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화 〉 여왕의 안치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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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여왕의 안치실 #1
“그럼... 출발하자. 빠진 거 없나 잘 확인하고.”
“응, 난 준비 다 했어! 배낭도 다 꾸렸고!”
“모닥불도 확실하게 소화했어요. 유적에서 얻은 전리품도 모두 챙겼고요.”
“나도 준비 다 했어! 실비는 어때?”
“...저도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됴란!
크샤앗...!
푸릉!
크르릉...!!
“.....”
...수가 어마어마하구먼.
등 뒤를 돌아보자 북적거리는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거미와 노래기까지 추가하면 축구팀 하나를 꾸려도 될 정도.
이중 거의 절반이 내 애인인 것에 감탄해야 할지 마물인 것에 놀라야 할지 모르겠지만...
“...좋아, 그럼 이제 출발하자. 앞으로 당분간은 이 유적에 못 올 테니까 빠트린 게 있으면 지금이라도 말하고.”
고대 도시에서의 사흘째 아침.
드디어 유적을 떠나기로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더 체류하고 싶지만 식량이 한정적이라는 문제도 있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니까.
‘울시랑 스승님은 잘 있겠지...?’
정 필요한 일이 생기면 이 유적은 나중에 던전에서 나올 때 다시 방문해도 된다.
나는 개미들에게 배낭을 맡기고 가파른 바위산을 올랐다.
모래에 뒤덮인 공공시설과 쓸쓸한 폐허.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건물들을 지나 비좁은 골목을 오르다 보니 검은 덩굴로 틀어막힌 거대한 동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전에 우리가 여왕의 묘실로 향하기 위해 통과했던 장소.
라디가 슬며시 내 곁으로 와 속삭였다.
“...도란님, 괜찮을까요?”
“뭐가?”
“아니, 그... 미라 말이에요. 이곳을 완전히 뜨기 전에 실비한테 설명을 해야 할 텐데... 실비의 이전 백성 같은 존재들이잖아요.”
“아 그거? 대충 눈치채고 있던데?”
“....네?”
“그보다 이제 슬슬 랜턴 꺼내자. 이제 들어가야 하니까.”
콰드드드득...!
손을 내두르자 동굴 입구를 틀어막았던 덩굴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움직였다. 메라의 등에 업혀 바위산 정상에서 술독을 발견했을 때 소환해두었던 덩굴.
아리엘이 눈썹을 움찔하며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저건... 덩굴? 도란이 해 놓은 거야?”
“그래, 저 너머에 미라들이 잔뜩 있거든. 밤중에 습격당하면 곤란하니까 막아뒀지. 일단은 자아가 없는 상태니까 실비를 못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구나... 갑자기 큰 게 움직여서 깜짝 놀랐네... 그, 근데 덩굴이랑 미라 말고도 안쪽에 뭐가 잔뜩 있는데...? 나무나 바위 같은 폐자재가 잔뜩...”
“아 저건 말이지...”
“...왠지 그립네요.”
라디가 추억에 잠긴 듯한 얼굴로 잡동사니를 응시했다.
그야 저건 우리가 이 유적에서 도망칠 때 미라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허겁지겁 세웠던 바리케이드가 아니던가.
이렇게 과거의 발자취를 당면하니 정겹게 느껴진다.
그 뒤에 있는 건 마냥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소년, 뭔가가 잔뜩 널브러져 있어... 미라.. 같아...”
“그러네요...”
“저기... 괜찮은 거야...? 원래라면 저 사람들은 전부...”
“네, 저와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겠죠. 어쩌면 긴밀한 사이였을 수도 있고요.”
가까이 다가가 말라비틀어진 미라를 들여다봤다. 엎어져 있는 사체를 들추고 공허한 눈구멍을 들여다보자, 유적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희미하게 귓가를 잠식하던 잡음이 더욱 뚜렷해졌다.
처음에 날 유적 내부로 이끌었던, 망자들의 한 맺힌 넋두리가.
“...실비야, 뭔가 들려?”
“예... 들립니다.”
“뭐라고 하든?”
“그게... 고맙다고... 살아줘서..”
“....그러냐.”
이들은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던 걸까.
나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통로에 즐비한 주검을 둘러보았다.
원래라면 빠르게 지나칠 셈이었지만...
“...장례라도 치러줄까.”
“장례... 말씀이세요 도란님?”
“그래, 이제 숙명도 완수했는데 계속 언데드로 남아있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러니 여기 있는 애들만이라도 모아다가 정화해주는 거지. 아리엘의 신성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고.”
