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57화 (357/375)

〈 357화 〉 해일과 메라 그리고... #8

* * *

[357] 해일과 메라 그리고... #8

“라디야.”

“...하지 마세요.”

“라디야.”

“하, 하지 마세요!! 전 분명히 경고했어요?!!”

“....”

“그만그만그만!! 더 건드렸다간 진짜로 지릴 것 같다고요!! 정말로 도란님 위에 싸 버리는 수가 있어요?!”

거미줄로 몸을 묶은 채 노래기를 타고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기어오르고 있자니 라디가 시뻘건 얼굴로 소리쳤다.

굴하지 않고 검지로 쿡쿡 찔러가며 반응을 즐기고 있자니 아리엘이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으음... 도란은 후환이 두렵지 않아...? 나중에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에이... 해봤자 뭘 한다고. 고작해야 밤에 조금 더 쥐어짜이고 말겠지.”

“...감당할 수 있어?”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야 당연하지. 너희 둘이 합쳐도 아직 나한테는 안 돼.”

체력의 급이 다르다. 급이.

꾸준한 운동과 타고난 체력 덕에 두 녀석을 녹아웃 시키고도 거뜬할 정도니.

아마 니아가 참전해도 차고 넘치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되뇌이며 돌아보자 아리엘이 살짝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고는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니아가 슬금슬금 앞으로 상체를 뻗어 내 로브 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움... 나도... 나도 끼워줘...”

“네, 니아 님. 외로웠어요?”

“응... 나도 소년한테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데...”

“...네, 저도 그래요. 이제 좀만 있으면 암시장이니까 참아요.”

“알았어. ...근데 정말로 이 위에 진짜 거수의 은신처가 있는 거야?”

“아뇨, 그건 저도 모르죠.”

“뭐어? 그럼 이곳은 왜 올라오자고 한 건데...? 여기에 늑대 거수가 산다고 했던 거 아니었어?”

“제 말은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놈은 높은 지형에서 주변을 정찰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거든요. 제가 나가의 심장을 썼을 때도 절벽 위에서 나타났던 정황으로 볼 때 이런 고지대에서 살 확률이 높기도 하고요.”

지금에서야 떠올린 사실이지만, 실비의 일기장에서 등장했던 늑대 ‘타로’는 실비를 등에 태우고 정찰을 나서곤 했다는 묘사가 있었지...

설마 정말로 같은 존재인 걸까.

­덜컹!

“꺄아악!!”

“...어이쿠.”

잠시 과거를 상기하던 중, 노래기가 덜컹거리자 앞쪽에서 라디의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렇게 고개를 들어 꼭대기를 쳐다보기조차 뻐근할 정도로 가파른 수직 절벽을 오르는 건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엄두도 못 낼 터.

다른 모험가들의 시선을 피해 바위섬 지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지점에서 암벽을 등반하고 있자니 세찬 곡풍이 머리칼과 균형을 흩트렸다.

바위 표면이 울렁거리는 게 꼭 숙취라도 겪는 느낌.

머리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낙석에 주의하며 암벽을 오르다 보니 머잖아 정상이 보인다.

마지막까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절벽 위에 도달한 우리의 눈앞에 도래한 광경은...

“뭐...?”

“자, 잠깐...?! 도, 도란 뭔가 조금 이상한데... 이, 이게 다 뭐야!?”

“뼈? 시체...? 언데드는 아닌 것 같은데...”

“다들 하나같이.. 거대하군요...”

“...그러게.”

이걸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래,

뼈 무덤.

절벽 위는 방치된 쓰레기장처럼 시선이 닿는 곳까지 전부 마물의 유골로 뒤덮여 있었다.

온통 새하얀 빛깔을 띤 뼈다귀들. 바람이 불자 도처에 널린 갈비뼈 사이로 으스스한 귀곡성이 흘러나오고, 단단한 대지는 수 세기에 걸친 피로 검게 물들었다.

들쭉날쭉 아무렇게나 쌓여 방치된 유해는 종류에도 일관성이 없어 매머드의 유골부터 베라스틴의 성문을 두 번은 두를 수 있을 법한 보아뱀, 바다 거북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귀갑까지 다양하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사냥해온 먹이를 전부 이곳에서 먹었던 모양.

하지만 2계층 내에선 이렇게 많은 사냥감을 공수하는 게 불가능했을 텐데...

‘설마... 전부 다른 계층에서 잡아 온 건가...?’

예를 들면 저 매머드의 경우 7계층에서, 보아뱀은 울창한 정글이 펼쳐져 있다는 6계층에서, 바다 거북이는 이 던전 안 어딘가에 해수로 이루어진 지역이 있다는 얘길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간만 계층을 이동하라는 법은 없지만, 이렇게 분명한 마물의 계층 이동 흔적을 보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야 이런 강력한 존재가 던전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초보 모험가들이 몰려 있는 1계층이나 암시장을 급습하기라도 하면...

‘끔찍하네...’

더군다나 비교적 최근에 사냥한 먹잇감인지 몇몇 뼈다귀에 붙은 살점을 노리고 까마귀들이 배회하지만, 이곳에 배어든 늑대의 체취와 마력 때문에 차마 내려앉지 못하고 허공만 맴돌고 있다.

이 정도면 단순한 계층 보스를 넘어서 던전 전체를 주름잡는 존재라고 해도 안 부족할 것 같은데...

7계층의 출입구를 지키던 거대한 빙조와 붙여놓으면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노래기를 그림자 속으로 되돌리고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문뜩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이걸로 이곳에서 늑대 거수가 활동했던 건 확실해졌지만, 단지 그뿐이다.

녀석과 실비의 일기장에 등장했던 늑대와의 연결 고리를 확인하려면 더욱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데...

