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화 〉 여왕의 안치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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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여왕의 안치실 #2
석문에 도달해 멍하니 부조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니아가 스리슬쩍 내게 팔짱을 껴 오며 물었다.
“소년! 저기서 신기한 걸 봤는데 말야... 자그마한 단지 안에 사람 내장이 가득하더라고! 혹시 뭔지 알아?”
“그게 바로 카노푸스 단지에요. 고인을 그냥 매장했다간 그대로 썩어버리니까 쉽게 부패하는 내장을 적출해서 따로 보관한 거죠.”
“우와... 설마 소년은 언데드 제작법도 알아?! 그거 금기 중의 금기잖아!”
“...이전 세계에서 배운 지식이에요. 그리고 언데드 제작법이라고 하기는 좀 무리가 있죠. 미라로 만든다고 해서 전부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요.”
“으음... 그렇구나아... 근데 소년은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이 문 때문에 막힌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나는 피식 웃으며 니아의 허리를 끌어당기곤 정면의 뱀 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붉은 구슬 알죠? 그게 원래 여기 뱀 조각상의 눈에 박혀 있던 거거든요. 혹시 뭔가 단서를 발견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해서 살펴보고 있었어요.”
아치형 석문.
매끈한 광택이 흐르는 석재로 구성된 문에는 바닥부터 높게 뻗은 상단부까지 빼곡하게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술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축제를 벌이는 인간과 개코원숭이, 자칼, 매 등...
‘고대 이집트 신화 속 호루스의 네 아들 임세티, 하피, 두아무테프, 케베세누프가 틀림없는데...’
카노푸스 단지를 의인화한 존재들. 중간의 이 뱀은 이집트 신화에서 절대악으로 묘사되는 아포피스일 테고.
하지만 이 부조만으로 홍옥의 정체를 가늠하기엔 모자라다.
나는 니아의 꼬리 밑동을 살살 어루만지며 사고에 잠겼다. 여기서 홍옥을 찾았으니 이곳에도 모종의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석벽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도중
“진실의 문은... 언제나 위에 있다...?”
“...뭐라고?”
“아 그게...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 문에 새겨진 글귀를 그대로 읽었더니...”
“...이 문에 그런 글이 쓰여있어?”
“네...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예를 들면 이곳...”
실비가 부조의 한 지점을 손으로 짚었다. 개코원숭이의 꼬리 밑, 자칫 얼룩으로 착각하고 넘어갈 뻔한 문양을.
이외에도 자칼의 눈동자나 매의 부리, 사람의 팔뚝 등 곳곳에 숨겨진 문자열을 모두 모으니...
“진실의 문은 언제나 위에 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저도 의미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어물쩍거려봤자 얻을 게 없다는 뜻 아냐? 위라고 했으니 여왕의 묘실에 답이 있다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럼 역시 묘실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래야겠네... 아리엘, 라디야 슬슬 이동할까 하는데 괜찮겠어?”
“응! 나도 이제 좀 괜찮아졌어!”
“...빨리 넘어가죠. 이곳은 시체랑 내장 악취 때문에 코가 시큰거려서...”
“그래. ...란이도 이쪽으로 와!”
됴란!
나는 메라의 등에 올라탄 란이와 해일, 배낭과 술독을 든 개미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마지막으로 부조를 힐끗 쳐다본 뒤, 뱀 조각상의 주둥이에 홍옥을 끼워넣자 둔중한 소음과 함께 석문이 열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
“...섬뜩하네.”
어슴푸레한 마석등의 불빛이 회랑에 드리우자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눈에 띄었다.
쭉 뻗은 통로의 양옆으로 주르르 늘어선 등신대 비율의 마물 석상.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세월의 흐름을 짐작게 하지만, 얄팍한 회반죽 너머로 전해지는 희미한 맥동으로 이들이 전부 살아있는 존재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리엘이 흠칫 놀라며 내 팔에 안겨들더니 당황한 어조로 속삭였다.
“뭐, 뭐야 도란...! 이 석상들에서 마력이 느껴져... 일반 조각상은 아닌데...”
