꺼봐. 빨리.”

“...알겠어요.”

­파스슥...

라디가 마석등을 조작하자 희미한 잔불과 함께 성소가 깊은 어둠에 잠겨들었다.

무저갱의 심연처럼 서늘하고 눅눅한 바람이 불어와 희미한 광채마저 앗아간 뒤로 조심스러운 숨소리만이 들려오던 중, 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년, 정말로 뭐가 있긴 한 거야? 이렇게 어두워선 아무것도 안 보...”

“쉿...”

“.....”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나는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우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띄지는 않는지 살폈다.

슬슬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오던 차­

“어...? 저기 뭔가...!”

“벽이... 빛나고 있어...?”

“.....”

어둠 속에서 단어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기울어 문자를 형성했던 위치. 마치 반딧불이가 부드럽게 벽을 통과해 빠져나오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나왔다.

서서히 명확한 형태를 갖춰나가는 글자들.

“...라디야, 종이랑 펜 좀.”

“네! ...여깄어요!!”

“..고마워.”

나는 서둘러 발광하는 글자를 종이에 옮겨적었다.

대전쟁(Armageddon)

학살 (slaughter)

신 (God)

또, 이를 나열하고 발음대로 옮겨 적으면...

adnahtro

...가 되는데.

‘아드나트로? 에드나트로...? 이게 무슨 뜻이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단어. 적어도 내 기억엔 없다.

혹시 읽는 순서가 잘못된 걸까?

“오르탄다...? 오단다... 아니, 이것도 이상한데... 그럼 글자 배열을 바꿔서 아드트나로? 아나로드트...?”

“...혹시 안다로스(an'daroth) 아니에요?”

“안다로스...? 그게 뭔데?”

아니, 어디선가 분명 얼핏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한데...

머리를 부여잡고 전전긍긍하며 기억을 헤집고 있자니, 니아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안다로스라...! 그런 뜻이었구나!! 소년, 기억 안 나?!”

“...뭐가요?”

“나랑 소년의 두근두근 첫 데이트! 던전 암시장에서 공연을 보러 갔을 때도 들었던 지명이잖아! 그때 정말 재밌었는데... 단둘이 커플석에 앉아서 공연 관람도 하고... 소년이 카라멜 팝콘을 만들어주겠다고 한 것도 그때였고...”

“.....”

그러고 보니...

‘...안다로스 평원으로 떠나거라 영웅이여. 그곳에 너를 도울 이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깨우고 혼란에 빠진 왕국을 구원하거라.’

설마...

그러니까 그때 공연 주제가 분명...

“대전쟁...약 다섯 세기 전에 발발한 전쟁이에요. 이 사건 때문에 지역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명과 종족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요. 안다로스 평원은 그 시발점이 된 곳이고요.”

“안다로스 평원? 거기가 왜...”

“그곳에서 인족 세력이 봉인되어있던 천사를 깨웠거든. 그걸로 본격적인 전쟁이 촉발되었고. 대전쟁이 어떤 건지는 도란도 알지?”

“....”

그야 알다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무지한 나라도 그 정도 지식은 있다. 지금껏 라디나 아리엘과 대화를 나누며 여러 번 언급되기도 했고, 이곳에선 과거의 그 어떤 사건보다 중대한 사건이니까.

‘악마와 인간이 편을 갈라 죽기 살기로 싸웠다고 했던가...’

지금도 사람들이 검은 머리를 기피하는 이유가 그때의 영향 때문이고.

외부인인 나로서는 조금 진부한 이야기긴 하지만, 아직도 치를 떨며 마족을 혐오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당시 전쟁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자들의 의미는...

“대전쟁, 학살, 신, 안다로스 평원... 이걸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네요... 일단 과거의 도란님이 대전쟁을 겪은 건 명백하고...”

“그때의 일로 이 유적을 건설했다는 거겠지...? 도란이 도시 외부를 미로처럼 만들어둔 걸로 봐서는 침입자를 반기지 않은 게 확실한데... 이런 지하까지 숨어들은 걸로 봐서는 아마 도피나 농성 목적일 수도...”

“아니면 여왕하고 관련이 있지 않을까?! 최심부 꼭대기에 여왕의 묘실을 만들어두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으니 여왕의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던가! 그 왜, 여왕은 안디라 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언젠가 부활할 걸 알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

“.....”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조용히 문자열을 바라보며 사고했다.

과거의 내가 대전쟁을 겪고, 모종의 이유로 이 유적을 건설했다는 추론은 타당하지만, 그렇게 되면 쟁점이 두 개 존재한다.

“...잠깐, 그렇다면 하나 아귀에 맞지 않는 게 있어. 대전쟁이 일어났던 건 다섯 세기 전, 그러니까 겨우 오백 년 전이잖아. 오백 년이 적은 세월은 아니지만 이 유적은 적어도 수천 년은 돼 보이는데 이건 어떻게 된 거지?”

벽화의 마모도나 노후되어 색이 바랜 건물, 시체의 상태 등으로 봤을 땐 적어도 다섯 세기 전 유적은 절대로 아니다.

회의적으로 일행을 둘러보자 라디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그건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데... 마법 때문이 아닐까요...?”

“마법?”

“네, 이전에 말톤님이 그러셨잖아요. 몇몇 던전 중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뒤틀려 있는 곳이 있다고... 땅속 지하에 이렇게 거대한 공동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공간이 왜곡된 까닭이고요. 그리고 저희는 이 유적에 그러한 마법이 걸려있는 걸 몸소 겪었으니...”

“.....”

“당장 믿기는 어렵지만... 이곳은 지난 수백 년간 문명에서 분리되어 있었으니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

유적 안팎으로 시간의 흐름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쉬이 수긍이 가지 않는 이야기긴 하지만 일단 라디의 말을 사실이라 가정할 경우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좀전에도 떠올렸던 쟁점.

‘...과거의 나는 인류의 편이 아니었던가..’

천사를 눈앞의 벽화처럼 괴기하게 묘사하는 건 악마의 특징이라고 했다.

나는 대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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