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 해일과 메라 그리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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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해일과 메라 그리고... #2
“...도란님, 일어나세요. 다 도착했어요.”
“으음... 오 분만 더 잘래...”
“도란, 일어나. 벌써 날이 밝았어. 얼른 쉴 곳을 찾아야지.”
“뭐... 벌써...? 으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아내고 졸린 눈을 껌뻑거리고 있자니 허리춤에서 팽팽한 장력이 느껴졌다.
노래기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묶어 고정해둔 밧줄을 풀어내고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푸렴푸렴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이 보인다.
노래기를 타고 밤중에 던전을 가로지르던 도중,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
그새 황량한 바위산 지대를 지나왔는지 곳곳에 돋아난 식생에 이질감을 느끼며 눈꺼풀을 비비자 실비가 정성스럽게 수통을 열어 내게 건넸다.
“아, 고마워... 너희도 한숨 자고 일어난 거야?”
“저는 깜빡 졸았지만, 안주인님들은 전부 깨어계셨던 듯합니다. 라디 님은 승차감이 불편하셨던 모양이고, 아리엘 님과 니아 님은 경관을 감상하느라...”
“...그래?”
“네, 그렇게나 요동치고 바람이 나부끼는데 대체 어떻게 잠드실 수 있는 거예요...? 게다가 도란님은 가장 많이 흔들리는 머리 부분에 타셨잖아요...!”
“뭐... 한창때는 행군하면서 잔 적도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약과지. 그보다... 으윽...! 슬슬 준비해볼까... 중간에 맞닥뜨린 사람은 없었지?”
우옹.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이제 들어가서 쉬어.”
기지개를 켜며 노고를 치하해주자 노래기가 정숙하게 인사하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해일이와 메라를 6계층까지 데려가기로 결정한 이상 불필요한 소란은 자제하는 것이 상책인바, 일단 붉은 매 길드 주둔지에 도달하면 녀석들을 외부로부터 안전하게 숨길 수가 있다.
그런고로 다른 모험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야음을 틈타 이동하기로 한 것인데...
“어디 보자... 그러니까 지금 지도에서 현재 위치가...”
“여기야 소년! 요 중앙의 검은색 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 어딘지 알겠어?”
“아... 네, 알 것 같아요.”
그야 모를 리가 없지.
라디를 눈앞에서 놓치고 영영 사별할 뻔했던 바로 그 절벽인데.
어째 아까부터 라디오 잡음 비슷한 소음이 귓전을 먹먹하게 메우는가 싶더니 폭포에 인접해서 그런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배낭을 주워들고 발길을 돌렸다. 암시장에 도달하려면 절벽에 놓인 다리를 통과해야 할 터, 다시 날이 저물 때까지는 이 근처에서 머물며 시간을 때울 예정이다.
이제부터는 인적이 잦아지니 해일이와 메라에게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명령하고는 술독을 운반할 최소한의 개미만 남겨놓고 걷다 보니 머잖아 시야가 탁 트이는 지점이 나왔다.
아리엘이 내 팔을 잡아끌며 외쳤다.
“와 도란! 저기 봐!! 엄청나게 큰 폭포야!!”
“그러네...”
거대 낭떠러지.
신이 창을 내찔러 지상을 꿰뚫은 듯 광활한 대지 한가운데 난 거대한 구멍. 사방에서 막대한 양의 담수가 흘러드는 구덩이 안쪽은 명계의 타르타로스가 연상될 만큼 검었고, 사방으로 크고 작은 협곡과 골짜기가 뻗어나가 장관을 이루었다.
또한 거친 물살이 쏟아지는 폭포로부터 제법 떨어진 절벽과 절벽 사이에는 우리가 목표했던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여긴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붐비네...’
모험가들이 많이 거쳐 가는 병목 지점인 만큼 다리 근처에는 무수한 텐트가 늘어서 있고, 새벽에 가까운 이른 시간임에도 드문드문 활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데...
“으음...? 도란, 저기 땅 위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움푹 파여 있는데 저건 뭘까? 혹시 천장에서 바위가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어디어디?! 음...? 그러네... 저건 내가 던전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없었... 아, 설마...?”
“왜요 니아 언니?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으응... 그러니까 예전에 붉은 매 길드 보고서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니아가 말끝을 흐리며 날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겸연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래, 저거 내가 한 걸 거야. ...아마도.”
“뭐...? 도란이 저 크레이터를 만들었다고...? 대체 어떻게...”
“그게... 실은 나도 잘 몰라.”
“으응...?”
“그게... 막상 난 그때의 기억이 없거든. 여러 목격담으로 보아 내가 했다는 건 확실한데... 아리엘, 너도 어쩌다가 라디가 절벽에서 떨어졌는지는 들었지?”
“응... 야영중에 도적이 나타나서 싸우다가 괴수가 등장하고... 위기에 빠진 도란을 구하기 위해 적을 끌어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아리엘이 안타까우면서도 고마움이 담긴 눈길로 라디를 쳐다보았다.
나는 살며시 라디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 뒤로는 나도 정신을 잃었는데 아마 그때가 최초로 안디라 님의 권능을 발현한 순간이 아닐까 해. 이전에 지하수로에서 만났던 왕실 쪽 사람 기억하지? 로닌이 내가 개미와 덩굴을 부리는 모습을 봤다고 했거든. 저 크레이터는 내가 괴수의 브레스를 막아내다가 생긴 거...”
