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화 〉 해일과 메라 그리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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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해일과 메라 그리고... #1
“그럼... 이제 슬슬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 앞에 서서 난감하게 유적을 돌아보았다.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전처럼 왕의 묘실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했고, 여왕의 안치실에서 더 찾을 만한 단서가 있는지도 샅샅이 훑어봤고, 짐도 모두 챙겼는데...
푸르릉...
끼잉... 낑...
이별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짐작하고 실비에게 안겨서 구슬피 우는 해일이와 메라를 보고 있자니 착잡한 심정이다.
녀석들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 걸 알았으니...
‘괜히 나도 미안해지네...’
결국 이 녀석들은 나 때문에 마음껏 들판을 뛰놀지도 못하고 수백 년이란 세월을 봉인되어 있었다는 뜻 아닌가?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고, 해일이와 메라도 개의치 않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애석한 눈길로 두 녀석을 응시하자 니아가 곁으로 다가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년... 우리 진짜 가는 거야...? 해일이랑 메라 내버려 두고...?”
“...아쉬워요?”
“응... 이제 막 정들려던 참이란 말야... 게다가 날 보고도 피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마물이기도 하고...”
“.....”
딱한 눈길로 니아를 내려다봤다.
나도 두 녀석과 떨어지는 건 싫다. 나란들 시골 강아지처럼 똥꼬발랄하게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마물을 싫어할 리 없으니까.
원래 해일이와 메라는 이곳에 있을 애들이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냥 우리가 데려갈까?”
“뭐...? 그, 그래도 돼 소년?!”
“정말이야 도란...?”
“그래, 어차피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언젠가 굶어 죽을 게 뻔하거든. 얘네들이 사는 곳에 가봤더니 무슨 보존식 같은 걸로 연명하고 있더라고.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 돌덩이 같은 고기로... 이대로 놔두면 불쌍하잖아.”
만약 해일이와 메라가 우리를 따라와 준다면 말이지만.
슬쩍 쳐다보자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두 녀석이 재빨리 시선을 교환하고는 실비를 등에 업고 뒤뚱뒤뚱 출구로 다가왔다. 놈들도 우리와 떨어지기 싫었던 모양.
‘다행이네...’
이곳에 남겠다고 하면 깔끔하게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더 이상은 유적에 미련이 없나 보다.
하기야, 녀석들의 원래 목적은 실비를 수호하는 것인 만큼 이제는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여전히 여왕의 옥체가 남아있긴 하지만 실비가 부활한 마당에 이곳에서 주구장창 지내는 것도 미련한 짓이고.
하지만 녀석들은 S등급 마물인 만큼 이대로 사람들 앞에 데리고 나갔다간 어마어마한 소란이 벌어질 텐데...
막대한 녀석들의 식사량을 우리가 매번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일이와 메라를 데려가기로 결정한 이상 어떻게 처우할지 대책을 고민하고 있자니 문뜩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잠깐...! 그러고 보니 너희 저번에 요상한 기술 쓰지 않았어?”
푸르릉?
크릉?
“아니, 그... 그림자 속을 이동하는 거 말야! 그거 혹시 계속 그림자 속에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어?”
푸르릉! 프릉! 픙!
크륵! 큭!
“으음...? 뭐라는 건지...”
“저...”
열심히 뭔가를 주장하는 해일이와 메라를 난처하게 올려다보자 실비가 조용히 손을 들고 말했다.
“오래 머무는 건 무리고... 한 십오 분가량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림자 속에는 공기가 없어서 계속 숨을 참아야 하는 모양이에요...”
“뭐야, 실비 너 얘네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어?”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것참 편리하네. 그나저나 십오 분이라...”
활용하기에 따라선 클 수도 있지만, 절대적으로 긴 시간은 아니다.
“...그럼 혹시 그림자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는 건? 그건 가능해?”
푸르릉...! 푸릉!!
케르릉...
“...답답하긴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래...?”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란데...
