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8화 〉 여왕의 안치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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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여왕의 안치실 #6
“주인님...! 저기 돌출된 지형이 보입니다!!”
“그래, 이제 다 도착했나 보네.”
느릿하게 하늘을 유영하는 배를 타고 나아간 지 적잖은 흘렀을 무렵, 저 멀리서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바위 선착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슬슬 기지개를 켜며 벗어두었던 로브를 어깨에 걸쳤다.
“자, 그럼 다들 이제 내릴 준비 하자! 여기가 바로 이번 여정의 중간 종착지니까 조금만 더 힘내고. ...듣고 있어?”
“응? 뭐라고 도란? 그보다 저기 발광 이끼 반짝이는 것 좀 봐!! 꼭 은하수 속을 헤엄치는 것 같아.. 너무 멋지다...”
“응응! 그리고 저어~기 바닥도 보여?! 우리가 저렇게나 복잡한 미로를 해쳐왔단 말이지? 구불구불하고 빼곡한 게 꼭 마법사의 뇌를 박제해 놓은 것 같지 않아?!”
됴란! 됴란!!
“으으... 박제고 자시고 빨리 도착이나 했으면... 언니들은 걱정도 안 되세요? 이러다가 갑자기 콱 하고 추락하면 어쩌려고...!!”
“에이... 그러면 소년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보다 라디도 빨리 와서 같이 구경하자! 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경험은 어디 가서 못 한다구? 모처럼 살면서 딱 한 번밖에 없는 이벤트인데 아깝잖아!”
“전 이미 두 번째거든요?! 그리고 하나도 안 아까워요!!”
“....”
나는 직방으로 바람을 맞느라 벌겋게 상기된 채 경치를 감상하는 일행에게서 피식 고개를 돌리고는 해일이와 메라를 다독이며 말했다.
“너희도 슬슬 준비해. 익숙한 곳이지? 우리가 만났던 곳이니까.”
푸르릉!
케릉...!
두 마물이 정겹게 내 뺨에 얼굴을 비볐다.
조금 더 나아가 범선의 속도가 줄어들고 갑판 위에 불던 바람이 잦아들 무렵, 선체 아래로 부드러운 충격이 느껴지더니 배가 선착장 앞에서 멈추었다.
부잔교 대용으로 덩굴을 소환해 배와 바위를 연결하고 먼저 하선하자 기묘한 광경이 시야에 내비쳤다.
‘꼭 노아의 방주라도 보는 것 같네...’
피난민처럼 제각각 배낭이나 술독을 짊어지고 빨빨거리며 배에서 빠져나오는 개미 떼, 아홉 개나 되는 머리를 이끌고 뒤뚱뒤뚱 덩굴 위를 걷는 해일, 고양잇과 동물답게 날렵히 갑판에서 뛰어오르는 메라와 녀석들에 섞여 들뜬 표정으로 배에서 내리는 일행 등.
우유죽처럼 창백한 얼굴로 갑판을 끌어안고 버티는 라디를 재빨리 덩굴로 옮겨주자 아리엘이 내 허리를 껴안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외쳤다.
“도란! 정말 너무 환상적이었어!! 이렇게 거대한 범선을 타고 하늘을 날다니... 고마워..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줘서...”
“뭘... 나야 암호 좀 푼 게 고작인데. ...니아 님도 마음에 드셨어요?”
“응! 진짜 최고야!! 우리 이따가 한 번 더 타자!!”
“안타깝지만 이제 가봐야 해요. 언젠가 기회가 또 있을 테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요.”
“그래...? 우음... 아쉽네에...”
나는 아직도 반짝반짝하는 비행의 여운에 잠겨 꿈에 젖은 듯한 눈망울로 미궁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니아와 언젠가 또 라는 말에 화들짝 귀를 움찔하는 라디를 일으켜주고 발길을 옮겼다.
한데...
전방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사방에서 금빛 횃불이 불타오르더니 웅장한 인공 구조물이 자태를 드러냈다.
“......”
여왕의 안치실.
베라스틴의 성문을 웃도는 크기의 문. 불가사의한 광택이 흐르는 석재 표면. 마차 크기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초석.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묘실의 입구가 뚜렷한 명암과 색조를 더해감에 따라 웅성거리던 바람이 숨죽였다.
물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와 색채를 상실한 세상 속, 나는 규모에 압도되어 말문이 막힌 일행을 돌아보며 고했다.
“...저기가 바로 여왕의 묘실이야. 이 미궁의 최심부이자 최상단, 우리가 줄곧 목표했던 곳.”
또한 해묵은 세월의 비밀을 풀어줄 단서가 있는 곳.
나는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폐부로 들이차는 묵직한 공기와 옷깃 사이로 스미는 정체 모를 오한,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엄숙함을 감내하며.
중량감마저 느껴지는 탁한 공기를 헤치며 전방의 유일한 구조물로 향하자 틱틱거리는 횃불의 소음이 귓전을 맴돌고 밀도 높은 적막이 호흡을 괴롭혔다.
짓눌러 터질 듯한 위압감을 무릅쓰며 마침내 묘실 입구에 도착해 올려다보자 거대한 석문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오밀조밀하게 채운 부조가 보인다.
하릴없이 부조를 응시하고 있자니 아리엘을 비롯한 일행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저 조각상 받침대에 해일이와 메라가 봉인되어 있었던 거구나... 뭔가.. 신기하네...”
“되게 웅장한 곳이다...! 조금 섬뜩하기도 하고... 그럼 저 문 너머가 묘실인 거야?”
“네, 아마도요. 하지만 그 전에...”