“응, 전부 진짜 마물을 봉인해둔 거야. 해일이랑 메라를 여왕의 묘실 앞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도 비슷한 모습이었거든. 이놈들은 조금 더 깊게 잠든 것 같지만...”
“대체... 이 마물들은 어쩌다가 이곳에 봉인된 걸까...? 이것도 전부 과거의 도란이 유적을 건설하면서 놔둔 걸 텐데...”
“....”
글쎄다.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당시에는 이 석상들의 용도를 짐작할 수 없었으나
“고대의 마물... 지금은 멸종한 종도 있어요... 대전쟁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전에 신전에서 본 벽화의 내용으로 과거의 내가 대전쟁을 겪은 건 확실하니까.”
“그렇다면... 당시의 마물을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전력으로 쓸 요량으로 봉인해둔 걸지도 모르겠네요. 도란님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저희가 가까이 가도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침입자를 격퇴하려는 목적은 아닐 테고... 여러 흔적으로 볼 때 과거의 도란님이 후일을 도모한 정황도 있으니까요.”
“...그래.”
여왕의 옥체를 보전할 미궁과 도시를 만들었다던가, 왕의 묘실에 단도를 남기고 갔다던가, 홍옥을 가져가도록 유도했다거나 등의 정황으로 과거의 내가 먼 미래에 이 유적을 다시 방문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한, 유적 전체에 걸쳐서 묘사된 암울한 벽화와 대전쟁의 흔적, 신전에서 발견한 천사의 부조 등으로 봤을 때 과거의 나는 꽤 적이 많았던 모양이고.
즉, 이 마물들은 내가 이곳에 다시 들렀을 때 활용할 수 있도록 봉인해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복잡한 심경으로 눈앞의 정체 모를 마물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라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깨울 수 있겠어요...?”
“...아니, 당장은 모르겠어. 만약 봉인을 푸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지금은 조용히 놔두는 게 좋을 것 같고.”
“하긴... 이 마물들이 갑자기 깨어난다고 한들 곤란할 따름이니까요... 사냥하면서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식량에, 주거 문제에...”
“.....”
“언젠가 봉인을 해제할 날이 올까요...?”
“...모르지.”
확실한 건,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거다.
이 끔찍한 고대의 마물들을 깨울 정도면 대전쟁 정도가 아니고서야 부적할 테니.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거인과 흉측한 인면을 지닌 만티코어, 아파트 한 채 크기에 걸맞은 대형 해룡종 따위를 둘러보며 걷다 보니 곧 회랑의 끝을 알리는 자그마한 석문이 나왔다.
힘을 합쳐 문을 젖히자 마침내ㅡ
“...도착했네.”
초대형 범선.
압도적인 위용의 갤리선이 눈앞에 도래했다.
옷깃을 틀어막아 칼바람을 차단하고 바위산 꼭대기로 나서자 시야가 탁 트이며 기분 좋은 고양감과 함께 까마득한 미궁이 내려다보였다.
내 뒤로 일행들이 뒤따라 나오더니 저마다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와아... 이 배는...! 우리가 도시에 들어설 때 봤던 배잖아! 벌써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엄청 크다... 원래 이렇게나 컸었어...?!”
“이건 대체...”
“.....”
일행들이 입을 헤 벌리고 경탄하자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걸 타고 여왕의 묘실까지 갈 거야.”
“뭐? 이 배를 타고...? 하지만 어떻게...”
“이게 보기에는 그냥 딥따 크기만 한 배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대단한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거든. 그런데... 이전에는 어떻게 올라탔더라...?”
범선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으나 마땅히 타고 오를 만한 물체가 보이지 않았다. 선착장에서 갑판까지 거리가 꽤 있어서 이대로 탑선하려고 했다간 그대로 떨어지고 말 텐데...
“...저희가 한 번 타는 바람에 널빤지가 분리돼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왜, 저번에 저희가 탔을 때는 나무 판자가 걸려있었잖아요.”
“그런가 보네. ...근데 넌 뭐하냐?”
