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46화 (346/375)

〈 346화 〉 여왕의 안치실 #4

* * *

[346] 여왕의 안치실 #4

“미친.”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선체의 가장 밑바닥,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에 어림잡아도 중형 트럭만 한 마석 덩어리가 느릿하게 회전하며 부유하고 있었기에.

“어, 어떻게 이런 게...”

지금 상황을 비유하자면 길을 가다가 무심코 열어본 컨테이너 안에서 천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내 손에 든 마석등에 쓰인 마석도 주먹 크기밖에 안 하는데 금화 한두 닢은 족히 호가하는 물건이니까.

확실한 건, 적어도 국내에선 이 정도 크기의 마석이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순도,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존재감과 찬란한 광채, 누수되어 실내에 가득 차오른 마력을 보면...

...누수?

순간, 안구 안쪽으로 번뜩 스쳐지나간 위화감에 눈가를 짚고 미간을 찡그리자 라디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건...”

“...괜찮아?”

“괘,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대체 어, 어떻게 하면 이런 무지막지한 크기의 마, 마석이...?! 도란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으음... 그야 좀 놀라기는 했지만 너무 크다 보니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뭐 어떻게 해볼 엄두도 안 나고.”

이런 크기의 마석은 들고 가려고 해도 불가능할 테니까.

난감하게 웃으며 팔을 붙잡아 일으켜주자 라디는 내 차분한 태도를 보고 부끄러웠는지 살짝 뺨을 붉혔다.

한데 녀석 뒤로 우당탕탕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니아와 실비, 란이를 끌어안은 아리엘이 나타나 외쳤다.

“소년! 이쪽에서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어!! 괜찮아?!”

“도란!! 라디!! 어디 다친 덴 없어?!”

“주인님...!”

­됴란!!

“....”

이래서는 꼭 내가 요주의 인물이라도 된 것 같네.

과분한 사랑과 관심에 겸연쩍게 미소짓자 그녀들도 내 뒤의 광경을 목도하고 까무러쳤다.

“뭐, 뭐야 이 무지막지하게 큰 마석은?!! 이, 이거 마석 맞아...?!”

­됴란... 됴오오오란...!!

“세상에...! 이 크기면 대체 얼마 분의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건지... 이 배가 하늘을 난다는 게 과장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니까. 내가 말했잖아.”

“....”

일행이 입을 떡 벌리고 부유하는 마석을 올려다봤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동력실 내부를 살폈다.

중앙에서 느릿하게 회전하는 초대형 마석 외에도 주위에 포진해 있는 중간 크기 마석이나 배수관처럼 복잡하게 꼬여 마석을 이어주는 파이프 등...

‘...저걸로 공기 중의 마소를 포집해서 중앙의 마석으로 보내는 건가.’

마석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마력을 외부에서 끌어모을 수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지만 고대의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잘 작동했던 배가 정지한 이유는, 우리가 저번에 탄 이후로 결함이 생긴 모양이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흠칫 놀라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 그러고 보니 중앙의 마석에만 놀랄 게 아니라 주변 마석도 하나같이 거대해... 우리가 발견했던 골렘의 마석과 비견될 정도야...”

“그러게... 그런데 어쩌다가 멈춘 걸까? 겉보기엔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소년은 혹시 알아?”

“네, 아마 누수 때문일걸요.”

“누수...?”

“네, 잘 보면 주위 마석에서 모인 마나가 파이프를 통해 가운데로 흘러들다가 응집되지 못하고 흩어지잖아요. 아마 저게 동력이 바닥 난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데...”

가까이 다가가 중앙 마석을 들여다봤다.

내 존재 자체가 잡아먹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마석. 투명한 연청색 수정 안쪽에는 골렘의 핵과 동일하게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문자가 오밀조밀하게 새겨져 있다.

한데...

‘잠깐... 외부에도 글자가...?’

마력이 유실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고대 이집트어는 아니지만, 왠지 낯익은 문자가 적혀져 있었다.

r l.

ilitjitlt.

그러니까 이 문자가 분명...

‘아들아, 잘 봐둬라.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게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세워진 유적인데...’

...기억났다.

“대 푸타르크 문자...”

흔히들 룬 문자라고 부르는 언어다.

게르만족이 쓰던 언어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대 푸타르크 어, 소 푸타르크 어, 앵글로 색슨 푸토르크 등 다양한 변형이 존재하고, 고트어나 아이슬란드어, 고대 영어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알고 있다.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우리 아버지가 북유럽 문화재 발굴 작업에 초대받았을 때 같이 따라가서 본 기억이 난다.

이게 여기 있는 이유는...

