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 해일과 메라 그리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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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해일과 메라 그리고... #6
“어디 보자... 이쯤이면 나올 때가 됐는데...”
“...설마 길을 잃은 거예요?”
“도란이 숲에서 길을 잃다니 의외네...”
“아냐...! 난 그냥 지도에 적힌 대로... 아, 아니 니아 님! 애초에 이거 제대로 된 지도 맞아요?!”
“응, 분명 맞다고 했는데... 왜, 뭐가 이상해?”
“아니... 이상한 건.. 아닌데...”
사냥감의 흔적을 찾거나 마물을 추격하는 거라면 몰라도 정확한 방위와 기준점 없이 엉성한 약도 하나에 의존해 길을 찾아가라고 하니 곤란하기 짝이 없다.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양피지를 응시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난감하게 입을 열었다.
“으음... 혹시 첫 단추부터 잘못된 걸까...? 그냥 상대를 골려주려고 만든 가짜 지도라거나...”
“으...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정체를 알아보고 준 거란 말야...! 제정신이라면 그딴 장난을 할 리가 없잖아.”
“하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 던전에서 붉은 매 길드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위를 할 리가 없죠... 최근에는 타지에서 다른 하이랭커 파티도 몰려들었다고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아니스 가문이 꽉 잡고 있으니까요.”
“으음... 그럼 지도가 잘못된 건 아닐 텐데...”
“.....”
술렁이는 불안감이 퍼져나가자 나는 자세를 낮춘 채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거수가 얼마 전까지 이곳에 살았던 건 맞을 거야.”
“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까부터 동물의 흔적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거든. 라디야, 우리 7계층에서 빙조(?)를 봤을 때를 기억해?”
“빙조... 카쟈드 이글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기억하죠. 저희가 탈출하려던 통로를 지키던 존재였잖아요. 그 커다란 덩치랑 오싹한 눈동자를 떠올리면 아직도 오한이.. 으으...”
“그래, 그리고 놈이 살던 설산에 발을 들였을 때 곰 일가족이 도망쳤던 건. 또 근처 동굴에서 며칠 체류하는 동안 다른 몬스터가 얼씬도 안 했던 것도.”
“설마 도란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게...”
“그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곳에선 잡다한 마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하다못해 새의 둥지나 딱따구리에게 쪼인 나무 흔적, 멧돼지 발톱에 파헤쳐진 흙이나 나무뿌리 같은 거. 그렇다는 건 동물들이 이 근방을 기피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고...”
“거수... 일 확률이 높겠네요. 최상위 포식자니까...”
“그렇지.”
씨익 웃자 니아가 입을 헤 벌리며 중얼거렸다.
“우와... 소년 진짜 예리하구나...?! 난 그런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냥 큰 마력이 느껴지지 않으니 주변에 없겠거니 했지...”
“역시 진짜배기 모험가는 다르네... 근데 그 말은 거수가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아냐...? 조금 위험할지도...”
“그건 걱정 마. 멀리서 어렴풋이 새가 지저귀는 소리 들리지? 거수가 사라져서 떠나갔던 동물들이 돌아오는 거야.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니아 님이랑 내가 힘을 합치면 무사히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괜찮아.”
아마 절벽에서의 사건 이후 불쾌함을 느낀 거수가 이곳을 떠나고, 이 근방에 밴 체취와 마력의 잔흔이 소멸함에 따라 차차 동물들이 돌아오는 중이리라.
냉철하게 사고를 마치자 아리엘과 실비가 차례로 감탄했다.
“그래...? 대단하네... 겨우 이 정도 단서로 거기까지...”
“...주인님은 숲에 능통하다는 말이 참으로 사실이었군요. 뭔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혜안을 지니고 계시는지...”
“뭐, 그냥... 숲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익힌 거야. 동물의 감각이 인간보다 뛰어나니깐 무슨 조짐이 있으면 녀석들이 제일 먼저 반응하거든. 예컨대 숲에 위험한 게 돌아다니면 주변이 완전 싸해져.”
“그렇군요... 하나 배웠습니다. 주인님은 정말이지 지혜롭군요... 숲의 주민이라는 엘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건 좀 과찬...”
“...완전히 눈에 콩깍지가 꼈네요. 대단한 건 인정한다만...”
“크흐흠...”
실비와 아이컨텍을 하고 있자니 불퉁하게 쳐다보는 라디의 시선이 따가워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한데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고는 발길을 재개하려던 차, 문뜩 란이가 수통 사이로 삐져나와 외쳤다.
됴란!!
“어 란이야 왜, 뭔가 있어?”
됴오란...! 됴란!!
“아, 물가가 근처에 있다고? 이 근방에서 물가면...”
“지도에 나오는 계곡 같은데요...?”
“그래, 한번 가보자. 란이야, 안내해줄래?”
됴란!
정처 없이 흘러가던 발걸음을 바로잡았다.
란이가 손짓하는 방향을 따라 나아가다 보니 드문드문 기묘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붉고 탐스러운 과실이 주렁주렁 열렸음에도 아무도 건들지 않은 과일나무와 거수가 다니면서 짓밟고 간 탓인지 곳곳이 부서지거나 기이하게 휘어진 나무 등.
빗물에 지워져 제대로 된 윤곽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거대한 마물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구덩이를 지나치자 머잖아 숲길이 뚝 끊기고 시야가 탁 트였다.
“와아... 소년, 저기 봐!! 지도에 나온 지형이야!!”
