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40화 (340/375)

〈 340화 〉 애완견 두 마리 #5

* * *

[340] 애완견 두 마리 #5

길잃은 요정 하나가 연못에서 쉬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푸른 오아시스의 수면이 비쳐 불가사의한 광채가 일렁거리는 살결, 맑은 물살 너머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새하얀 팔다리, 발광 이끼의 은은한 잔광이 드리워 푸르게 빛나는 달의 낙인...

‘이런...’

파렴치한 엿보기범으로 오해받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는 차­

­바스락.

“.....!!”

“...주인님?”

하마터면 야자수 껍데기를 밟아버렸다.

나는 서둘러 두 눈을 가리고 나무 뒤에서 걸어나와 외쳤다.

“미, 미안...!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진짜로 그냥 지나가다가 물소리가 들리길래...!”

“괜찮습니다 주인님. 주인님이 말도 없이 목욕 장면을 엿보실 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뜨끔!

“...그, 그래? 그.. 그럼 난 이만 다시 가볼게! 좋은 밤 보내고, 하던 거 마저 해! 화이팅!”

재빨리 손을 흔들고 떠나려던 찰나ㅡ

“아니면...”

같이 들어오실래요?

“.....”

*

처음부터 넙죽 받아들이려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에 흘러내린 땀 때문에 몹시 찝찝했다는 점, 모래 수렁에서 나온 뒤로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는 점, 또 모처럼 실비가 건넨 권유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 등을 이유로...

‘...사실 다 핑계지만.’

그래도 마침 실비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전할 말도 있는데 잘 됐다.

문제는 타이밍이 좋지 못하다는 점인데...

힐끗 어깨너머를 응시하자 정갈하게 몸을 씻는 실비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노예 거래소의 철창 너머로 목격했을 때에 비하면 부쩍 건강해진 피부와 머릿결. 만지면 몹시 보드랍고 기분 좋을 것 같은 허리선. 덧없이 피어오르는 한숨. 그로부터 전해지는 은은한 열감. 야살스러운 소음.

내가 덮칠 거라고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무방비하게 뒤돌아선 모습.

이에 없지만 아예 없지는 않은 봉분 위로 도담하게 솟아오른...

“....!”

순간 눈이 마주쳐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실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냐... 고마울 것 까지야... 그, 그보다 상처는 아직 안 나았나 보네...? 아리엘한테도 부탁해 봤어?”

원래는 매끈해야 할 실비의 등허리에는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화상 자국이 나 있었다. 영주성 지하에서의 실험 휴유증. 촉수가 돋아났던 장소.

안타까운 눈초리로 슬쩍 가슴을 가리고 선 실비의 뒤쪽을 눈짓하자 녀석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것은 제 어리석음의 증표. 주인님께 이빨을 들이댄 것에 대해 응당 벌을 받은 것입니다. ...아리엘 님께서도 상처를 지워주려고 하셨지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하긴... 그 촉수는 독소 때문에 치유 능력도 잘 안 드니까... 아프지는 않아?”

“피부가 조금 민감해진 것 외에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그보다 기다려 주신 데에 대한 감사 인사로 등을 밀어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아냐 괜찮아!”

“...부담스러워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부 자의로 하는 것이니...”

“정말 괜찮아!! 혼자서도 할 수 있거든...!”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불편한 가책이 양심을 쿡쿡 찌른다.

실비와의 관계는 워낙 특별한 경우라고는 하나, 애인들을 놔두고 이런 야밤에 단둘이 알몸으로 입수해 있다는 건 충분히 일선을 넘은 행위였으니까.

니아가 이 광경을 봤다간 입에 거품을 물며 졸도할 테고.

나는 소슬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리는 야자수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곤 묘연하게 말했다.

“근데... 실비는 왜 같이 씻자고 한 거야? 내가 불편하지 않아...?”

최근 우리와 함께 지내며 나아지긴 했지만, 원래 실비는 노예 거래소에서도 격리실에 가둬졌을 정도로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하물며 남성인 나는 더욱더 거북할 텐데...

말을 마치자 실비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녀석이 어렴풋하게 수면 아래로 꼬리를 살랑이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주인님을 감사하게 여길지언정 불편하게 느낄 리 없습니다. 그저 잠시만이라도 이렇게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혹시 폐가 되었나요...?”