‘...룬 문자를 이용해 마법을 작성한 건가.’

몇몇 최고위 마법사는 독자적으로 창조해낸 언어로 마법을 구성해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실제로 북유럽 신화에서 룬 문자는 최고신에 해당하는 오딘이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가지에 목을 매고 스스로 창을 찔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난 뒤에야 얻을 수 있었던 지혜의 문자로 표현된다.

또한 룬(Rune)이란 단어는 속삭이면서 퍼지는 비밀과 신비의 뜻을 함축하고 있고, 초기에는 마법적 상징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상형문자나 영어 등 다른 언어에 비해 획이 적고, 간편하고,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

즉, 마법 문자로 활용하기엔 최적이라는 말.

잘 기억을 되짚으면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한데...

“.....”

“...뭐야, 왜 그래? 왜 다들 멀찍이서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귓전을 웅웅 울리는 마석의 소음 사이로 느껴지는 묘한 시선에 옆을 돌아보니 제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일행들이 보였다.

의아한 눈초리로 응시하자­

“아, 아니 그야 소년 너...”

“도란 너 혹시... 마나가 보이는 거야...?”

“어...?”

그러고 보니ㅡ

난 어떻게 마력이 유실되고 있다는 걸 바로 깨달은 거지?

‘어, 어째서...’

이전에도 상대가 마력을 구사하는 걸 알아볼 수는 있었다.

안구에 번뜩거리는 마력광, 부자연스러운 공기의 흐름, 얼음이나 불꽃 등 현실에 구현된 마법의 편린 등으로.

우리가 공기 자체를 맨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어두운 방 안에 빛줄기가 드리웠을 때 흩날리는 먼지로 공기의 흐름을 유추하거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으로 수증기의 존재를 실감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르다.

내가 보았던 건 ‘순수한 마력’ 그 자체였으니까.

남일로만 느껴지던 마력 각성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치는 가운데, 니아와 아리엘이 입꼬리를 움찔하며 반색할 기미를 보이자 나는 당황하며 멈춰세웠다.

“자, 잠깐...!! 잠깐만!!”

“왜에? 대마법사 소년~?”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고...”

“하지만 방금 도란이 자기 입으로 똑똑히 그랬잖아. 마석에서 모인 마나가 응집되지 못하고 흩어진다고. 그리고 그걸 봤다는 건...”

“마력시...겠네요. 제 눈에는 그저 이 마석이 뿜어내는 빛밖에 안 보였으니까요.”

“그럴... 수가..”

마나 하나 쓸 줄 몰라 만년 F랭크에서 구르던 내가 마나에 눈을 뜨다니...

당연히 기쁘다.

당장에라도 여기 전원을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갈겨주고 싶을 정도로 기쁘다.

하지만...

‘대체 왜 이 타이밍에...?’

원래 불시에 마력 각성을 경험한 사람도 꽤 있다고는 하나 갑자기 내가 그 이야기의 당사자가 되니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적어도 뭔가 변환점이 있을 것 같은데...

라디가 내 머릿속의 혼란을 꿰뚫어보고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과거를 자각하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되었을지도... 그 왜, 마법은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잖아요. 그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요?”

“하긴... 과거의 도란은 꽤 강했던 것 같으니까. 이런 유적을 건설하고 왕직도 지냈을 정도로.”

“아니, 암만 그래도... 고작 그거 하나로 마력을 각성한다고? 내가 그토록 별짓을 다 해도 감감무소식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조금 모자란 것 같...

잠깐.

일행을 둘러보다 보니 불현듯 햇빛이 비쳐드는 대양처럼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란이와.

그러고 보니...

‘...정령의 보은.’

정령의 축복을 받은 사람 중에는 특수한 힘을 얻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평범한 시골 청년이 전설적인 모험가가 되었다던가, 대마법사가 되었다던가.

마력 각성은 예삿일도 아닌 수준.

내가 알기로 정령은 깨끗한 마력 그 자체고.

란이는 곧 중급 진화를 앞두고 있을 정도로 보유 마력이 상당하고.

나랑 같이 지낸 지도 꽤 됐고.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미로를 통과하며 마셔왔던 게...’

이곳에선 물이 귀하니 선인장 과육으로 수분을 보충하거나 란이가 공기 중에 떠도는 습기를 끌어모아 생성한 물로 갈증을 해소했다.

만약 알게 모르게 그 안에 정령의 마력이 녹아들어 있었다고 하면...

‘...이전에 아리엘이 운디네와 계약한 사람 중에는 유독 마력 각성을 한 사람이 많다고 했던 게 이런 이유였나...?’