거수의 은신처.
마천루처럼 높게 불거진 지반이 섬처럼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장소. 벼랑과 벼랑을 잇는 아슬아슬한 줄다리 아래로는 빠른 급류가 흐르고, 암반에 부딪혀 부서지는 물살이 새하얀 물거품을 자아냈다.
마치 강물 위에 이끼 묻은 징검돌을 뿌려놓은 듯 이상야릇하면서도 장엄한 광경.
외부로부터 고립된 탓인지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아 경이롭고, 아름답다.
아침 햇살을 받아 푸르게 반짝이는 계곡물과 흘러넘칠 만치 바위섬 위를 뒤덮은 식생,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 등을 응시하며 다 함께 멍하니 절경에 푹 빠져있자니 라디가 까마득한 줄다리를 보고 진저리를 치며 내게서 지도를 빼앗았다.
“바위섬 지대... 그러니까 이 돌출된 지반 중 어딘가에 커다란 동굴이 있고, 거기에 거수가 살고 있었다는 거죠?”
“맞아! 내가 보부상한테 들은 내용도 그거였어! 일단 거기 적혀 있는 대로라면 이 중 아홉 번째 섬이라고 나와 있는데...”
“지도가 엉망이어서 못 알아보겠네요. 어느 섬이 어느 섬이고, 뭐가 땅이고 물인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어요. 선도 삐딱하고, 섬의 크기도 들쭉날쭉하고... 일곱 살짜리 애가 그려도 이것보단 더 잘 묘사할 것 같은데.”
“신랄하네... 뭐, 전문 측량사가 제작한 것도 아니니까 감안해야지. 그럼 여기선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확인해봐야 하나...”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일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구불구불한 급류와 소용돌이. 온더락 잔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얼음처럼 흩어진 암반.
여기서 내가 덩굴을 소환해 올라타고 지형을 살피면 정확한 동굴의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곤란하네.’
주변을 둘러보자 적지 않은 수의 모험가가 보였다. 이곳에 거수의 은신처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다들 몰려든 모양. 숨겨진 관광 명소라는 말이 과장된 게 아니었나 보다.
때마침 한 혼성 모험가 파티가 우리 옆을 지나가 후드를 눌러쓰고 조용히 대화를 엿듣자
“드디어 도착했다!! 다들 주목!! 거수의 은신처라고 하니 이곳에 숨겨진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샅샅이 훑으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걸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도록!”
“아니... 이곳은 다른 모험가들이 한 번씩 탐사하고 간 곳이라며. 이제 와서 뭐가 남아있겠어?”
“야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혹시 알아? 놈이 레어메탈이라도 물어서 둥지로 들고 오다가 도중에 떨어뜨렸을지. 잘 찾아보면 저런 섬 중 하나에도...”
“에이, 무슨 까마귀도 아니고... 그럼 거수가 나타나도 널 미끼로 던지고 가면 되겠네. 그 거추장스럽게 빤딱거리기만 하는 철갑 때문에 표적으로는 딱이니까.”
“뭐, 뭐?! 전혀 안 거추장스럽다고!! 무려 헤르모케 대장간에서 금화를 두 닢이나 주고 맞춘 갑주란 말야!!”
모험가들이 낄낄거리며 줄다리를 타고 건너자 소란이 잦아들었다.
그들이 줄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아리엘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물이라... 이곳에도 보물이 있을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아까 저 남자가 말한 것처럼 반짝거리는 물체를 모으는 마물도 있어. 고블린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유명하고, 몇몇 리자드맨이나 비행형 마물... 보석둥지까치라고 불리는 놈은 아예 반짝이는 물건으로 가짜 둥지를 여럿 만들어서 포식자들의 주의를 끈다고 하니까.”
“신기하네... 전부 생소한 이야기야. 도란을 따라서 모험가가 되고 난 뒤로는 매 순간이 경이롭고 신비해... 신전을 떠나오길 참 잘했어!”
“앞으로 더 대단한 곳도 있는데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해. 그나저나 보물... 보물이라...”
나는 웃으며 아리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 안식처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정말로 보금자리에 가치 있는 물건을 모아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거수는 그냥 단순히 몸집이 큰 마물을 지칭하는 것뿐만이 아니니까.
‘덩치만 큰 거였으면 애당초 대단할 것도 없었겠지...’
몬스터 중 드물게 막대한 마력을 지닌 돌연변이가 태어나면 놈도 마법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긴 수명을 가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자연의 경쟁을 뚫고 끊임없이 성장해 강한 힘을 거머쥐게 된 것이 바로 거수.
오랜 수명 덕분에 상당한 지능과 지혜를 두루 겸비하게 된 이들은 경외와 두려움의 뜻을 담아 숲의 현자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거대한 몸집을 살린 육탄 공격과 강력한 마법, 그를 웃도는 지능을 활용해 인간을 농락하거나 때때론 숲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을 도와주는 둥 수많은 구전이 있는 거수의 존재는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라고 하니까.
즉, 이곳에 둥지를 텄던 거수가 가치 있는 물건을 모아두는 습성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
아니면...
“가치 있는... 물건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약 정말로 이 은신처의 주인이 전번에 봤던 늑대 거수고, 놈이 여왕의 묘지 앞 부조에 새겨져 있던 늑대와 동일 개체라고 한다면...
“...무슨 일 있어요 도란님?”
“아냐... 일단 가보자. 사람들이 꽤 있으니까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을 찾으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줄다리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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