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화 〉 해일과 메라 그리고... #5
* * *
[354] 해일과 메라 그리고... #5
“아, 돌아왔어 도란? 수고했어. 로브 이리 줘.”
“고마워, 꼬치구이하고 이것저것 잔뜩 사 왔으니까 뜨거울 때 먹자. 라디도 어서 일로 오고. 네가 좋아하는 달콤한 과일도 있어.”
“네, 근데 잠시 그 전에...”
“응...?”
라디가 다가와 내 옷깃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리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 했네...”
“뭐, 뭐가...?”
“뭐긴, 알면서 왜 물어요. ...니아 님,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해봤어요?”
“응,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해봤는데 특별한 건 없었어! 중간중간 도란이 실비를 쓰다듬고, 어깨를 끌어안고, 무릎을 꿇게 시키긴 했지만!”
“으음... 그랬어요? 그래도 단둘이 있을 때 관계가 발전하긴 했나 보네요. 며칠 전에는 손잡는 것조차 어려워하더니 이제 자연스럽게 끌어안을 정도면... 그리고 무릎을 꿇리다니... 뭐 그런 취향이었어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진지한 이야기를 앞두고 실비가 제멋대로...! 그, 그보다 모두 짠 거였어?! 제비뽑기부터 전부!?”
“당연하죠. 제가 언제 그런 거 실수하는 거 보셨어요? 도란님이 숨기는 게 있으니까 한번 캐본 거죠. 그냥 실비랑도 교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마디면 될 거를 꽁꽁 싸매고 감추니까...”
“.....”
맞는 말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실비가 과거의 연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도 알았겠다, 여왕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전적이 있는 라디를 비롯해 그녀들이 실비를 거부하진 않을 것 같지만, 아직 시기상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직 니아와의 관계도 확실하게 정립된 게 아니니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이미 진즉에 굳혔지만, 약 2주에 걸친 길드 무단결근, 독단 영주성 건 가담, 차후 길드 탈퇴나 활동 중단 가능성 등 많은 숙제가 남아있는 실정이다.
곧 마주할 대면식에서 붉은 매 길드의 수장인 아니스와 담판을 지을 예정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실비를 정식 연인으로 선포하는 건 니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지금도 실비가 눈치를 많이 보는데 대뜸 연애 사실을 공표했다간 내심 곤란해할 수도 있고.
...생각해 보니 실비와 이런저런 일도 하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하지 않았던가.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놈인지를 재차 실감하며 상인들로부터 사 온 먹거리로 허기를 달래고 있자니, 불현듯 아리엘에게 안겨 있던 란이가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됴란!
“응, 왜 란이야. 혹시 배고파?”
도리도리!
“그럼...”
됴란! 하양색...!
“아, 이거?”
품속에 넣어두었던 양피지를 꺼내자 라디가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그게 뭐예요 도란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뭐야? 약도?”
“음... 약도는 맞는데 조금 특별한 놈이야. 니아 님이 재밌는 걸 가져왔더라고. 한번 볼래?”
둘둘 말린 양피지를 잘 풀어 누름돌로 바닥에 고정하자 라디와 아리엘이 흥미롭게 살펴보았다.
라디가 양피에 그려진 기호와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건... 뭘 가리키는 거예요? 저희 근처에 있는 폭포가 묘사된 걸로 봐서 먼 장소는 아닌데...”
“그러게... 뭘까?”
“....”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거수의 은신처를 나타낸 거야.”
“거수... 잠깐, 거수요? 그럼 혹시...”
“그래, 이전에 이곳에서 나가의 심장으로 거대 마물을 불러다가 도적을 해치웠던 거 기억하지?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놈들이 살던 거처가 모험가들한테 드러난 게 아닐까 해.”
“그렇구나...”
라디가 복잡한 눈길로 지도를 응시했다. 나와 녀석은 당시 사건에 가장 긴밀하게 휘말렸던 사람 중 한 명이니까.
희미한 연풍에 살랑이는 회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자 아리엘이 라디의 손을 맞잡으며 내게 물었다.
“거수의 은신처라... 엄청 흥미로운 대목이네... 그럼 그 거수는 어떤 마물이야?”
“응? 어떤 마물이라니?”
“그야 그때 도란이 만났던 거수는 총 세 마리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분명...”
“아, 나 그거 알아! 거대 기니피그랑 두더지, 늑대 맞지?!”
“네? 기니피그가 뭐예요.. 기니피그가... 실제로 그런 마물이 있으면 꽤 귀여울 것 같긴 하네요. ...기니피그가 아니라 멧돼지였어요.”
“아 맞아맞아! 그랬어!!”
니아가 내 팔에 기대며 아하하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셋 중 어떤 마물인지는 못 들었네요. 니아 님, 혹시 보부상한테서 지도를 구할 때 다른 말은 없었어요?”
“응?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곳에 살던 마물은 일찍이 떠나서 빈 터만 남아있다나 봐! 저어기 대형 폭포에 밀려 인기가 시들하지만 나름 2계층의 숨은 명소로 통하는 모양이고! 마물의 보금자리, 그것도 거대 괴수의 둥지를 탐사할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까!”
“...그렇다네. 어차피 이곳에서 가까우니까 다들 안 피곤하면 후딱 갔다 올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슬쩍 운을 떼자 아리엘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난 찬성! 거대 마물의 은신처라니... 어떨지 너무 궁금해! 어차피 우린 불침번을 설 필요도 없으니까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상관없잖아?”
“...저도 아리엘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나도 나도!!”
“네, 그럼 니아 님까지 찬성이고... 라디, 넌 어때?”