어쩌면 내가 과거를 자각한 것과 란이의 존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 잠깐...! 일단 다들 진정하자! 기뻐하는 건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까. 당장 마력을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란님은 방금 전까지 마석을 들여다보고 계셨죠.. 혹시 실마리를 찾으신 거예요?”

“응, 아마도. 여기에 적혀 있는 문자도 유적에서 본 거랑은 다르지만 내가 살던 세계의 언어로 되어있어.”

나는 각성의 기쁨을 잠시 뒤로하고 마석을 들여다봤다.

마석 외부에 쓰여있는 글귀는 총 두 줄.

r l.

ilitjitlt.

‘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분명 알파벳 a가 룬 문자로 , e가 을 나타내니까...

“파괴한다... 술식.. 처음 비행... 이후에...? 이게 무슨 뜻이지?”

“술식을 파괴한다고요...? 처음 비행...?”

“...혹시 첫 비행 이후 술식을 파괴한다는 내용 아닐까?”

“맞아 그거야 그거!! 그게 바로 첫 번째 문장에 쓰여 있는 내용이야!”

r l.

첫 비행 이후 특정 술식 파괴.

“으음... 비행 후 술식을 파괴한다라... 왜 이 범선이 움직이지 않는지 알 것 같네요... 하지만 어째서 번거롭게 그런 마법을...?”

“...이건 내 추측인데, 혹시 만에 하나라도 이 배가 악용되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악용을 막기 위해서요?”

“그래, 이 배가 자칫 이상한 놈한테 흘러들어가면 큰일이잖아. 그러니까 처음에 여왕의 방까지 도달한 이후에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암호를 알아볼 수 있는 나를 제외하고는 못 쓰게 막아놓은 거지.”

“음... 듣고 보니 그럴지도...”

하늘을 나는 수단이 극히 한정적인 이곳에서 이런 유물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간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 테니.

“그렇다면 이제 다음 문장이 관건인데... 첫 번째랑 세 번째 단어는 알아보겠는데 그 사이에 있는 문자를 모르겠네...”

ilitjitlt.

마나○○○탱크.

아마도 이 깨진 글자가 첫 번째 술식으로 인해 파괴된 구절일 터, 마석에 마나가 모이지 못하는 원흉일 거다.

머리를 싸매고 깨진 문자열에 들어갈 단어를 고민하고 있자니...

“으음... 그럼 ‘사용’이 아닐까...? 여기에 모은 마나를 써서 하늘을 나는 거니까...”

“사용? ...아니, 아마 그건 아닐 거야. 마력을 쓰는 것 자체는 이상이 없지만 수정 자체에 마나가 모이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그럼 단순하게 생각해서 ‘저장’ 아냐? 수정에 마나를 모을 수만 있다면 되는 거잖아!”

“저장...? 저장.. 그래 그거에요!! 아리엘! 혹시 나 대신 마나로 문자를 써줄 수 있어?!”

“응! 뭐라고 쓰면 되는데?”

“저장... 저장이 룬 문자로 그러니까... r... rv.... rv일 거야!! 잠깐만, 혹시 종이가...!”

“이걸 쓰세요.”

“이건...?”

“아까 제가 담아두었던 화약이에요. 이걸 바닥에 뿌리면...”

“그래! 좋은 생각이야!!”

나는 라디가 건넨 깡통을 바닥에 엎고는 머릿속에 떠오른 문자열을 망각하기 전에 황급히 손가락을 놀렸다.

화약 가루 위에 문자를 쓰자 아리엘이 그대로 따라서 마석 위에 마력으로 글씨를 새겨넣더니 불현듯 탄성을 내질렀다.

“도란! 성공이야! 정말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마력이 중앙으로 고이고 있어!!”

“그래! 긴가민가 했는데...! 다행이다...”

“정말로 어떻게 이런 일이... 꿈만 같아... 그럼 우리 정말로 이걸 타고 여왕의 묘실까지 갈 수 있는 거야?”

“뭐... 도중에 또 문제가 터지지 않는다면. ...왜, 무슨 일 있어요 니아 님?”

“으음... 그게 초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와락 달려든 아리엘과 살갑게 끌어안던 도중, 니아가 슬금슬금 손을 들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난처하게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 마나가 모이는 건 좋지만 너무 찔끔찔끔 차올라서 이대로라면 일주일이 지나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 정도의 마력을 보충할 만한 수단이 있을 리도 없고...”

“아 그건 걱정 마세요.”

마나 저장 탱크라는 단어를 보고 떠오른 게 있으니까.

나는 슬며시 품에서 홍옥을 꺼내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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