“아, 아니 그럴 리가! ...사실은 나도 실비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제게 하고 싶은 말씀 말이십니까?”

“응, 그렇긴 한데...”

막상 기회가 찾아오니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를 만나기 전 실비의 과거라던가, 녀석이 꿨다던 이상한 꿈이라던가, 사실은 이 유적이 실비와도 큰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라던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자 등 뒤에서 물살을 가르고 다가오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주인님...”

실비가 내게 동의를 구하더니, 대답이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내 등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기댔다.

“...주인님은 제 하늘입니다.”

“.....”

“제 모든 건 주인님의 것입니다. 저의 몸, 두근거리는 심장, 막 온기를 깨우친 마음과 이 기쁨마저도. 전부...”

“어째서 그렇게까지...”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게 둘러진 손을 맞잡으며 천천히 실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게 산란하는 던전의 불빛이 기울어진 얼굴로 날 올려다보는 실비가 너무나 성숙해 보였기에.

‘얘가 언제 이렇게 성장했지...?’

아니... 외모는 분명 그대로다. 실비가 우리 저택에 오고 난 뒤로 이 주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봐왔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달라진 건...

‘내가 실비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는 건가...?’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자각하기 시작한 인연의 고리. 함께할수록 점점 선명해져만 가는 붉은 끈. 태동하는 세계.

오랜 문명의 기록이 말하는 나와 그녀의 흔적...

실비가 애잔한 등빛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고했다.

“제가 이 유적과 관련이 있는 거죠...? 어쩌면 주인님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아보겠어?”

“아니요... 하지만 알 수 있어요. 주인님이 절 바라보는 다정한 눈길 속에 얼마만큼의 근심이 녹아있는지... 잠들지 못하고 이승을 배회하는 망령들이 누굴 찾는지... 먼 과거의 상형문자에서 왜 익숙한 손길이 느껴지는지... 해일과 메라가 얼마나 절 애틋하게 기다려 왔는지...”

“....”

나는 침묵했다. 굳게 입을 다물고 검푸른 유적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평온하게 울려퍼지는 폭포수의 낙하음과 밤바람, 딱정벌레의 울음 속에서 조용히 실비와 맞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나와 그녀의 과거.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원래라면 여왕의 묘실을 확인한 뒤에 털어놓을 셈이었지만...

‘아니, 오히려 지금 말하는 게 적당할 수도 있겠네...’

만일 정말로 여왕과 실비가 동일 인물이면, 묘실을 방문했을 때 관 내부의 시체를 보고 충격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데...

무수한 별이 박힌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창공을 응시하며 망설이자 실비가 다소곳하게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전 주인님의 충실한 종. 주인님께서 제 눈치를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어떤 요구와 말씀을 하시더라도...”

“아니... 딱히 들어서 곤란할 이야기는 아닌데... 대신 조금 놀랄 수도 있는데 정말로 괜찮겠어? 어쩌면 당장 받아들이기는 힘든 내용일지도 몰라.”

“괜찮습니다. 그걸로 주인님의 마음에 쌓인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만 있다면...”

“....”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에서 눈을 떼고 실비를 들여다봤다.

나를 제외하곤 세상 그 무엇도 안중에 없다는 듯이 올곧게 응시해오는 호박색 눈동자, 함초롱하게 젖어 가슴께까지 드리운 흑발, 고향에 두고 온 여동생을 연상케 하는 동안의 얼굴 또한 들여다봤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나는 물기슭 근처로 걸어나와선 실비를 나란히 옆에 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고향에 관한 것, 내가 이 세계에 와서 겪은 일, 어둠의 권능을 다루는 그림자 소녀에게 도움을 받은 것과 그 소녀가 실비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

바위 언덕에 뿌연 모래 구름이 흐르고, 반짝이던 별이 기울고, 공연한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짝을 찾아 조금 잦아들었을 즈음.

실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랜 침묵을 깼다.

“...그랬군요. 저와 이 유적에 그런 비밀이...”

“....실비는 괜찮은 거야? 갑자기 이런 얘기를 들어도...”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주인님과 만나고, 함께 많은 시간을 공유한 뒤로는 어렴풋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어째서...”

“.....”

실비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녀는 항상 무표정을 고수하던 예의 그 입술로 웃어 보이더니, 말없이 내게 상체를 향하며 꿈속을 거니는 듯한 어조로 고했다.

“주인님께는 제가 이상한 꿈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실비가 상형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니.

