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 해일과 메라 그리고... #4
* * *
[353] 해일과 메라 그리고... #4
“...죽겠다.”
니아의 왕성한 호기심에 어울려주기를 한참.
간만의 데이트에 신난 그녀에게 맞추다 보니 주말에 아이들을 놀아주는 아버지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것 같다.
그녀가 잠깐 즉석 공연을 둘러보러 간 사이, 녹초가 된 채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유유적적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보자 실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니아 님은 뭐랄까... 정말이지 활력이 넘치는 분이시군요. 같이 있기만 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가끔은 살짝 과할 때도 있지만...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나한테는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야. ...지금이야 우리와 허물없이 지내지만 원래는 말을 붙이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데, 알아?”
“예, 어마어마한 하이랭커라고 들었습니다. 굉장한 무력에다가 재력은 물론, 외모까지 출중해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고... 이전에 아리엘 님과 베라스틴에서 장을 보다가 지나가는 모험가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 말대로, 내겐 과분한 사람이다. 본디 살면서 한 번 얼굴을 맞대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래도 이전 생부터 인연으로 묶여있었던 걸 보니 내가 니아와 만난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지만...
‘설마 운명의 신 그런 것도 있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제우스조차 어쩌지 못했던 운명의 세 자매가 등장하니 이곳에도 그런 부류의 신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과거의 인연이 한 명 한 명씩 모여가는 걸 보면 분명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멀찌감치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험가들을 응시하며 고민에 빠져있자니 문뜩 옆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실비야, 궁금한 거라도 있어?”
“저기 그게... 그렇습니다. 니아 님에 관련된 건데...”
“뭔데? 편하게 말해봐.”
“예... 사실 모험가들로부터 전해 들은 니아 님은 밝고 귀여운 성격이지만, 사람들과 깊게 교류하지 않고 이성에는 관심이 전무하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본 니아 님의 인상하고는 너무 달라서...”
“아... 그거...”
니아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탓에 살짝 속이 뒤틀린 감이 있으니까.
나와 만나고 나서부터는 점점 나아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난처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음... 니아도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나랑 교제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도 했고... 마냥 과거가 밝지만은 않아. 이건 내 입으로 말할 내용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그렇군요...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십니다...”
“...뭐가?”
“그냥... 모든 게 말입니다... 타인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마음씨나... 몸을 맡기고 있으면 어떠한 걱정도 사그라드는 손길... 따스하게 마음속에 녹아드는 눈웃음이나... 또...”
“또?”
“.....”
상체를 기울이며 미소짓자 실비가 의표를 찔린 듯 멈칫하더니 뺨을 붉히며 뒷말을 삼갔다.
당황한 실비의 시선이 갈팡질팡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 그... 담대하지 않습니까! 사실 처음에도 주인님을 보고 제일 신기했던 게 어떻게 검은 머리로도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는지... 솔직히 전 아직도 사람이 많은 곳은 거북해서...”
“음... 그거?”
솔직히 나도 아직 아예 태연한 건 아닌데...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도 원래는 항상 투구로 감추고 다녔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벗게 됐는데... 사실 니아 덕이 컸지. 투구를 빼앗겨서 반강제로 벗고 사람들 앞으로 나섰는데 의외로 반응이 나쁘지 않더라고.”
“그렇... 습니까?”
“그래, 사실 니아가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까 다들 아무 말도 못 한 거지만... 그래도 그동안 쌓아놓은 게 있으니까 이제 베라스틴에서는 다들 호의적으로 대해주더라. ...물론 이런 곳에서는 얄짤없고.”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리 의연하게... 반면에 저는 이렇게 태어난 스스로를 무척 원망했는데... 그저 하루하루 연명할 뿐인 나날에, 굶주린 나머지 행인의 지갑을 소매치기하거나 빵을 훔친 적도 있고...”
“....”
실비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불안불안하게 털어놓으며 날 직시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실비의 눈동자는 날카로운 두려움으로 젖어있었다.
자신의 실체를 깨달으면 환멸당하는 게 아닐까, 버림받는 건 아닐까 하며 겁먹으면서도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괴로워하는 듯한 시선.
...내가 한 짓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순간, 어깨를 움츠리고 풀이 죽은 실비의 옆모습이 지구의 여동생과 겹쳐 보였다.
나는 부드럽게 거리를 좁히고 실비를 토닥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 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폐인처럼 지냈는걸?”
“그렇습니까...?”
“그래, 사람들은 날 보며 손가락질하지.. 죽기살기로 일을 해도 보수는 떼먹히고, 간신히 친해진 모험가는 내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하질 않나...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인간불신증에 걸려서 아무도 믿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줄곧 유령처럼 지냈지.”
“주인님이 말입니까...? 그보다 주인님의 등에 칼을 꼽으려고 했다니 그런 천인공노할...!”
“다 지난 일이니까 괜찮아. 아무튼, 그렇게 힘들던 시기에 말톤이라는 소중한 친구를 만나고, 걔가 라디를 소개해줬어. 내가 이 세계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라디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이 자리에 없을 거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렇군요... 라디 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종합하자면 결국 주인님께선 항상 올곧게 지내오셨다는 뜻 아닙니까...? 반면 전 도둑질 따위나 하며...”