조용히 눈짓하자 그녀들도 석문에 새겨진 부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들판을 달리는 늑대와 엘프, 요리하는 천사와 쥐 수인, 함께 춤을 추는 고양이와 인간 등.
이외에도 날개를 지닌 마족이나 새끼 히드라 등이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이 뛰노는 모습...
마치 일상을 표현해놓은 듯 너무나 평범한 그림이다.
당시에는 이 부조가 의미하는 바를 몰랐지만
“...나만 그런 생각하는 거 아니지?”
“아무래도... 그렇죠.”
“실비의... 과거? 하지만 저 쥐 수인이나 히드라는... 낯이 익은데...”
“.....”
살며시 그녀들을 끌어당겨 어깨를 맞대고 부조를 올려다봤다.
부조 외곽을 장식한 수많은 인파의 중심에서 유독 크게 묘사된 남녀와 마물. 이는 분명 우리의 과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테지만...
“...너무 낡은 데다가 습기에 부식돼서 자세히 식별하는 건 무리겠어요. 그래도 대충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저 고양이는 실비를 상징하는 것 같고. 같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인간은 가슴이 부푼 걸로 보아 여성... 같은데? 천사는 아리엘이 아닐까 하고...”
“아리엘 언니가... 천사요?”
“응, 그게... 실비한테 들은 내용이 있는데 이따가 설명할게. 확실한 건 아니라, 뭔가 상징적 의미가 있는 걸 수도 있...”
“소년! 이거 봐봐!! 여기 나도 있다?! 여기 이 새끼 키메라 타고 있는 거 보여? 이 얼룩덜룩한 표범 꼬리는 영락없이 내 꼬리잖아!”
“...그러네요.”
부조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누군가 내 머릿속에 끓는 기름을 엎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심경이 복잡해졌다.
과거가 반드시 되풀이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으음... 어렵네... 그럼 일단 여기 전원은 이 그림에 묘사되어 있다는 건가...? 란이는 안 보이는 것 같지만...”
“그럼 이 부조에는 있지만 지금 곁에는 없는 인물도 누굴지 신경쓰이네요... 예컨데 이 늑대라던가... 아니, 이거 혹시 울시 아니에요?”
“글쎄... 울시는 눈이 네 개잖아. 반면 여기 이 늑대는 눈이 두 개... 아니, 완전히 현재 모습과 같다는 보장은 없나...”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아는 건 이전에도 우리가 모종의 관계로 묶여있었다는 것뿐이니까.
한데 울시보다 조금 더 전, 늑대와 얽힌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었지...?
이마를 짚으며 기억을 반추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난감하게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왜 도란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겠네... 이 부조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구나... 근데... 이중에서 도란은 어디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도란님이 없을 리가 없는데...”
“잠깐! 혹시 이 남자 아냐?! 여기 바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사람!”
“어디 보자... 아니, 이 사람은 마족이잖아요. 귀도 살짝 뾰족하고, 작지만 머리에 뿔도 나 있고...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아, 아무것도 아냐 도란!”
“....?”
순간 아리엘의 반응이 미묘해 미심쩍게 쳐다보자 그녀가 황급히 손바닥을 내저으며 얼버무렸다.
다시 눈앞의 그림으로 시선을 돌리자 라디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대전쟁 이전에는 악마와 인간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고 해요. 주기적으로 사절이 오가고 종종 무역까지 이뤄질 정도로...”
“그래, 그건 나도 예전에 들었어. 대전쟁 때 서로 대판 싸운 것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고. 그렇다면 이 벽화가 만들어질 시기에 마족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인데...”
“맞아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 이 마족 여성분은 누구일까요? 저희와는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인데... 악마지만 어쩐지 고귀한 느낌도 조금 나고, 살짝 여리여리한 게 아리엘 언니와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 도란님...?”
“.....”
순간, 내 시선이 부조에 못 박힌 듯이 고정되었다.
벽화에 그려진 마족 여성의 외모가 내 기억 속 인물과 거의 일치했기에.
‘아가씨...?’
왜 이 사람이 이곳에...
“.....”
라디가 무심코 새어 나온 내 말을 들었는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시는 분이에요?”
“아, 아니...! 안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 아니 몰라!”
“...내가 모르는 도란의 지인이면 나랑 베라스틴에서 만나기 전일 테고... 숲에서 나온 뒤, 반년 사이에 만났던 사람이야?”
“아니 근데... 마족이면 애초에 마계 대륙에서 살잖아요. 그러고 보니 도란님은 마계 대륙과 인접한 동쪽 해안 마을에 들른 적이 있다고 했었고... 설마 도란님이 반년 동안 방황했다는 곳이 그곳이었어요...?”
“아, 아냐! 그냥 말이 헛나온 거야! 그, 그보다 실비야!! 어떻게 하면 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알겠어? 이 안으로 들어가야 유해를 확인하든가 할 텐데...”
전에는 이곳에서 막혀 포기했었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피하고 실비를 돌아보았다. 녀석이 이 석문을 돌파할 단서를 찾아내기를 바라며.
한데...
“.....”
“실비야...?”
실비는 평소와 조금 다른 태도로 홀린 듯이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주시하자 녀석의 연한 입술을 비집고 호수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 적 있습니다.”
“본 적이 있다니... 이 문을?”
“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꿈에서 이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문을 여는 데에는 성공해도 들어가려는 순간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
실비가 천천히 걸어가 문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트롤 수십 마리가 밀어도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거대한 석문이 거짓말처럼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녀석이 날 돌아보며 슬프게 미소지었다.
“같이... 확인해주시겠습니까? 주인님...”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묘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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