내 예상이 맞다면 그 꿈의 정체는...

“제 과거와 연관이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그 꿈에서는 저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실비만 나오는 게 아니라니...?”

의아하게 묻자 실비가 애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를 믿고 따라와 준 수많은 사람들. 악에 맞서 싸우고, 차례차례 죽어가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이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맑은 웃음으로 서로를 다독이던 소중한 동료들... 그리고...”

“.....”

“마지막... 제 눈이 감기던 순간에도 너무나 다정하고, 또 슬픈 얼굴로 손을 맞잡아주시던...”

실비가 조용히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녀가 태양 낙인이 새겨진 내 왼손을 공손하게 어루만지며 꿈결처럼 속삭였다.

“주인님의 말씀이 전부 맞다면 저와 주인님은 전생에 부부, 혹은 그에 준하는 연을 맺었다는 것이겠죠.”

“....그래.”

“신기합니다... 몇 세기 전에 연을 맺었던 사람과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제 주인님이라니...”

“.....”

무심코 실비의 오른손이 내 뺨 근처까지 다가왔다가 저물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고 내 얼굴 위에 얹어주었다.

소중한 존재를 뇌리에 각인하는 맹인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내 뺨을 매만지며 미소짓는 실비를 보며, 나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억누르고는 덧없는 웃음을 자아냈다.

그녀가 날 더욱 편히 어루만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속삭였다.

“...혹시 실비는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바라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노예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입장으로. 그간 많이 고생했잖아.”

“그래도... 이미 과분할 정도로 많은 걸 받고 있는 제가 여기서 또 뭔가를 받을 수는...”

“그러지 말고.. 말해봐 뭐든 괜찮으니까.”

“으... 정 그렇다면...”

실비가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꼬았다. 갈팡질팡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이더니...

“그, 그러면 혹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머리를...?”

“예... 실은 주인님께서 항상 절 쓰다듬어 주시기 직전에 멈추었던 게 못내 아쉬워서... 안주인님들이 주인님께 예쁨을 받는 모습을 보며 주제넘지만 그... 살짝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 거였나.

나는 피식 웃으며 실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받아쓰기에서 만점을 받은 아이를 칭찬하듯 쫑긋거리는 세모난 귀 사이를 어루만져 주자 실비가 뺨을 붉히며 난연하게 미소지었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쓰다듬어 줄걸.

“어때, 마음에 들어? 더 바라는 게 있으면 또 말해도 되는데. 모처럼이잖아.”

“저 그게...”

“왜, 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정말로 무섭군요. 이미 가슴이 터질 만큼 행복한데도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니...”

실비가 전 나쁜 아이일지도 모르겠네요... 라고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내 눈이 맞다면 방금 아쉬운 눈길로 내 입술을 쳐다본 것 같은데...

“...정말로 더 원하는 거 없어? 사양하지 않고 말해도 괜찮은데.”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니...”

“다음엔 안 해줄지도 모르는데?”

“윽... 그,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미 주인님께는 지나치게 받아서...”

“그래? 아쉽네...”

“.....”

천천히 머리에서 손을 떼자 실비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방심한 틈을 타 부드럽게 턱을 잡아당기고는ㅡ

­쪽.

“어...?”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으... 으...? 아으...? 읏...! 바, 방금?”

나는 이마에 포스트잇을 붙인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고장 난 실비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내 조금은 짓궂은 미소를 피어올리고는­

“왜, 나는 주인이니까 뭐든 해도 된다며. 아까 했던 말은 빈말이었어?”

“아, 아닙니다! 제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입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 저 따위에게 주인님이 그런... 과분한...”

“그래? 더 하려 했는데 그럼 어쩔 수 없네...”

“아, 아...!”

천천히 물 밖으로 빠져나오려던 찰나, 실비가 눈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빼앗긴 아이처럼 표정을 무너뜨리며 내 팔뚝을 붙잡았다.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뒤돌아보자 실비는 아차 황급히 손을 떼고는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 가끔은 나쁜 아이가 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좀 더 욕망에 솔직하게...”

­쪽!

“그... 좀 더...”

­쪽.

“좀 더...”

­.....

“주인님.. 조금만 더...”

­....

나는 부드럽게 실비를 안아주며 연신 입술을 맞추었다.

그간의 기다림도 녹여버릴 만큼 달콤하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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