내 품에 안긴 라디의 귀를 살살 어루만져주며 묻자 녀석이 살며시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저도 거수의 은신처라고 하니 궁금하긴 하네요... 하지만...”
“하지만?”
“저희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면 여기 남아서 짐을 지킬 사람이 없어지잖아요. 최소한 한 명은 남아있어야 할 텐데...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머지 분들끼리...”
“아, 그건 걱정 마.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네?”
라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올려다봤다.
*
“...정말 이걸로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안 될 것도 없잖아. 원래 종종 경비를 서던 애들이니까 이쯤이야 익숙할 테고.”
“으음... 그래도 왠지... 이대로 소환수한테 전부 맡기고 떠나긴 조금 불안한데... 지금까지는 무슨 일이 생겨도 도란님이 통제할 수 있었던 데다, 저 술단지는 한 항아리에 금화 몇십 닢씩 하는 것들이잖아요.”
“괜찮다니까. 얘네들만큼 믿음직한 애들이 또 어디 있다고.”
나는 호언장담하며 검은 음영을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공터에 득시글거리는 마물 무리를.
언뜻 보기엔 평범한 야영지지만 자세히 살피면 그림자에 잠긴 채 머리만 동동 떠다니는 히드라와 키메라, 그루터기 뒤 큼지막한 노래기의 갑각, 그림자 속에 포복해 샛노란 안광을 번뜩이는 개미 떼와 텐트 안에서 삐져나와 있는 길쭉한 거미의 다리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소환수들임에도 소름이 돋는 광경.
아군이었으니 망정이지, 이곳에 무심코 발을 들였다가 놈들을 발견하고 놀랄 모험가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악동처럼 미소짓자 라디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짐을 도둑맞아도 문제지만 자칫 피해자가 발생했다간...”
“괜찮아. 어지간해서는 그냥 겁만 주고 내쫓을 거니까. 저 개미들이 튀어나와 덮치는 시늉만 해도 다들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칠걸?”
“...그럼 저희가 마물을 다룬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잖아요.”
“에이, 보통 사람들이 이걸 보면 우리도 마물한테 당한 거라고 생각하지, 누가 소환수라고 생각하겠어. 아니면 일단 포박해둔 다음에 겁을 줘서 입막음해도 되고. 저기 봐봐.”
“~♪”
니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반대편 나무 사이에서 걸어나와 공터에 발을 들였다.
그녀는 지나가던 모험가를 가장해 응달진 곳에 줄줄이 세워놓은 항아리를 유심히 살피고 배낭을 기웃거리더니 텐트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텐트로 향한 순간
푸슈슉!!
“....!”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나온 거미로부터 반투명한 실이 분사되었다.
함정에 빠지는 역할을 자청해 부지불식간에 제압당한 니아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눈동자를 빛내며 외쳤다.
“우와...! 소년! 이거 장난 아닌데!? 알면서도 깜짝 놀랐어! 일반 모험가라면 대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당할 거야!”
“잘됐네요. 거미줄 혼자서 풀 수 있겠어요?”
“응, 힘을 주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니아가 사지를 칭칭 동여맨 거미줄을 풀어내고자 팔뚝에 힘을 싣자
“음...?”
“...왜요?”
“아니 이거... 좀 이상하네.. 뭔가 단단하고 끈적거리면서도 신축성이 장난 아냐. 어거지로 뜯어낼 수는 있지만 신체 강화 없이는 힘들겠어.”
“그래요? 그럼 제가 잘라드릴 테니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끈적거리는 것까지 전부 떼어내야 하니까요.”
“으응... 근데 이거 말야...”
니아가 제 팔을 구속한 거미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은근슬쩍 귓가에 속삭였다.
“...소년, 이거 잘만 쓰면 유용할 것 같지 않아?”
“네? 그야 당연하죠?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니까요. 예를 들면 밧줄 대용이라던가, 아니면 접착제처럼...”
“아니, 그런 거 말고... 이걸로 손발을 묶으면 옴짝달싹 못 할 거 아냐. 이걸로 날 침대에 묶어놓고... 저항하지 못하는 채로 거칠게 범하는 건...”
“....해줄까?”
“으응...? 할 수만 있다면...? 하, 하지만 소년은 겁쟁이라 못 하겠지! 안 그래?”
“.....”
요즘 니아가 계속 업보를 쌓는 것 같은데...
조만간 청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내가 말이 없자 살짝 당황하며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 표범 소녀를 쓰다듬어주고 일어서자 아리엘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으음... 그러면 이걸로 준비는 다 끝난 거야? 경비 대책도 마련했으니까...”
“그래, 이제 거수의 은신처까지 가는 도중에 중간중간 개미를 심어두기만 하면 돼. 그러면 애들이 페로몬으로 소통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알려줄 거거든. 그럼 이제 문제는...”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도란?”
“....아무것도 아냐.”
나는 웃으며 얼버무리곤 지도를 꺼내들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난 공터 바깥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해 앞서나가며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거수의 존재에 대한 의문.
지하 공동에서 이교도를 처리하고 빠져나오던 중, 로닌에게 들었던 절벽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게다가 마지막 늑대는 대체 어떻게 길들이신 거예요?”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톤, 아니 도란 형이 거대 늑대의 무지막지한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남았잖아요! 엄청난 접전이었는데 나중에 형이 밀려가지고... 전 그때 형이 꼼짝없이 잡아먹힐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늑대가 친근하게 코를 문대고 사라졌.. 이상하다... 혹시 기억 안 나요?”
“....타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