“...일단 걸을까?”

나는 난처하게 일행을 둘러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뼈 무덤을 살피며 전진하자 예사롭지 않은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초대형 스콜피온 갑각과 망가진 거대 골렘, 목뼈가 통째로 부러진 채 주저앉아 있는 대형 포유류의 뼈와 한눈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거대한 해왕류 등.

하나같이 쟁쟁한 사냥감들이다.

추정하건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강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아슬아슬한 사냥을 지속해온 것이 아닐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자연계에서 모든 포식자는 쉽고 안전한 먹이를 선호하는 편이다.

상대가 초식 동물이라도 발톱에 찍히거나 뿔에 들이받혀 상처를 입으면 생존과 먹이 경쟁에서 크게 도태될 수 있기에.

그렇다면 묘한 집념마저 느껴지는 이 늑대의 행각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에 잠긴 채 뼈 사이에 파묻혀 걷다 보니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멈춰섰다.

늑대가 자주 왕래한 탓에 지면이 드러난 뼛길을 따라 이동하던 중, 불현듯 뼈 사이로 흘러나오던 귀곡성이 뚝 끊기고 탁 트인 지점이 나왔으니까.

절벽의 끝,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을 마주하는 지점.

너른 공간엔 딱 내 기억 속의 늑대가 들어갈 만큼의 파인 흔적과 선명한 발자국이 찍혀있었고, 다른 곳에 비해 유독 땅 색깔이 옅었다.

이건 아무래도...

“도란님, 이곳은...”

“그래...”

아마 늑대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리라.

동굴 같은 은신처를 상상했는데 사방이 뚫린 장소라는 점에 한 번, 잘못 헛디디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끝이라는 점에 또 한 번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문뜩 아리엘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도란... 저기 벼랑 끝에 뭔가 있는데...?”

“저건...”

비석.

황량한 공터의 끝에 무미건조한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기대와 불안, 복잡한 추측이 휘몰아치는 마음을 추스르며 다가가자 절벽 너머로 까마득한 전경이 내려다보임과 동시에 비석에 비스듬히 걸린 뼈 목걸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얇은 가죽끈에 마물의 이빨과 반짝이는 돌멩이 따위를 통과시켜 만든 물건.

원시적이지만, 인간의 손이 닿은 작품.

목걸이가 손끝에서 맑은 음색을 내며 미끄러지자 나는 비로소 비석에 쓰여진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풍경이야. 어때, 멋지지?

아.

벼랑 아래로 장엄한 전경이 펼쳐졌다.

푸르고 맑은 산천이 흐르고, 흩어진 강줄기가 중앙으로 모이고, 다시 흩어지고 순환하며 지역 일대를 휘감아 던전을 이루고.

느릿하게 흘러가는 하늘과 굳건한 대지가 빼곡하게 도화지를 채우면, 폭포와 급류가 풍경종처럼 맑은 물소리를 자아내고.

파릇파릇한 녹음의 아취를 머금은 바람이 평범한 바위섬 지대인 줄만 알았던, 쥐와 인간, 표범과 고양이 등의 형상을 띈 암반을 두르고, 생명의 기운을 전파하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내 발아래 펼쳐졌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댐을 부수고 범람하는 강물처럼 뇌리에 강렬한 기억을 때려 박는 풍경 앞에 그저 조금 벅찬 숨을 쉬고 있자니 라디가 내 옆으로 다가와 당황한 어조로 읊조렸다.

“잠깐... 이건 뼈 목걸이...? 저희가 작별하기 전에 울시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한데...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타로...”

“네...?”

“그 늑대가 타로였어.”

이 목걸이는 아마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과거에 내가 만들어 준 것일 터.

몸이 자라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자 이곳에 걸어두고 소중하게 지켜온 것이리라.

비에 젖어도, 눈이 쌓여도, 세찬 우레와 태풍이 몰아쳐도, 이곳에 우두커니 앉아 만연한 고독과 그리움을 씹으며 비석을 지켜왔을 늑대의 모습이 눈가에 선연하다.

유독 비바람의 흔적 없이 온전하게 보존된 비석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터져나오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참고 있자니 모든 걸 짐작한 라디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늑대... 아니, 타로는 어디로 간 걸까요.”

“글쎄... 아마 이 던전 어딘가이지 않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7계층까지 가기로 했으니 도중에 만날 수 있기를 바래야지.”

멋진 해변가가 있다는 이 던전 어딘가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거나, 어쩌면 열대 우림으로 뒤덮여 있다는 6계층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타로는 우리의 옛 동료이자 해일이와 메라의 오랜 친구일 테니까.

더군다나...

‘나는 이번에도 도움을 받았던 건가...’

순간,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울시와 함께 얼음 절벽 아래에 고립되었을 때 당시, 녀석은 날 죽이려고 했었다.

우린 적이었으니까.

그런 녀석이 태도를 바꾸어 차근차근 나와 교류를 쌓아나가기 시작한 건 내 체취를 맡고 나서부터였다.

그때 울시가 당황했던 건, 내게서 익숙한 동포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 아닐까.

절벽에서의 전투 이후, 타로가 내게 살갑게 코를 문대는 걸 로닌이 목격했으니.

“.....”

다시 만나면 꼭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라디가 안타까운 눈길로 목걸이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도란님은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이제 3계층으로 가봐야지. 가서 암시장 구경도 하고. 아델 누나랑 비아투스 어르신도 만나고. 아니스 님도 만나서 얘기도 좀 하고...”

니아 님, 아니 니아.

“.....”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한여름의 태양을 녹여 두른 듯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부드러운 손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포근하게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채취를 느끼며ㅡ

“...갈까.”

“....응.”

니아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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