언데드는 죽은 자들에게 있어 최대한의 불행이라 들었으니까.
힐끗 쳐다보자 아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물론이지! 나도 찬성이야!! 이 사람들은 생전에 도란하고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아 왔잖아. 이제 편히 쉬어도 된다고 생각해.”
“..고마워 아리엘. 진심으로...”
“별거 아냐. 이쯤이야 당연한 일인걸? 나야말로 도란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뻐! 하지만 신성력을 쓰면 금방 지치니까 한곳에 모아서 정화할 수 있으면 하는데...”
“아, 그건 내가 할게. 개미를 소환해서 짊어지게 시키면 되거든. 그리고 좀만 더 가면 카노푸스 단지를 모아둔 널찍한 공동이 나오는데 거기서 한 번에 정화하자. ...들었지?”
크샤아앗!!
발치에서 개미를 여럿 소환하자 사슴뿔 개미가 앞서나가 녀석들을 진두지휘했다.
지게에 땔감을 싣듯 비쩍 마른 미라를 집게에 얹어서 운반하는 개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계단을 오르다 보니 머잖아 발소리가 크게 메아리치는 지점이 나왔다.
끼릭끼릭 마석등의 광량을 최대로 높이고 높게 들어올리자
“드디어...”
시련의 장소.
대규모 시립 도서관처럼 거대한 공간과, 천장까지 맞닿은 초대형 선반. 그 위를 무수하게 장식한 석제 단지. 새벽의 대성당처럼 중후하고 엄숙한 적막이 흐르며 스산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
‘여긴 다시 봐도 장엄하네...’
과거, 나는 이곳에서 미라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홍옥을 손에 넣었다.
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구슬의 온기를 상기하며 공동에 발을 내딛자 니아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뭐, 뭐야 여기는... 무슨 시체가 이렇게나 잔뜩...! 게다가 다들 어딘가 공성 병기에 맞은 것처럼 터져있거나 찢겨있고... 철조망에, 불에 그슬린 흔적에... 잠깐...! 이건?”
니아는 바닥에서 손가락 세 마디 길이의 반짝이는 물체를 주워들고 유심히 살피더니...
“이건... 대못...? 녹도 거의 안 슬었어... 설마...! 혹시 이거 라디 네 거야?”
“.....”
라디가 머쓱하게 머리의 귀를 매만지며 대못을 받아들었다.
“네, 맞아요. 여기서 대규모 전투를 치렀거든요. 저 철조망하고 칼날이랑 깡통도 그때의 흔적이고... 저 불에 탄 흔적은 악어 기름을 쓴 거예요. 그 왜, 던전 1층 습지를 건너오면서 그린 앨리게이터를 만났던 거 기억하시죠?”
“으응... 꽤나 거하게 했나 보네... 라디는 쇠뇌만 잘 다루는 게 아니라 함정에도 일가견이 있구나?”
“네, 원래 모험가 초기에는 마물을 사냥할 때 쇠뇌보다도 함정을 더 자주 썼어요. 최근에는 도란님이랑 함께 다니다 보니 함정을 설치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요...”
“그래? 하긴... 나도 원래 무슨 일이 있으면 일단 고생해가며 몸으로 부딪쳐 보는 성격인데 소년이랑 같이 다니고 난 뒤로는 그럴 일이 줄어든 것 같기도...”
니아가 힐끗 뒤따라오는 수많은 개미들을 쳐다보았다. 보통 평범한 소환수라 함은 어딘가 한 곳씩 나사가 빠져 행동이 굼뜨거나 활용처가 한정적인 게 보통이지만, 내 소환수들은 자아도 뚜렷하고 움직임도 빠릿빠릿하니까.
다만 개미의 경우 식탐이 지나치게 많다거나, 노래기는 다소 소심한 구석이 있고, 거미는 통제가 안 되는 둥 하자도 존재하지만...
“야! 그거 뜯어먹지 마! 젠장... 이래서 한눈팔면 안 된다니까... 다들 시체 들고 이쪽 구석으로 모여! 가장 많이 옮기는 세 마리는 선착순으로 고기 한 덩이씩 줄 테니까 빨리빨리 움직이고!”
크샤아아아앗!!!
크샥!! 크샤샷!!!
키킥!
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녀석들이 통로를 지나며 수거한 주검과 공동에 널린 미라를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여섯 다리를 뽈뽈거리며 사체를 운반하는 무수한 개미 떼를 보고 있자니 꼭 대규모 건설 현장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
그런데...
‘...이건 좀 그로테스크하네.’
시체의 수가 너무 많다.