막막하게 돌바닥 위로 늘어진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뭔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두 녀석의 식량 문제도 해결할 방법이...
턱을 짚고 수심이 진 얼굴로 고민하던 차, 해일이와 메라는 어두운 내 표정을 보고 눈빛을 교환하더니
푸릉... 풍! 푸르륵...!!
케르릉! 켕 케륵!
“...뭐야, 얘네 지금 뭐라 한 거야?”
“저, 그게...”
실비가 두 마물의 말을 유심히 귀 기울여 듣더니 살짝 놀란 기색으로 대답했다.
“...해일이와 메라는 저와 이어져 있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 그림자를 통해 나타날 수 있는 모양입니다. 듣자 하니 과거의 주인님이 절 보호하기 위해 걸어놓은 술식이라고...”
“뭐야, 그런 능력도 쓸 수 있었어? 엄청나잖아.”
“예... 다만 만능은 아니고 반발력에 의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 있던 곳으로 쫓겨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제약이 많은 힘 같습니다.”
“하기야... 아무리 어린 개체라고는 해도 히드라와 키메라를 그렇게 쉽게 소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설마 이전에 작별할 때 녀석들이 꼬리로 그림자를 가리켰던 게 그런 뜻이었나.
나뿐만 아니라 실비도 안디라 님의 축복을 받았고, 해일이와 메라는 실비의 사역마 비슷한 존재들이니 그림자에 관련한 능력을 지녔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요지는 그걸 어떻게 써먹는지인데...
턱을 짚고 숙고하던 차
“으음...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그래, 말해봐 라디야.”
“그... 혹시 해일이와 메라를 던전 어딘가에다가 풀어놓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불러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도란님이 개미를 소환해서 적재적소에 부려먹는 것처럼...”
“...필요할 때마다 불러서 쓴다고?”
“네, 이곳은 먹이도 풍부한 데다가 해일이와 메라 정도의 마물이면 적응하는 데도 무리가 없을 거예요. 거기다가 실비를 통해서 필요할 때만 불러낼 수 있다면 저희가 평소에 먹이를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고요.”
“오... 그거 진짜 괜찮은 생각인데? 하지만 그럼 어디에다가 풀어놓지...? 모험가가 많이 왕래하는 하위 계층에다가 풀어놨다간 목격담이 속출할 텐데... 자칫하면 토벌대에게 퇴치당할 수도 있...”
“아! 그건 내가 적당한 장소를 알아!!”
순간 니아가 화색하며 달라붙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외쳤다.
“6계층!!”
“6계층이요...?”
“응! 어차피 소년은 7계층에 볼일이 있다고 했잖아! 가는 길에 풀어놓고 가는 건 어때? 거긴 사람도 얼마 안 오는 데다가 사방이 첩첩산중이라 작정하고 숨으면 아무도 못 찾거든!”
“으음... 6계층이라... 네, 그거 좋은 생각 같아요. 그럼 일단 가면서 얘기할까요?”
“그래!!”
푸르릉!
크릉...!
됴란!!
우리는 웃으며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
“이야... 도착했네. 이게 얼마만의 밖이냐...”
“소년!! 저기 봐! 하늘이 뚫려있어!! 바람도 시원하구...”
“도란...! 여기 구름 흘러가는 것 좀 봐...!! 이런 광경은 처음이야...”
“여기도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운치 있네요...”
협소한 통로를 지나 야외로 나오자 놀라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딕풍 건축물의 첨탑처럼 뾰족뾰족한 바위와 구름의 조화. 높다란 바위산에 걸린 새하얀 층운이 시야를 적시고, 시원한 안개가 뜨거운 열기와 모래바람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다.
이곳도 또한 지하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절경.
여느 때와 다름없는 2계층의 풍경이다.
나는 개미가 짊어진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펼치며 말했다.
“어디 보자... 암시장이 있는 3계층으로 갈려면... 저기 저 둥근 바위가 있는 쪽으로 가면 되나?”
“잠깐만요, 저도 지도 좀 보여주세요!”