어?
“왜 도란?”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 보니 그때 브레스를 쐈던 마물이...
라디의 귀를 어루만지며 숙고하고 있자니 녀석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텐트부터 쳐요. 밤새 뜬눈으로 달려왔더니 피곤해서... 해일이와 메라가 숨을 만한 곳도 마련해야 하니까 조금 번거롭더라도 모험가들로부터 꽤 떨어진 잡목림 안에 거처를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사람들이 슬슬 깨어나기 전에 빨리 움직이자. 안 그러면 저 항아리들을 전부 직접 옮겨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서두르자!!”
“.....”
우리는 마저 발걸음을 옮겨 절벽으로부터 꽤 떨어진 산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림자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채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해일이와 메라를 데리고 나무 사이를 걷다 보니 적당한 공터가 나왔다.
이 정도 들어왔으면 왕래하는 모험가도 별로 없을 테고 설령 접근하더라도 미리 감지할 수 있을 터, 나는 발로 땅을 다지고 배낭에서 라이트메탈 재질로 된 지지대와 방수포를 꺼내들었다.
한데...
텁.
“뭐야, 왜?”
“...텐트 세우고 모닥불 피우는 건 저희가 할 테니 도란님은 모험가들한테서 먹을 걸 좀 구해오세요. 이대로라면 조금 모자랄 것 같아서요.”
“아... 하긴... 알았어.”
해일이와 메라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지면서 비축해놨던 식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암시장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에도 소규모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는 바, 조금 비싸긴 해도 돈을 지불하면 쉽게 먹거리를 구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같이 전우조로 활동할 사람이 한 명쯤 필요하다는 건데...
“...같이 가줄 사람 있어?”
“같이 다녀올 사람? 평소처럼 실비랑 같이 보내면 되려나...”
“으음... 그렇게 하자! 소년이랑 같이 데이트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야 공평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를...”
“잠깐!”
““....?””
언제나처럼 실비가 후보로 좁혀지려는 찰나, 라디가 막아세웠다.
모두가 의아하게 돌아보자 녀석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공.평.하.게. 제비뽑기로 하죠.”
“으응...? 왜 갑자기...”
“제비뽑기로, 하자고요.”
“....”
어쩐지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라디의 태도에 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대나무 통에 제비를 넣고 섞으며 말했다.
“끄트머리에 색을 칠해둔 막대기를 하나 넣어뒀으니까 당첨 제비를 뽑은 사람이 도란님이랑 함께 가는 거예요. 혹시 모를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제비 통은 제가 들고 있을 거고, 저는 마지막에 남은 제비를 뽑는 걸로 할게요.”
“으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알았어.”
한숨을 내쉬며 수긍하고 물러섰다. 지난번 니아가 주장한 ‘소년 독차지하기 없기!’가 이젠 실비한테도 해당하는 모양.
라디가 막대기를 통에 넣고 뒤섞자 한 명씩 다가와 눈을 가리고 제비를 뽑았고...
“으음... 내 건 아니네. 아쉽다...”
“...제 것도 아니네요. 그렇다면...”
“저... 여기에 빨간 칠이 되어있는데... 혹시 이게 당첨 제비입니까...?”
“.....”
실비가 끄트머리에 붉은 칠이 된 제비를 들고 난감하게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숙이고 막대기를 도로 통에 넣으며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 저는 남아서 텐트를 칠 테니 안주인님들끼리 다시 제비를 뽑는 게...”
“아냐아냐, 실비는 정당하게 쟁취했는걸? 우리 눈치 볼 필요 없어.”
“하아... 그래, 기왕 당첨됐으니까 느긋하게 있다 와. 사람들 많으니까 후드 꼭 쓰고.”
“저... 정말로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다른 분들이 주인님과 함께 가시는 게...”
“괜찮아. 어차피 실비도 도란하고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을 거 아냐? 천천히 놀다 와.”
“...대신 도란님이 딴 길로 새지 않게 확실히 고삐를 붙잡아야 해. 알았지?”
“그... 가, 감사합니다 아리엘 님! 라디 님...!”
실비가 라디와 아리엘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눈물을 찔끔 흘릴 기세로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단순히 먹거리를 사러 가는 것 치고는 꽤나 싱숭생숭한 분위기인데 뭔가 여자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시그널 같은 게 있는 걸까?
한데...
“어...? 내가 뽑은 제비도 빨간데 이거 당첨 제비 아냐?”
“음...?”
니아가 뽑은 제비에도 붉은 칠이 되어있었다.
빤히 쳐다보며 설명을 촉구하자 라디가 난처하게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으, 으응...?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 한번 줘보세요...!”
“자.”
“.....”
라디는 한참이고 니아가 뽑은 제비를 들여다보더니
“으음... 아, 아무래도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실수?”
“네, 제가 깜빡하고 당첨 제비를 두 개나 넣어버린 모양이라... 어떡하죠...? 다시 뽑기도 곤란한데 도란님이 실비와 니아 님 둘 중에서 같이 갈 사람을 고르는 게...”
“.....”
큰일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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