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자 라디가 찰싹 바닥에 달라붙어 엎드리고 있었다.
녀석이 후드를 눌러 쓴 채 못마땅한 기색으로 쏘아붙였다.
“...저 높은 곳 무서워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 빨리 안전하게 넘어갈 방법이나 찾... 읏?! 자, 잠깐...!! 도란님 지금 대체 뭘?!!”
“뭐긴 뭐야. 안전하게 넘어가고 싶다며. 이 방법 말고 더 있어?”
“아, 아으으읏...!! 자, 잠꺈!! 도, 도란ㅡ!!”
“그럼 옮길게.”
발치에서 소환해 낸 덩굴을 조작해 들어올리자 라디가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다.
나는 녀석이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갑판 위로 옮기고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다음 타자는 누구야?”
“으음... 우리는 평범하게 건너갔으면 하는데...”
“그래? 그러면 덩굴로 고정해둘 테니까 알아서 건너올래?”
“으응! 나도 그렇게 할래 소년!”
“...저도 그쪽을 선호합니다.”
“그래, 그럼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와. 늦으면 먼저 출발해버릴지도 모르니까 너무 지체하지는 말고. ...너희도 잘 건너올 수 있지?”
푸르릉!
케르릉...!
됴란!
크샥!
나는 뒤따라오던 마물에게 눈짓하고는 덩굴을 딛고 날렵하게 선체에 올라탔다.
한데...
“뭐야,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라디가 새빨간 얼굴로 갑판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어째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고 고개를 못 드는 걸로 보아...
“...지렸어?”
....끄덕.
“....”
이런.
난처하게 관자놀이를 매만지자 라디가 황급히 덧붙였다.
“그...! 어디까지나 조끔...! 아주 쪼끔이니까...!!”
“...그래, 그러면 개미더러 배낭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선실에서 빨리 갈아입고 올래?”
“네... 그, 근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같이 가자. 부축해 줄게.”
“고마...워요.”
“....”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게 다 도란님 때문이잖아요!!!”
“아, 아얏!! 왜 갑자기 성을 내고 그래?! 그야 나 때문이 맞긴 하지만...”
갑자기 발끈해 구레나룻을 잡아뜯는 라디에게서 황급히 떨어졌다.
재빨리 짐꾼 개미들을 불러모아 라디의 배낭을 건네받고 선체 중앙으로 향하자 커다란 함교가 눈에 들어온다.
한데...
“...어디까지 따라오실 거예요.”
“응? 같이 가야지. 배 안쪽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있기는 뭐가 있어요. 이런 곳에.”
“아니 그야... 여기에도 미라가 돌아다닐지도 모르고.. 혹시 함정이라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제가 벗는 걸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지? 겸사겸사 갈아입는 것도 구경하고. 뭣하면 내가 닦아줘도 되고.”
“제, 제가 다 알아서 할 거거든요?!”
라디가 얼굴을 붉히며 배낭을 획 잡아당기려 했지만,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회피했다.
녀석이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주세요.”
“뭐.”
“배낭이요.”
“싫다면?”
“...사정사정해도 안 주실 거예요?”
“응.”
“.....”
라디가 푸욱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가서 구워삶든 말든 맘대로 하세요.”
“그래, 이건 다 내가 배려...”
“대신 니아 님한테도 잘 설명할 자신이 있으면요.”
“라디!! 소년!!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흐헉?!”
강렬한 충격에 급급하게 뒤를 돌아보자 표범 꼬맹이가 꼬리를 흔들며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얼버무렸다.
“아, 아니 그냥! 배 안쪽을 좀 둘러보려고요..!! 저희도 저번에 선체 내부까지는 못 살펴봐서...”
“그래? 근데 왜 이렇게 당황해? 배낭은 왜 메고 있고! 그리고 이 배는 뭘로 움직이는 거야? 아무 이유도 없이 올라탄 건 아니잖아!”
“네, 그야 잠시 기다리면 알아서 움직일... 잠깐.”
배가 움직이질 않는다...?
나는 당혹에 휩싸여 깊은 잠에 빠진 범선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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