“나도 나도!”
“....”
피식 웃으며 라디와 니아에게 지도를 보여주었다.
두 녀석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더니 동시에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면 되겠네요.””
“...그래?”
“네, 저쪽 지형이 험난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인적이 드물 거예요. 마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타인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 저희로서는 최적의 루트고요.”
“맞아! 그리고 거리도 훨씬 짧거든! 우리라면 험난한 지형이라도 쉽게 돌파할 수 있을 테고!”
“...알았어요. 그럼 그쪽으로 한번 가볼까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쩍 쌀쌀해진 기온에 두꺼운 로브로 갈아입고 바위산을 거닐자 우리의 등 뒤로 신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해일과 메라, 사슴뿔 개미가 뒤따랐다.
한데...
“...왜 실비야, 혹시 할 말 있어?”
“저... 그, 그게...”
어쩐지 실비가 안절부절못하며 우리가 지나온 방향을 흘겨보았다.
아리송하게 쳐다보자 녀석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기... 정말로 묘실 내부에 있던 보물을 하나도 안 가져오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황금이나 보석 등 가치 있는 물건이 잔뜩 있었는데...”
“아 그거?”
나는 씨익 웃으며 실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왜, 실비는 많이 아쉬웠구나?”
“그, 그야 당연히...! 그 정도의 재보면 평생 먹을 분량의 보리빵을 사고도 남을 텐데...!”
“괜찮아. 이제 돈이라면 썩어나도록 많이 있으니까. 아예 연고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그 보물은 과거의 실비와 함께 부장한 거기도 하고.”
“.....”
“뭐, 나중에 정 필요하게 되면 그때 꺼내다가 써도 되지 않을까? 뭣하면 당사자한테 물어봐도 되고. 네 무덤에서 황금 좀 덜어내도 되냐고.”
그 말대로, 나중에 여왕을 다시 만났을 때 묻고 결정해도 되는 일이다.
고인(살아있음)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부장품을 가져오는 건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솔직히 양심에 찔리니까.
결국 우리가 묘실에서 가지고 나왔던 건 일기장 하나랑...
.....
배낭 사이로 삐져나온 토끼 인형을 보고 어렴풋하게 미소짓자 아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저 인형은 왜 가져온 거야 도란? 다른 것도 많았잖아. 더 가치 있는 물건도 있었고...”
“그냥... 왠지 내가 직접 다시 전해주고 싶어서. 여러모로 추억이 깃든 물건이잖아. 그리고 건네주면서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그래...? 으음... 도란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래도 이번 일로 하나 깨달았어.”
“...뭐 말이야?”
“뭐긴, 도란도 다 알면서. ...정말 모르겠어?”
“....?”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리엘이 내 옆구리를 꼬집으며 짐짓 째려보았다.
“카렌 말야 카렌! 실비의 일기장에 카렌도 나와 있었잖아! 대체 도란은 전생에 여자를 몇 명이나 꼬시고 다닌 거야...!!”
“하하...”
“...맞아요. 그리고 카렌 님 외에도 또 있었죠. 도란님의 홍옥이 무려 드래곤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거였다던가, ‘타로’라고 불렸던 늑대와 ‘루베리아’라는 여성의 존재... 아마도 그분이 벽화에 그려져 있던 마족이 아닐까 하는데...”
“아, 그거 루베리아가 아니라 루벨리아라고 읽는 거야.”
“네?”
“마족 이름은 우리보다 음절이 훨씬 더 많잖아. 그래서 보통 부르기 쉽게 줄여서 말하거든. 그래서 실비가 일기장에 옮겨 적다가 표기를 실수한 게 아닐까 하는데...”
“네...?”
“...도란, 그 루벨리아라는 여성이 누군지 알아?”
“....아니, 뭐 그냥 그렇지 않을까 해서.”
“솔직하게 말해. 너 뭔가 숨기고 있지.”
“...글쎄다.”
나는 로브를 고쳐매며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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