“.....”
실비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다시 스멀스멀 죄책감이 피어오르는 모양.
원래 이 이야기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나는 자세를 다잡고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실비야.”
“네...”
“지금부터 하는 얘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예...? 안주인님들께도 말입니까?”
“라디와 아리엘, 니아 모두 모르는 내용이야. 약속 지킬 수 있겠어?”
“....”
실비가 섬짓 숨을 들이켰다.
녀석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살짝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전 언제든 주인님의 명을 받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만약 주인님이 명하신다면 그 어떤 요구도 기꺼이 응할 겁니다. 그것이 절 절망의 나락에서 구해주신 주인님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기에...”
“...아니,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데...”
나는 난처하게 뺨을 긁적이고는 실비를 바라보며 고했다.
“실비는...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어떻게 지냈는지 들었지?”
“...네.”
“한번 기억나는 대로 말해볼래?”
“예... 처음에 숲속에서 홀로 눈을 떴다가 그곳에서 일 년을 보내고... 반년가량을 떠돌이처럼 방황하다가 베라스틴에 정착해서 지금까지 모험가 생활을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하지만 나는 반년 동안 방황한 게 아니라 줄곧 마계 대륙에 있었어.”
“예...?”
찰나.
믿지 못할 걸 들은 듯 실비의 호박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잘못 들은 게 아님을 확인해주곤 손에 잡히는 잔디 뿌리를 뽑으며 묵묵히 말을 이었다.
“거긴 검은 머리 인간이 아니라 진짜 악마가 살아. 땅은 검고, 바람은 날카롭고, 곳곳에서 금속 가시가 달린 엉겅퀴가 자라. 나는 숲속에서 지내다가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마계 대륙으로 팔려 갔고, 거기서 반년을 보냈어.”
“어, 어째서 그곳까지...”
“비싸거든.”
“네...?”
“거기선 인간 노예가 비싸게 팔려. 특히나 너랑 나 같은 흑발은 더더욱. 그렇게 납치되어 온 인간들이 모여 사는 정착촌이 따로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하, 하지만... 대체 왜 마족은 비싼 돈을 들여서까지 인간을...”
“뭐... 용도야 다양하지. 관상용으로 구매하거나 하인으로 부려먹거나... 몇몇 변태 마족은 노리개로 이용하기도 하고... 싸움을 붙이기도 해. 그게 내가 본 마족들의 주 유희 중 하나였어.”
“싸움... 말입니까?”
실비가 조심조심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실비도 검투사가 뭔지 알지? 인간끼리 서로 죽이게 하거나 마물과 한 공간에 가둬놓고 칼 한 자루만 던져준 채 구경하는 거야. 그렇게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서, 마지막 최후까지 살아남은 다음에는 더 높은 몸값이 붙고, 더 까다로운 시련이 쥐어져. 그걸 죽을 때까지 평생 반복해야 해.”
“그, 그럼 주인님이 강한 이유 중 하나가...”
“....그래서 내가 악마를 싫어해.”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앞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점차 다가오는 침묵이 무서웠는지, 실비가 황급히 땅을 짚고 다급하게 외쳤다.
“하, 하지만...! 그러면 한 가지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뭐가.”
“그... 주인님께서 왜 그 사실을 안주인님들께 비밀로 하시는지... 방금 말씀대로라면 주인님은 휘말린 것일 뿐 잘못한 건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안타깝게 생각하면 생각할 텐데...”
“...나도 마냥 깨끗한 건 아니거든.”
“네...?”
“난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뭐든 했어.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말했듯이, 한 번 검투사가 된 이들은 영원히 시련에 맞서야 해. 검투사가 투기장 밖을 나서는 건 죽었을 때밖에 없어. 그런 내가 어떻게 이곳에 와 있다고 생각해?”
“.....”
말을 마치자 실비가 헛점을 찔린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이상의 대화는 껄끄러운바, 슬슬 파장하려는 찰나
“루벨리아...”
“...뭐?”
“일기장에 나왔던 여성... 주인님은 분명히 그 마족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혹시 도란님이 마계 대륙을 벗어날 수 있던 이유와 연관이 있는 거라면...”
“.....”
“아... 죄, 죄송합니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제가 주제넘은 발언을...”
“뭐... 괜찮아.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 그렇다면 정말로...?”
“그래, 하지만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어차피 지나간 일이야.”
안타깝지만 두 번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인물이기도 하고.
내가 다시 마계 대륙으로 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찰나
“소년!!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아, 니아 님. 궁금하던 건 전부 둘러보고 오신 거예요? 뭔가... 굉장히 신나 보이네요?”
“응! 이것 좀 봐봐 소년!! 내가 엄청 흥미로운 걸 찾았는데 말이야~!”
“이건... 이게 뭔데요?”
니아가 쏜살같이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니아가 다짜고짜 들이민 양피지를 의아하게 살펴보았다. 모양새로 미루어 신문은 아닌 것 같고, 전면에 검은 잉크로 빼곡하게 지형지물이 묘사된 걸로 보아...
니아가 발랄하게 외쳤다.
“거수의 은신처가 적힌 지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