과장 좀 보태서 작은 산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지경. 미라화되면서 신체의 수분이 증발해 그나마 부피가 줄어든 게 이 정도다.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아리엘이 난감하게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으음... 확실히 좀 많긴 하네... 그래도 걱정 마! 언데드를 정화하는 건 적은 신성력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여러번에 걸쳐서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괜찮겠어? 정 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 만약 내가 힘들어하면 도란이 다정하게 업어줄 거 아냐? 그치?”
“....”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끌어안자 아리엘이 소명하게 웃으며 내 뺨에 입술을 맞춰 화답하더니 늘씬하게 뻗은 팔에서 눈부신 빛무리를 자아냈다.
언뜻 거룩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찬연하게 발광하는 빛은 무수한 조각으로 갈라져 그대로 미라들에게 녹아들었고, 성스러운 하얀 불꽃을 피워올렸다.
그야말로 신의 권위를 등에 업은 듯한 모습.
공동을 환히 비추던 광채가 한풀 저물고 구슬 같은 비지땀이 고아한 눈꺼풀과 뺨 위를 수놓을 무렵, 길고 길었던 발출이 끝나자 그녀가 피로감이 물씬 풍기는 얼굴로 팔을 내렸다.
“...끝난 거야?”
“응... 이걸로.. 다시는 이 사자들이 부활할 일은 없을 거야.. 이제 다들 편안한 안식 속에서 잠들 수 있어...”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계속 마음이 불편했을 거야. 정말로 고마워...”
“히힛...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
“...피곤하지? 업힐래?”
“아니... 조금만 쉬면 괜찮을 것 같아. 그보다... 실비야 혹시 할 말 있니?”
“.....”
문뜩 옆을 돌아보자 실비가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녀석은 잠시 주저하더니 배꼽 위에 손을 얹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덕분에 이들이 편히 쉴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으응... 별것 아냐. 난 그저 마법 좀 쓴 게 다인걸? 근데... 실비는 이 미라...들이 누군지 알아보는 거야...?”
“으... 그, 그게...”
실비가 난처하게 눈을 굴려 날 쳐다보았다.
나는 녀석을 온화하게 다독이며 말했다.
“...실비한테도 다 설명했어. 나에 관한 것부터 이 유적에 대한 것까지 전부.”
“아... 그랬구나... 뭔가 좀... 안타깝네... 충격이 많이 클 텐데 괜찮아?”
“네... 주인님께서 다정하게 말씀해 주셔서... 그리고 아리엘 님께도 미라에 관련해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게...”
“그래...? 무슨 일인데 그...”
“잠깐...! 실비한테 다 설명했다고요? 도란님의 과거에 관련된 것도 포함해서?”
찰나, 라디가 달려와 내 옷깃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나는 기세에 밀려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으, 응... 어차피 언젠가는 말할 거였으니까...? 유적에 대해 설명하려면 내 과거에 관한 것도 밝힐 수밖에 없고.. 묘실에 당도하기 전에 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왜, 왜...?”
“아니 그야... 지금까지 도란님이 누군가에게 과거를 밝힐 때는 항상 헤프닝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혹시 실비랑도 그...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나 해서요.”
뜨끔!
“아,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냥 얌전히 앉아서 설명한 게 다야!”
“으음... 당황하는 게 왠지 의심스러운데... 정말로 아무 일 없었어요? 추궁하는 거 아니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요.”
“저, 정말이야! 아무 일 없었어! 그치 실비야?!”
“그... 렇습니다.”
“거 봐! 실비도 아니라잖아...!”
“으흠...”
저 멀리서 카노푸스 단지를 들여다보는 니아를 의식해 황급히 부정하자 라디가 미심쩍게 눈매를 찡그렸다.
녀석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자 아리엘이 라디를 다독이며 말했다.
“에이 설마... 도란이 아무리 난봉꾼이라고 해도 벌써 실비까지 꼬시진 않았겠지. 안 그래?”
“그래도... 도란님이 거짓말하면 얼굴에 다 티 나잖아요...! 방금도...”
“음... 그냥 말하면 실비가 곤란해할 일이 있어서 감춰주려는 게 아닐까? 예를 들면 뭐... 둘이 알몸으로 있었다거나! 물론 장난...”
뜨끔!
“어...?”
“...왜 거기서 반응하세요 도란님.”
“아, 아무것도 아냐! 그럼 난 먼저 가볼게!!”
나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육중한 석문이 가로막고 있는 반대편으로 향했다.
어째선지 신묘한 눈길로 아리엘을 올려다보는 실비를 지나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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